쇼핑 중독에 빠진 당신에게

#돈의 황홀함과 씁쓸함_<종이달>_가쿠다 미쓰요

by 여행생활자KAI

나의 첫 명품가방은 루이비통이었다. 공모전에 출품한 다큐멘터리가 수상을 하면서 상금을 받게 되었다. 이 돈만큼은 저축보다는 오롯이 나만을 위해 쓰고 싶었다. 몇 년을 밤낮으로 휴일없이 일했으니 이 정도의 보상쯤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한 번도 명품 매장에 들어가 본적이 없었던 나는 기죽고 싶지 않아서 가진 옷 중에 최대한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백화점에 갔다. 물론 나만의 착각이었다. 돌이켜 보건데 매장 직원의 눈에는 겨우겨우 돈을 모아 가방을 사러 온 소시민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런 곳에 자주 와 본 사람인 척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며 인터넷으로 봐둔 가방들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수십 번 검색을 했기 때문에 이미 평균적인 가격은 알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0이 여섯 개 이상 찍힌 액수를 보니 심장이 쿵쾅거림으로 요동쳤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효용성에 대해 잠시 떠올려봤다. 당장 두 달 치 월세를 내고도 남을 돈이었다. 과연 명품 소비를 통해서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내적 갈등을 눈치라도 챈 듯, 블랙 정장에 역시 까만 장갑을 낀 직원은 마치 고급 다이아몬드를 다루 듯 조심스럽게 가방을 매만지며 장점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지금 고객님 스타일이랑 너무 매치가 잘 될 뿐만 아니라 전국에 이 상품이 몇 개 남지 않았으며 아마 다음 달부터 가격 인상이 있을 것 같다는 뻔한 이야기들이었다. 허나 나를 부추긴 결정적 한 방이 있었다. “이 상품은 사람을 참 단아하고 귀해 보이게 만들어 주죠.” 분명 오늘 하루 동안에도 수 십 번 반복했을 말 일텐데, “귀해 보인다”는 그 말은 마치 나비가 되어 내 귀에 팔랑거렸다. 이 가방이 평범한 내 품격을 한층 올려줄 것이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어차피 상금이었고 나를 위해 쓰기로 결심을 하고 온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주며 그 가방을 달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어머, 고객님 잘 선택 하셨어요. 할부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경쾌하게 묻는 직원의 질문에 무심한 듯 “일시불이요” 라고 말할 때 묘한 쾌감이 스쳤다. 나는 할부가 아닌 일시불로 고가의 제품을 살만한 여력이 되는 사람임을 은연중에 비치게 된 것만 같았다. 명품 로고가 중앙에 박힌, 내 몸을 다 가릴 만큼의 큰 종이가방을 익숙한 듯 어깨에 매고 백화점 문을 열고나올 때 짜릿했다. 마치 그럴싸해 보이는 상류층 사람이 된 듯 한 기분이 얄팍하게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돈이 주는 쾌락을 맛 본 순간이었다. 동시에 무섭기도 했다. 이 야릇함에 빠지게 될까봐.



한 없이 달콤하지만 잘못 디디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늪과도 같은 것이 돈이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세상의 값비싼 것들, 그것을 지불하는 순간 받는 고급스러운 서비스, 예쁜 옷과 가방으로 치장한 나에게 보내는 부러운 시선은 또 다른 소비를 부추긴다. 하지만 불행은 능력치가 욕망을 따라가지 못할 때 시작된다.

그녀는 돈이 주는 화려함과 여유를 사랑했다. 남편과 결혼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주부 리카. 안정은 또 다른 의미로 무미건조함이기도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일상이 무의미했다.


은연 중 경제적 우월감을 비치는 남편으로부터 자립하고 싶었던 리카는 은행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되고 곧 능력을 인정받아 계약직 직원이 된다. 스스로 돈을 벌게 되자 잠시 잃어버린 삶을 되찾은 듯 했다. 리카는 유독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직접 은행에 오기 힘든 고객들은 그녀를 믿고 돈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색하기로 이름난 노인 히라바야시의 집에 외근을 갔다가 손자인 대학생 고타를 만난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할아버지가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고타는 학비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측은하게 여긴 그녀는 히라바야시가 예금으로 맡긴 돈을 고타에게 준다.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어차피 고타는 그의 손자였고 다시 채워 넣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의 서막이자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10억원 횡령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실제 은행 여직원의 횡령 사건을 바탕으로 한 <종이달>은 리카와 고객들을 통해 1980년대 말 일본 버블 경제의 끝자락,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부모세대와 침몰직전의 배에 막 올라타 방황하는 가난한 자녀세대들의 대비를 통해 일본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기울어져가는 경기 불황 속에서 여자들은 작은 빈부격차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리카역시 그런 부류 중 한명이었다. 퇴근 후 백화점 돌다 한 번씩 충동구매를 하던 그녀는 점차 ‘돈’이 주는 쾌락에 눈 뜨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난다.

리카는 고타와의 데이트를 위해 다른 고객의 돈에도 손을 댔다. 유명 레스토랑과 호텔 스위트룸을 다녔고 연하인 연인에게 걸맞고자 자신에 대한 치장도 아끼지 않았다. 어느새 리카는 돈이 주는 안락함에 중독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안정이 되지 않아 열심히 익숙한 척 했던 스위트룸에 도착하면 진심으로 안도하게 된 것은 체크인한지 사흘째였다. 청결하고 안전하고 선의로 둘러싸여있고 사랑하는 남자가 아이처럼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가 하고 리카는 생각했다.


<종이달>은 우리가 돈을 썼을 때 느끼는 기분을 너무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 충동구매를 하는지, 이후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마치 쇼핑 중독에 빠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법한 감정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읽다보면 남의 돈으로 향락을 즐기는 그녀를 오히려 부러워하는 나를 발견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정도로 문장에 설득력이 있다.



리카가 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돈이 곧 나였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다. 남다른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매사에 자기주장이 강한 편도 아니었다. 일에 흥미가 없었지만 이직할 자신도 없어서 결혼을 하자마자 퇴사를 했다. 리카는 색깔없는 자신이 싫었고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 과거 연인이었던 가즈키가 말했듯 “누구보다 견고한 울타리에 살았던 리카는 자신이라는 틀을 부수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프랑수와즈 사강처럼 자신을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리카는 돈을 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허무를 충만으로 채워준 것은 돈, 혹은 돈을 쓰는 행위에 있었다.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돈은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에 가까웠다"


돈만이 리카를 살아 숨 쉬게 한 것은 유감이다. 적어도 미칠 듯 몰려오는 허무함을 매울 수단이 ‘그릇된 돈’은 아니었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했다면, 돈 쓰는 일이 아닌 생산적인 에너지를 쓰는 일을 찾았더라면 삶은 달라졌을까?


사태는 일파만파 심각해지고 있었다. 도무지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던 리카는 누군가가 알아채고 멈춰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고속 모터를 단 쾌락의 동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자신이 누구의 돈을 어떻게 쓰는지조차 무감각 해질 정도로 무방비하게 돈을 쓰던 어느 순간 더 이상 돌이갈 수 없는 낭떠러지에 서있음을 깨닫는다. 리카의 10억원 횡령 사건이 전국에 보도되면서 그녀를 추억하는 세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리카와 달리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똑같이 돈의 하수가 된 사람들이다.

학교 친구 요코는 과도한 절약 정신으로 가족들까지 힘들게 하며, 요리교실 친구 아키는 쇼핑 중독으로 이혼을 당하고 새 삶을 시작해 보려 하지만 결국 외로움을 쇼핑으로 달래며 살고 있다. 가끔 만나는 딸에게 값비싼 옷들을 선물하며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리카와 한때 사귄 적이 있던 가즈키는 유복한 어린 시절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해 쇼핑중독에 빠진 아내와 이혼을 결심한다.


결국 리카도 나머지 세 인물도 모두 돈에 서투른 사람들이었다. 돈에 인생을 걸면 돈에 매달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돈이 존재이유인 사람들은 곧 돈의 노예가 되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돈을 믿었던 이들은 사랑도 가족도 심지어 자신도 돈으로 사려고 했고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 돈이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지만 결국엔 종이에 불과하다. 종이로 만든 달은 종이일 뿐, 무엇도 비출 수가 없었다.


제목 <종이달>은 부질없는 돈의 속성을 말함과 동시에 가족, 연인과 보낸 행복한 한때를 상징한다. 일본에 사진관이 처음 생겼을 무렵 가짜 달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돈이 주는 허무함과 쇼핑 중독에 대한 반성, 물질이 아닌 내면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종이달이 ‘호우시절’을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리카의 행동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점이 <종이달>이 뻔한 소설이 아닌 이유다. 삶이 외롭고 처량했던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지언정 원 없이 돈을 펑펑 썼던 그 순간이 행복했고 후회는 없었다. 물론 횡령은 잘못된 행위이다. 하지만 리카의 마지막 독백은 과연 무엇이 정답인지를 되묻는다.


“엄청나게 큰 자유는 스스로는 벌 수 없을 만큼의 큰 돈을 쓰고 난 뒤에 얻은 것일까, 아니면 돌아갈 곳도 예금통장도 모두 놓아버린 지금이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돈의 맛은 때로 달콤하고 때로 쓰다.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야지 싶다가도 값나가는 차를 타며 근사한 집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한 없이 부러워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의 모습은 리카처럼 오늘만 사는 욜로족일 수도, 극단적 절약으로 노후를 대비하는 파이어족과 같은 요코일 수도 있다. 이토록 오락가락 하는 것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돈의 성격이기도 하다.


니체는 ‘정당한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만 지나친 소유는 소유자체가 주인이 되어 소유자를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정당한 소유를 돈으로 대입해보면 돈에 대한 정의는 명확해진다. 적당한 돈은 삶을 자유롭게 하지만 지나친 집착은 역으로 우리를 옭아맨다. 솔직히 말은 쉽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문제는 ‘적당한’의 기준에 있다. 대한민국이란 좁은 땅에서 내 집 하나 마련하고 싶어서 고되게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에게 ‘적당한 돈’이란 얼마를 의미할까? 과연 나는 한낱 종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대체 돈에 예속되지 않는 삶이란 있기는 한 것일까?


종이달이 아닌 온전히 스스로를 비출 수 있는
진짜 달을 갖기란
인간이 달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iqcbEAVuHI&t=2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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