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민 Jul 03. 2023

작은 것들을 위한 시__3

기억에 관하여. 나에게 <이터널 선샤인>의 의미

왜 하필 이터널 선샤인?

프롤로그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이 그렇듯, 나는 예술에 있어 전하고픈 바를 대놓고 말로 표현하거나, 날 것으로 표면에 드러내는 것을 선호하진 않는다. 나의 글 역시, 그렇게 감각에 실려 은유적으로 넌지시 전달되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셰익스피어가 아니어서, 그런 글을 뚝딱 써낼 수 없었다. 반드시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특별한 글이라 더 힘들었다. 그래서 써놓고 보니 두서가 하나도 없는 중구난방인 글이다. 그러니 당신이 글을 끝까지 읽어낼 자신이 없다면, 꼭 여기서 멈추길 바란다. 말하지 않아도 멈추겠지만.


그림쟁이들은 그림자까지 그린다. 만약 당신이 읽기를 결심했다면, 이 글의 에필로그까지 차분하게 즐겨주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꼭! 사색할 수 있는 정적과 함께.


살바도어 달리 그림도 처음 봤을 땐 엉망이었다. <헤어질 결심>도 어쩌면 산에서 시작해 안개를 거쳐 냅다 바다에서 끝나버리는 이야기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을 곱씹을 때의 멋을 아는 사람은 알겠지. 터무니없어 보이는 나의 글도 그렇게 당신에게 닿길 바란다.




다들 가는 사막이라지만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듄>의 간지폭발 티모시 샬라메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어린 왕자의 지분이 크지.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유치뽕짝한 글귀에 난 늘 울컥한다. 겉으로 보기엔 황량 그 자체인 사막에 우물이 있다는 것. 보이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그 심안으로 바라볼 때에만 비로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 그건 고통인 동시에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지.


사막은 확실히 특별하다. 남들 다 가는 명관광지에서 호들갑 떠는 게 싫어서 꽤나 로컬한 곳들을 구석구석 다녔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내게 진정 새로운 세계라고 느껴지는 곳은 사하라가 단일했다.


그곳에서 느낀 작은 것들




모래와 하늘만이 이분법적으로 펼쳐진 적막한 광야를 거닐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그 누구의 생각도 시선도 아닌, 온전한 나 자신만으로 설명되어야 함을 피부로 체험하게 된다. 여기선 스스로가 아닌 그 어떤 것도 나를 증명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사막은,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따위의 질문들이 웃기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도대체 나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서 모래바람을 들이키게 되었나. 이 시간 이 장소에 나를 존재하게 한 수많은 기억들과 선택들을 되뇌었지. 동시에 내 머리를 비추는 태양을 바라보다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했다. 영감은 늘 그렇게 불쑥 찾아온다.


과거. 기억. 이터널 선샤인


남는 건 사진이란 말이 있지. 그런데 어쩌면 진짜 남기고 싶은 건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그 자체도 예술적이며 의미 있다. 하지만, 사실 그 시각적 자극 끝에 진정 우리가 닿고픈 본질은, 그 당시의 모든 것에 대한 ‘기억’ 일 테다.


사진이 아니더라도 어떤 기억들은 특정한 향이나 멜로디, 또는 단어와 같이 오감을 동원해 나를 찾아와 향수의 굴레에 빠지게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모든 감각 기관에 닿아있는, 이 ‘기억’이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기억을 ‘정신 기능’이라고 하기엔, 아무런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나를 찾아오는 모먼트들이 설명되지 않으니까.


상상을 해보자. 만약 당신이 어린아이에게 '기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는 참으로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기억은 절대적이지 않고 가변적이기 때문이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만 봐도 알 수 있다. 분명 동일 사건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했는데 세 점의 그림은 명도부터 질감, 심지어 구도까지 그 디테일이 너무나 다르다.


동일 사건에 대한 기억은 이토록 달라지는데


그렇다면 기억을 뇌 속에 남아있는 주관적인 서사라고 해야 할까? 아니 이미지일까, 어쩌면 향기일까.


이 기억이라는 모호함의 응집체를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설명해야 하는 곤경에 처한다면, 나라면 먼저 조용히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틀어 줄 것 같다.


어떠한 관념을 설명하기 힘들다면 그 관념이 부재한 상황을 상상해 보면 된다. 특정한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을 통해 원관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거지. <이터널 선샤인>이 정확히 그렇다. 기억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해 기억을 없애버리는 내러티브를 택한다.


그들에게 사라진 모든 것들


헤어진 후 서로의 기억을 지우기 원하는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릿)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이 영화가 '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기억'의 본질을 살며시 들추어 볼 수 있다. 내면 깊숙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은 그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단일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클레멘타인을 지운다는 것은 그녀와 함께 맞추었던 퍼즐을, 같이 들었던 음악들을, 흘렸던 눈물들을. 나아가 그녀에게 털어놓았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추억들 모두 송두리째 뽑아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의 기억들에서 클레멘타인만을 쏙 빼내려 하자 현재의 삶은 왜곡되고 뒤틀린다. 그 무너지고 깨어짐의 과정은 비현실적인 화면 편집으로 극대화되어 드러난다. 이처럼 물리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마법같이 모든 게 얽히고설킨 채로 현재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인 것이다.


그러다 <어린 왕자>의 짧은 여우 이야기야말로 기억의 본질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을 먹지 않는 여우에게, 밀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찮은 장소였다. 하지만 어린 왕자와의 만남 이후, 여우에게 밀밭은 하나의 의미가 된다. 밀밭의 색깔은 어린 왕자의 머리색과 같은 금빛이었으니까. 어린 왕자는 금세 떠난다. 하지만 여우에겐 금빛 밀밭이 남았지. 그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그렇게 여우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소리마저 사랑하게 된다.


여우가 밀밭을 사랑하게 만든 것. 그것이 바로 기억이다.


뇌의 의식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피부와 마음 깊은 곳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

밀밭에 스치는 바람 소리만으로 떠오르듯,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내면엔 분명 존재하는 그것.

기억은 그렇게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는, 내게 잔존하는 것들의 부재인 것이다.


마침내 나는 기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결론지은 뒤에야, 과거에서 넘어와 현재를 생각했다.


현재. 선택(엇갈림). 받아들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과거다. 그리고 인간은 오늘을, 현재를 살아내야 하는 존재다. 각자의 삶은 그 현실에서 하는 선택의 연속성으로 정의된다.


선택은 다른 말로 엇갈림이다. 프랑스에 오기를 선택하는 것은 새로운 환경과의 조우임과 동시에,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남겨두고 떠남을, 그 엇갈림을 의미한다.


내가 하는 선택들은 내 뜻대로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엇갈림을 역설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에게 조용히 완전히 영원히 사라지는 데에 실패한 것도 같은 맥락 아니던가? 삶에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그 의도대로 술술 풀리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무엇보다, 때론 옳다고 생각했던 선택이 너무나 잘못된 것이어서 비극적 결말이 찾아오기도 하지. 그래서 가끔 선택은, 원했던 결말과의 엇갈림을 의미한다.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그 비극적 엇갈림은 어느새 기억이 돼버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또 다른 선택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넌 무슨 글자를 새겼니?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따위의 부질없는 말장난을 하려고 이 기나긴 몽상을 하진 않았다.


대신 받아들임을 생각했다.


받아들임은 얼마나 숭고한가. 인간은 때때로 자기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는 의지만 갖고 이룰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걸 이젠 알지. 내 숱한 선택의 결과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때마다 닥쳐오는 좌절감을 어쩔 것인가. 어쩌면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꼿꼿한 받아들임이다.


나는 그걸 제대로 해오지 못했던 것 같다.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간절함과 후회와 현실 사이의 배회는 스스로를 깊숙이 갉아먹었다.


하지만 마침내 받아들이기를 알아가고 있다.



(잠언 16장 / 개역개정)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저 성경 말씀. 그리고 진수가 큰 도움을 줬다. 내가 가족처럼 아끼는 그 애는 나와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 늘 내게 영감을 준다. 성숙하지 않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성숙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말은 안 했지만 너무 고마웠다.


사실 꽤나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었다. 처음엔 현명한 선택을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건 결과론이지 않은가? 선택이 현명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결과에 좌우한다. 그것을 알 수 없는 이 시점에서 무의미하게 백번 저울질하는 것보단, 한 번 더 기도 하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어떤 선택이건, 이끄심을 믿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너그러움을 갖기로 했다.


어설프게 뛸 바에 멋지게 걷자는 여유로운 마인드.. 아무리 삽질은 해도 내가 진 적은 없다고. 단단한 내력이 있다면 늘 그래왔듯이 해낼 것이라고 되뇌었다.


그렇게 난 사막의 몽상 끝에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을 내딛을 결심을 했다.





에필로그. 나에게 이터널 선샤인의 의미


이제 알아 나의 할 일이 무엇인지.

다행히도 나는 1년 전에 비해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글로만 끄적이는 사람은 이제 아니지. 행동으로 논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마음이 껍데기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한 말을 지키려고 늘 애썼다.


기억의 연속인 삶을 살아가다 보면, <아이와 나의 바다> 가사처럼,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일들이 있다.  과거는 과거에 묻어두고 오늘을 살자고 결심해도, 그 선택이 늘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때때로 그 모먼트들이 스스로를 숱하게 갉아먹곤 했지. 하지만 이젠 되고 싶은 어른에 다가가기 위해, 진정한 받아들임을 알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 어둠이 잠식할 때면, 난 늘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한다.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모든 것이 저물고 초라한 추억만이 남더라도, 그때의 티 없었던 마음은 영원한 햇살이 되어, 마음 한편을 오래오래 비춰주고 있음을.


그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삶의 기억은 삶의 동력이 됨을 믿는다.



미아와 세바스티안


생일 같은 오늘의 찬란한 행복이 매일 찾아오지는 않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기억의 본질처럼, 다 잊은 듯 감춰진 그 안엔 여전히 모든 것이 담겨 있음을 잊지 않기를.

때때로 어둠이 찾아올 때면 오렌지 태양 아래 물든 하늘을 바라보기를,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을 가끔 느끼기를.


그것이 툭툭 당신을 미소 짓게 하고, 그렇게 편안함에 이르기를.




시편 121편은 내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선물’이다.

Un Monde Qui S'Illumine!


Adieu.

작가의 이전글 작은 것들을 위한 시__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