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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Dec 06. 2021

코로나 2년이 남긴 것, 727일의 집밥

독일에서 보낸 코로나 시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각 시기를 초보자로서 출발한다. 독일의 정착기 어려움은 예상 못한바 아니었기에, 그 수위를 초과할지언정 스스로 감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독일은 처음이니까. 걸음마 시기에 겪는 크고 작은 실패는 오히려 나를 성장시켜주는 지남철이 될 테니, 달가이 여겼다. 곧 적응 할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매일 자기 암시를 했다. 어느 상황에 처하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는 말은 특효약이었다. 물리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일도, 사랑도, 크고 작은 마음의 힘겨움도 실제로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나아졌다.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었지만 모든 것에는 변수라는 게 존재했다. ‘코로나.’ 예측 불가능한 이 바이러스에 한해서만큼은 우리 모두는 초보자였다. 처음에는 방역 수칙을 지키며 기다리다보면 일상으로의 회복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길어봐야 6개월일 것이란 믿음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모르는 위세에 체념으로 바뀌어갔다.



독일은 2020년 봄 첫 락다운 이후 몇 차례 더 국경을 잠갔다 열었다. 새로운 질병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우리는 이와 상관없이 거의 2년을 통으로 자체 격리 상태로 지냈다. 워낙 예민했던 남편 탓도 있었지만 정말이지 만날 사람이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교류하고 지내던 대부분의 지인들이 코로나를 전후로 독일을 떠났다. 남편의 학교 친구들 역시 온라인으로 강의가 대체됨에 따라 고향 혹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역마살은 영혼을 살찌우는 살이었다. 취미는 비행기 표 검색이었고, 특기는 놀궁리였다. 한국을 떠나 온 독일에서도 어디론가 떠날 생각으로 가득 찼던 여행자에게 이보다 더 가혹한 시련은 없을 줄 알았건만, 의외로 집콕이 적성에 맞았다. 하도 돌아다녀서 그런지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었다. 글을 쓰고, 온라인 강의를 하고, 책을 읽는 단조로운 일상이 가끔은 호젓하게 느껴질 정도로 꽤 적성에 맞았다.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집밥이었는데, 계산해 보니 2020년은 한 번도 외식을 못했고 이후 2021년은 코로나가 주춤했던 여름날 딱 3번 했다. 맙소사.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2년 730일 중에서 3일을 뺀 727일 동안 밥을 한 것이다. 500일의 서머도 아니고 700일의 집밥이라니. 배달, 레스토랑, 패스트푸드점 등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살 수 있는 현대인에게 가당치나 한 일인가 싶지만 그렇게 버틴 우리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긴 하다.


독일식으로 간단하게 아침‧저녁은 빵, 점심은 샐러드, 파스타 정도로 삼시세끼를 연명하고 싶었던 나와 달리 남편은 주구장창 ‘한식’을 원했다. “얼큰한 짬뽕이 먹고 싶다”는 말을 수 천 번 해댔는데, 가끔은 그 입을 꽁꽁 묶어서 뜨거운 고추기름으로 튀겨 봉합해 버리고 싶었다. (네가 독일에 오자고 했잖아?! 이 말이 혀끝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아내의 짜증이 잦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남편은 별의별 요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학 생활에서 남는 건 요리뿐이라더니. 떡볶이를 시작으로 춘천 닭갈비, 양념치킨, 탕수육 등 온갖 것을 만들어냈다.


특히 전문 식당에 버금가는 닭갈비 맛에 말을 잇지 못했다. “춘천 가는 기차 끊었니?” 라는 질문은 닭갈비를 먹자는 신호였고, 으러렁 대며 죽기 살기로 싸운 다음 날, “학생! 떡볶이 시켰어?”는 화해의 제스처였다. “오늘 밤, 한강 갈래?”는 치킨을 튀기자는 뜻이었다. 가끔은 일부러 인덕션을 켜서 야외에서 밥을 해 먹는 것 처럼 캠핑놀이를 하기도 했다. 밥을 먹을 때 만큼은 이곳이 춘천이었고, 한강이었고 캠핑장이었다.


우리는 마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크고 작은 연극을 했다. 유치했지만 음식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데워 줄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코로나 시대의 초보자였던 그와 나는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며 2년을 버텼다. 놀이를 가장한 요리를 하고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혼자 마당에 나가 잠자리를 잡았던 일, 블루투스 스피커가 없던 시절 자전거에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끈으로 고정하고서 친구와 떠났던 하이킹, 매일 보는데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은 친구들과의 비밀 다이어리, 쎄씨, 에꼴, 유행통신과 같은 잡지들…. 그런 시시껄렁한 옛날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매일 밤 쏟아졌다. 별들도 달들도 까만 하늘 저 편으로 사라지면 우리는 ‘고향 생각이 난다’는 말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소소한 과거가 소란스러운 오늘을 살게 했다.


이럴 때 일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돼, 희망을 가져야 돼, 그런 자기 암시는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방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마음의 틈이,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그날을 주어진 대로 살았다. 먹고, 쓰고, 얘기하고, 자고….가끔은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살다보면 살아진다더니 매일 매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이 있다. 주어진 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삶이란 건, 그 뿐 아닐까.
어디에서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 같은 게 아닐까,
가끔 생각했다.



렇게 두 번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이 시기의 나는 한국에 사는 이들이 자주 부러웠다.(왜 우리는 늘 반대를 동경할까.) 독일보다는 상황이 나아보였고 방역수칙을 지키며 코로나 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엇비슷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 같아서. 적어도 외식이란 걸 하는 게 어딘가 싶어서. 한편으로는 ‘자국민’이라는 한국에 살았다면 별 대수롭지 않게 느꼈을 보호막, 그 심리적 안정감이 간절했던 것도 같다.


이런 내게 어떤 이는(그들의 선에서는 위로였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그래도 독일에 있잖아.’ ‘좋게 생각해.’ ‘이 또한 추억이 되겠지.’ 라는 위로인 듯 아닌 듯 뭔지 모를 말들을 곧잘 건넸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툭 던질 수 있는 성질의 문장이었다.


독일에 산다고 해서 코로나라는 전염병에서 비켜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내 불안감과 달리, 단순히 외국 생활을 동경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한 무턱 댄 환상. 아무리 다양한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지만, 이 시절만큼은 맹목적인 독일 사대주의가 코로나만큼 무서웠다. 어디에 살든 장점과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누군가에게 독일은 무조건 선진국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부류는 대게 친하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적당히 느슨한 관계의 사람들이었다. 상대의 입장에서 배려해보지 않은, 쉽게 소모되는 인스턴트 위로…. 가끔 그 얇은 인연의 끈들이 거슬렸다. 깔끄러웠다. 마치 떨어질락 말락 하는 셔츠 끝자락의 단추 같았달까. 완전히 끊어 내지도, 그렇다고 다시 꿰매기도 싫은 애매한 관계의 사람들.


분명 그 또한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이었겠지만,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추억이 될 거라니까, 한국보단 낫지, 마음의 변화를 강구하는 섣부른 훈수에 괜한 반발심이 일었다. ‘추억도 무슨 일이 있어야 만들지. 집에서 무슨 추억?!’ 반문 하고 싶을 만큼 그때의 나는 좀 삐뚤어져 있었다. 두려움에 무력감이 더해진 고독하기 짝이 없는 격리생활이었으니까. 오히려 ‘저도 막막해요,’ ‘우리 같이 힘내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건네는 사려깊은 마음, 조용한 공감과 말없는 끄덕임이 큰 위무가 되었다.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 이유는 지금의 내가 나약해서가 아닐까. 위로의 본질이 나약함이라면 그 나약함은 같은 나약함을 만날 때 일어설 힘을 얻는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독일 생활 4년 중 후반의 2년은 뚜렷다 할 기억이 없다. 락다운의 반복과 휴지 사재기로 인한 혼란, 마스크 혼선, 백신을 맞기 위한 발버둥, 무능한 독일 정부에 대한 불만, 매일 기록을 하다 지쳐 관둔 집밥 사진들, 그와 나눈 가벼운 농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있게 살아보려 했던 생의 의지…. 그런 것들이 남았다.


문득 쓰고 보니 이것도 기억의 편린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춘천 닭갈비’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침샘이 고이는 걸 보니 그들이 말한 대로 이 또한 추억이 됐다. 결국 값싼 위로라고 힐난했던 그 무성한 말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딘가에서 제 몫을 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세상에 싸구려 위로는 없다. 달랑달랑 매달린 단추들을 다시 꿰맨다. 그래 맞아. 맞는 말이야.(그렇지만 독일 사대주의는 뺐으면 해) 이 또한 추억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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