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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Nov 16. 2020

승진, 고과, 그 처절함에 대하여

몇 년 전이었을까. 대리 승진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1차 평가자였던 파트장은 내게 말했다. 

"너 대리 승진 앞두고 이런 식으로 회사 생활하면 안 돼. 회식 때도 술 취했다면서 일찍 가고 말이야. 주말에 옆 팀 선배 집들이는 왜 안 갔냐"

그땐 20대였고, 팀의 막내였고, 또 그에 맞게 한없이 어리숙할 때여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애꿎은 키보드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너, 대리라고 해서 다 승진시켜주는 거 아니다. 지켜볼 거야"


늦가을, 초겨울 즈음이 되면 상사들은 이렇게 고과 갑질을 시작하곤 한다. 사실 나는 좋은 고과, 승진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었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과나 승진이 목표가 되는 회사 생활이 싫었다. '일 잘하고, 사고 안치면서 회사 생활하다 보면 고과나 승진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겠지' 아마도 내 생각은 이랬던 것 같다. 회사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내가 겪었던 회사 생활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 파트장은 내게 승진이나 고과 욕심이 없냐고 수 차례 물었고 그때마다 "잘 받아야죠"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그게 내 진심이 아니었음을 진작에 알아챘는지 그는 회식 중에도 끝까지 캐물었다. 나중엔 내가 너무 지쳤는지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욕심보다도, 제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자연스럽게 고과도 잘 받고 승진도 되겠죠" 그러자 그는 호되게 소리쳤다. "그따위 생각을 할 거라면 회사를 왜 다니는 거냐. 회사를 다니려면 고과, 승진 욕심이 기본적으로 있어야만 일에 책임감도 갖고 결국 성과가 나오게 되어있는 거다"라고. 


아마 나는 그 시점부터 더더욱 승진과 고과에 대해 부정적으로 변해왔던 것 같다. 사회생활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나의 고집스러운 신념, 아니 신념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마음가짐으로 인해 연말, 연초가 되면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 늘 발생했다. 


#고과 갑질을 좋아하지만 부정에는 눈감고 체면을 지키지 못하는 자

앞서 얘기했던 파트장은 지금까지 내가 본 상사들 중 고과 갑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이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과 행동은 물론, 본인의 아랫사람을 곤경에 빠뜨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사람이었다. 강직함을 넘어 뿌리가 너무나 단단하여 강자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소신을 밝히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 정도로 그를 싫어하진 않았을 것 같다. 예를 들면 본인의 상사가 워크숍 중 음주운전을 하거나 다른 후배 직원들에게 음주운전을 강요할 때에도 그는 웃으며 동조했다. (그 이후로 나는 해당 워크숍은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 파트 회식 중 3차로 찾아갔던 회사 근처 지하의 어느 바(Bar)에서 일하는 여자 직원에게 그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어루만지고 보고 싶었다며 술주정을 부린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어젯밤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우리에게 인신공격이 쏟아진다. 고과 갑질은 상사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잘난 척 혹은 자존심이라 생각해 넘어가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온갖 추잡한 매너와 인성이 드러나면 나는 곧바로 상대방을 무시하곤 한다. 선배로서 배울 것도 없고, 그 갑질을 당해줄 만큼 가치 있는 을의 시간을 만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내 새끼'에 집착하는 자

과장 진급을 앞두고는 마음이 좀 복잡했다. 내가 속해있던 A팀은 팀장의 갑작스러운 해외 법인 발령으로 인해 B팀 소속으로 편입됐다. 그 B팀엔 회사 내에서 꽤 유명했던 팀장이 있었는데, 임원진과 친분도 있었고 회사 안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슈를 만들어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합류하게 된 나를 포함한 A팀 팀원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B팀장의 입장에서는 기존에 해보지 않았던 업무를 맡은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그는 그 스트레스를 곧장 우리에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임원 보고 자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올려 오타 또는 잘못된 엑셀 수식을 발견하면 보고 후 주변 팀장들에게 그 실수를 했던 팀원을 멍청하다고 돌려 까기 바빴다. 

그리고 B팀에는 대표이사 또는 임원들과의 인맥으로 들어온 팀원이 일부 있었는데, 그들은 하루 4~5번 정도 밖에서 커피를 마시고 들어오거나, 친한 사람들과 회의실에 몰래 들어가 본인들의 자리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것 같은 선후배를 돌려 까기 바빴다. 이런 팀원들은 B팀장의 이른바 '내 새끼'였기 때문에 하루 종일 어디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팀장이 알 수 없어도 괜찮았다. 나와 내 옆의 기존 A팀 인원들은 처리할 일이 많아 업무 시간 중간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수준이었는데, 그때마다 빈자리가 비교될까 봐 불안했는지 B팀장은 "저렇게 맨날 자리에만 앉아서 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냐. 정말 답답하다"며 또 우리를 돌려 까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과장 진급 대상자였는데, 도저히 진급을 할 수가 없는 고과를 받아야만 했다. 고과 상담 때 팀장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내가 1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승진에 누락됐고, 좋은 고과는 B팀장의 '내 새끼'들에게 모두 돌아갔다. 이 상황은 그다음 해에도 똑같이 발생했고, 그때에도 내가 왜 이 고과를 받아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며 내 성과를 나열하자 "더 좋은 고과를 받고 싶으면 네가 직접 2차 평가자에게 어필을 해봐라"라고 대답했다. 그의 '내 새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고과 갑질은 2년 동안 지속됐다. (그리고 그다음 해, B팀장은 친한 임원들과 함께 회사를 나가게 됐다.)


#좋은 스펙에 집착하는 자

옆 팀의 C팀장은 고과 철마다 승진자를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좋은 고과를 받아야 하는 대상자 중 '고정 값'이 존재하는 게 문제였다. 

누가 봐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각종 자료를 만들어댔던 차장급 팀원에게는 늘 A고과가 주어졌는데 이유는 그가 본인이 다녔던 S사를 함께 다녔기 때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S사 출신인 이 친구는 C팀장에겐 '상수'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C팀장은 다른 팀원에게 C고과를 어쩔 수 없이 주게 되어 미안하다며 상담을 하던 중에 그 팀원이 본인의 성과를 어필하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너보다 니 옆자리에 있는 애가 훨씬 더 좋은 학교 다닌 거 알지? 너보다 나이도 어린데 더 똑똑해. 그러니 걔한테 많이 보고 배워"

회사를 다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좋은 스펙을 가지고 정말 스마트하게 일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물론 존재한다. 연말 고과는 기본적으로 업무에서 1년 간 우수한 성과를 보여준 사람에게 좋은 고과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1년간의 성과는 접어두고 중요하지 않은 과거 스펙이나 경력을 내세워 상대 우위를 설명하는 옆 팀장 얘기를 우연히 들었을 땐 정말 숨이 막혔다. (나중에 알았지만, C팀장도 뭐 그렇게까지 좋은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회사 안에서 각자 맡은 업무의 책임감을 높이고 좀 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한 동기부여를 위해 서로 경쟁 아닌 경쟁을 하고 그로 인해 고과로 서열을 매기고 또 승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승진에서 누락되면 '내가 올해 퍼포먼스가 부족했지'라고 느끼면 되고 다음번에 주어지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겪어왔던 회사 내에서의 고과와 승진에 대한 과정은 그다지 합리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회사와 구성원들이 잘하고 있는데 유독 내가 비합리적인 경우를 많이 당하거나 주변에서 목격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런 경험을 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접하게 되고, 남 일 같지 않아 나는 여전히 안타까울 뿐이고, 내가 별 힘도 없고 빽도 없는 어정쩡한 사람이라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 갑갑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넌 아직도 사회생활을 잘 모르고, 네가 부족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다'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팔이 안으로 굽을 수도 있고, 남들보다 조금 더 도와주고 싶은 대상이 있을 수도 있는 게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도 잘 알지만, 200% 성과를 내고도 아무 말하지 못하고 연말을 허무하게 보내야 하는 누군가가 아직도 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본다. 


(연말에 고과 주실 땐, 네가 왜 이 고과를 받아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냉철하게 알려주세요. 그럼 꼬일 대로 꼬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다 받아들일 겁니다. 제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거나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것 같은 이유로 설득시키려 하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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