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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y 05. 2024

공감, 다른 세계의 문을 여는 힘

다름이 연결되는 시작

“선생님, 여성 중심주의적인 페미니즘 책은 성 평등을 왜곡하는 거 아닌가요?”

학교 도서관에서 K와 처음 만난 날, 첫 대화였다.

“그런 생각을 해 본다는 건 너무 좋은 태도야. 그런데 그 책은 여성 인권과 평등에 대한 책이야. 네가 한번 읽어보면 좋겠는데?”

질문과 트집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격이었지만, 어쨌든 나름 멋지게 수비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K는 계속해서 내게 비슷한 잽을 날렸다.

“선생님, 중학교 도서실에 그림책이 왜 이렇게 많아요?”

“세월호 관련 도서 전시는 너무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거 아닌가요?”

“똑같은 글을 쓰게 하는 논술 대비 도서는 없으면 좋겠어요.” 

‘같은 말이라도 저렇게밖에 못할까, 저러니 친구가 없지, 뭐가 그렇게 늘 불만일까?’ 싶다가도, 이상하게도 K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커져 갔다. 


친구와의 교제가 중요할 시기에, K에게 친구가 없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는 혼자 있는 게 좋다고 했지만, 도서실 서가를 옮겨 다닐 때마다 그림자처럼 내 주위를 서성거리는 소년이 고독을 즐길 확률은 적다. 쉬는 시간에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늘 목구멍에서 찰랑거렸다. 하지만 그가 겨우 딛고 서 있는 손바닥만 한 자리마저 빼앗는 것 같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발뒤꿈치를 들고 학교 복도를 다니고 있다. 도서실 안은 공기의 흐름마저 들릴 정도다. 적막을 깨고 누군가가 도서실 문을 다급하게 열었다.

“선생님, 저 어떻게 해요! 국어 시험 종료 전에, 저도 모르게 읽던 책을 꺼내서 펼쳐버렸어요. 0점 처리되면 어떻게 하죠?”

K다. 평소 냉소적인 표정은 간데없고, 목에서부터 이마까지 온통 검붉은색이다.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차서 곧 넘칠 지경이다. 입술이 가장자리를 따라 파르르 떨린다. 수업 시간에 몰래 책 읽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결국 사달이 났다. 

“괜찮아. 감독 선생님도 실수였다는 걸 아실 거야. 아직 0점 처리된 건 아니니까, 일단 남은 시험에 집중해 보자.” 

두려움에 떨며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고 녀석 참,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네...’ 그러고보니 K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1년 하고도 2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까마귀 소년』이라는 그림책이 있다. K와 닮은 소년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소년을 따돌리고, 선생님들은 그에게 무관심하다. 그는 이름 대신 '땅꼬마'라고 불렸다. 소년은 사팔뜨기를 흉내 내기도 하고, 몇 시간을 천장만 응시하기도 하고, 책상의 나뭇결을 세거나 바닥의 벌레들을 관찰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은 그의 행동을 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학년이 되었고, 소년은 이소베 선생님을 만난다. 이소베 선생님은 그의 특별함을 알아차리고, 학교의 학예 무대에 그를 올린다. 소년은 무대에서 알에서 태어난 까마귀의 울음소리부터, 마을에 나쁜 소식이 있을 때 우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까지, 다양한 까마귀들의 소리를 선보인다. 소년의 까마귀 소리를 들은 친구들은 그동안 소년이 외로이 생활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날 이후 소년은 땅꼬마가 아닌, ‘까마귀 소년’으로 불린다. 졸업식에서 개근상을 받은 학생은 까마귀 소년밖에 없다. 


소년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이유는, 그가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축구공을 쫓으며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소년은 나뭇결의 패턴과 벌레들의 움직임과 까마귀 소리에 관심을 가진다. 소년에게 세상은 한 폭의 그림이기도 했고,  교향곡이기도 했다. 소년은 자연을 감상하는 것에 좋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같이 놀자고 말이라도 해보지.”

유난히 친구를 좋아하는 딸아이는 순식간에 소년의 감정에 이입된 것 같았다. 소년이라고 왜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던 때가 없었겠는가.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의 자신의 처지를 소년이 모를 리 없다. 시선, 속삭임, 무언의 표정과 행동들이 소년의 주변에 늘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그 무게를 이기고 소년 혼자 힘으로 친구들의 세계에 먼저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 친구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함이 소년의 발목을 꽉 붙잡고 있었을 것이다. 


친구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소년은 사팔뜨기 흉내를 내기도 한다.

“이 오빠 엄청 웃기네. 오빠가 우리 반이었다면 인기 짱이었을 것 같아.”

딸아이 말처럼 소년은 친구들이 재미있어하는 행동을 통해서 친구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친구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소년의 노력에 마음이 쓰렸다.      


그런데 작가는 왜 하필 사팔뜨기를 소재로 했을까? 단순한 궁금증은 사팔뜨기와 소년의 공통점으로 이어졌다. 둘 다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사팔뜨기 흉내를 내는 소년을 통해, 소년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친구들과, 조금은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소년을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이소베 선생님은 달랐다. 이소베 선생님은 소년의 특별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선생님의 격려로 소년은 자신의 ‘다름’을 빛낼 수 있는 무대에 오르게 되고, 친구들은 소년을 이해하게 된다. 단 한 사람의 믿음과 격력만으로도 삶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물론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딸아이의 개성보다는 사회적 적합성만을 중요시했던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소베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우리 반에 태민이가 꼭 이 오빠 같아.”

“태민이가 된 것처럼 상상하고, 태민이 마음을 한 번 느껴보면 되지 않을까?”

친구의 외로움을 외면하지 않는 딸아이의 따뜻함이 대견했지만, 속마음은 숨긴 채, 뻔하고 진부한 답을 했다. 어쩌면 이소베 선생님도 소년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기에,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공감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역경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누구나 소년과 같은 처지에 놓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서로의 단절을 메우고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공감에서 시작된다.      

소년의 까마귀 소리에 사람들은 그동안의 소년의 감정을 느끼고 미안해한다. 

“엄마, 들어봐. 까~악~! 까~악~! 이 소리가 슬퍼?”

소년의 까마귀 소리 흉내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딸아이가 말했다. 까마귀 울음소리에는 뭔가 원초적인 힘이 있는 것 같다. 소년이 무대에 올라 까마귀 울음소리를 표현할 때, 그는 단순히 까마귀 소리를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이해받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을 전달했을 것이다. 까마귀의 새끼가 태어날 때, 마을에 나쁜 소식이 있을 때의 까마귀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항상 마을의 기쁨과 슬픔에 함께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년의 까마귀 소리는 마을 사람들의 잊혀 있던 공감을 다시 일으켰다.


만약 소년이 주위 사람들에게 끝까지 인정받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없이 성장할 수 있을까? 소년이 계속해서 단절된 생활을 했다면, 감정적으로도 고립되고 이는 자신의 존재적 의문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도 힘들다. 옥수수는 한 그루만 자라면 작고 약하지만 여러 그루가 함께 심어질 때에는 더 높이 자라고 알도 풍성해진다고 한다. 감자도 서로를 지탱해 주는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함께 있을 때 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더 많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없이 성장할 수는 있지만, 함께 소통할 때 훨씬 더 건강하게 성장한다. 


소년은 외면받으면서도 매일 학교에 간다. 어떤 힘이었을까? 어쩌면 오늘은 자신의 다름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누군가가 그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친구들과 소통하고 싶었지만, 서로 다름의 차이를 어떻게 메울지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다름’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언젠가는 누군가가 자신의 ‘특별함’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와 결단을 품고 소년은 매일 아침 학교로 향했다. 




라틴어에서 ‘교육(educ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끄집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 즉, 교육은 단순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정보를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꺼내는 것이다. 


“K야, 너 풀었던 거 다 맞으면 몇 점이야?”

“그래도 40점은 되겠죠.”

K가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면 좋겠다. 아직도 나는 쏟아붓는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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