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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없는 항해, 우리는 베스트프랜드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있다.

by 이음

“죄송하지만, 다른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

“지금 아이가 호흡이 힘든 상황인데, 이대로 어떻게 가라는 말입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럴 시간에 빨리 다른 병원을 알아보세요.”

“아이 열이 41도잖아요. 밖에서라도 좋으니까 해열 주사라도 맞고 갈 수 있게 해주세요.”


딸아이의 코로나19 확진 1일 차, 병실이 없어 고열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해열제로 버텨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딸아이의 호흡이 가빠졌다. 처음 겪는 다급한 상황에 119를 불러 응급실로 향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지역의 대표 병원은 병상이 없다며 딸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무책임한 의사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의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고통 앞에 부모의 자존심 따위는 없다.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인내의 대가로 그나마 병원 밖에서라도 딸아이에게 겨우 해열 주사를 맞힐 수 있었다.


다시 구급차를 타고 두 번째로 큰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가장 가까운 지역의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것이다. 응급으로 연결해주겠다는 친절을 위장한 책임 회피였다. 대학병원까지 빨라도 한 시간 반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어쩜 이리도 가혹할까. 나에게는 전부인 딸아이였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책임지고 싶지 않은 환자일 뿐이었다. 악을 쓰며 울고 싶었지만, 숨 가쁘게 싸우고 있는 딸아이 앞에서 그럴 여유도 없었다.


더 이상 냉담한 의사들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 모든 힘을 쏟아 흐트러진 정신을 부여잡으며, 심근염 검사가 가능한 인근의 어린이 병원을 찾았고, 주저 없이 이동했다. 딸아이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심근염 수치가 높다며 급히 치료를 시작했고, 차도를 보면서 대학병원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병실 자리가 없어 검사실에서 주사를 맞히고, 병원 로비에서 딸아이를 안고 밤을 지새웠지만 감사했다. 딸아이의 호흡이 조금씩 돌아왔기 때문이다. 다음날 축늘어진 딸아이를 다인실 침대에 처음으로 눕히면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과 서러움, 미안함과 외로움, 울분과 안도의 눈물이 흘렀다.

“엄마, 울지마. 나 이제 괜찮아.”

딸아이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나를 안고 토닥였다.


딸아이를 재우고, 남편에게 연락했다. 남편은 위급한 상황에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울먹였다.

“사랑이의 생명이 걸려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는, 자기가 옆에 있다고 한들 나에게는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을 거야.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무게였어.”

나는 담담히 말했다. 진심이었고, 짧은 시간 동안 깨달은 삶의 진리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리 존재의 깊숙한 곳에 홀로 존재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앞에, 누구도 진정으로 나의 슬픔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깊은 이해는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있고, 그것을 극복할 힘도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밤을 보내 본 사람이 아침이 온다는 것을 알고, 겨울을 겪어 본 사람이 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은 후, 딸아이와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지고 유연해졌다. 함께 할 수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자, 삶의 작은 불편함에는 금방 적응하고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 화재경보기의 고장으로 새벽 3시에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왔지만, 깔깔거리며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즐길 수 있는 익살스러움이 생겼다. 자동차 엔진오일 누수로 연기를 내뿜는 자동차에서 허둥지둥 탈출하면서도, 계획에 없던 1박2일 즉흥 여행을 떠나는 여유가 생겼다. 딸아이가 입원할 때면 일과의 부담을 떨쳐낸 호캉스를 즐긴다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젖은 수건으로 열이 나는 내 이마를 식혀주다 베개를 적실 때도, 낄낄거리며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남편에게 보낸다.



어쩌면 적당한 불편함과 예기치 못한 사소한 불행은, 우리가 너무 앞서 달리려고 할 때 우리를 통제하기도 하고, 우리 삶을 더 유쾌하게 만드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물을 마시다가 예기치 못한 딸꾹질을 할 때, 조금은 불편하지만 웃음이 터지고, 덕분에 숨을 고르게 되는 멈춤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비록 그 순간에는 불편하지만, 우리 삶의 이야기꾼 역할을 한다.


내게 의지하던 딸아이는 내 친구이자 내게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불확실한 삶의 바다를 함께 항해하는 동료가 되었다. 노련하지는 않지만, 딸과 함께 예상치 못한 파도들을 극복해가는 여정에서 우리의 우정은 더 깊어질 것이다. 그녀와의 시간을 기대한다. 함께 수평선 너머의 섬들과 우리 배를 호위하는 장난스러운 돌고래 떼를 볼 것이다. 숨 막히는 석양을 배경으로 소박한 식사를 즐기기도 하고,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에서 기억에 남을 감사를 표하며 항해할 것이다.


다가오는 금요일 밤, 딸아이와 늦은 시간까지 수다 떨다 잠드는 시간을 기다린다.




< 사진출처 :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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