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May 31. 2024

한 개의 노, 주체적 삶의 시작.

드레스를 벗지 않고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이음아,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 좋아하지 않았어? 이번에 뮤지컬 하길래 보고 왔어. 가까이 살면 너랑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가 반가웠다. 여전히 명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반갑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뮤지컬을 감상하면서 나를 떠올린 마음이 고마웠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다. 울프는 특히 여성의 삶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자유로운 여성성과 성 평등을 주제로 많은 글을 썼다. 그녀의 작품은 사회적 관습과 편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여성의 자아와 정체성을 탐구한다. 친구의 전화를 계기로, 울프가 1929년에 출간한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100년 전에 여성 문학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그녀의 혁신성과 비범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닮은 그림책 주인공이 있다.      




『노를 든 신부』는 외딴섬에서 살고 있는 소녀의 용감한 모험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소녀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섬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도 신랑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부모님이 준비해 주신 드레스와 함께 노 한 개를 가지고 바닷가로 향한다. 그러나 바닷가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짝을 이루어 섬을 떠나고 있었고, 소녀를 받아들이는 배는 없었다. 모두가 소녀가 가진 노 한 개로는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녀는 산으로 향했지만, 거기서도 원하는 신랑을 찾지 못한다. 그녀는 우연히 늪에 빠진 사냥꾼을 발견하고, 자신의 노를 이용하여 그를 구해주었다. 이를 통해 소녀는 자신이 가진 노의 가치를 깨달았고, 다양한 기술들을 익히며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마을로 내려가 야구를 하며 새로운 재능을 발휘했고, 유명 야구 감독들의 주목을 받았다. 소녀는 결국 추운 지역의 야구팀과 계약을 체결하고, 마침내 비행기를 타고 섬을 떠났다. 처음에는 다른 이들처럼 결혼을 통해 섬을 떠나려고 했지만, 자신만의 모험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섰다.      




『노를 든 신부』에서 소녀에게 준비된 드레스와 노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 여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드레스는 결혼식과 신부를 상징하는데, 그림책에서는 부모님이 딸에게 전하는 전통적인 기대이자, 소녀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부모님은 딸이 사회적 관습을 따르기를 바라며, 그녀가 그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레스를 준비해 준 것이다. 반면, 노는 소녀의 자아와 능력,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상징한다. 노를 젓는 행위는 그녀가 자신의 힘과 용기를 발휘하여 인생의 항로를 개척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소녀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사용하여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부모님이 노를 준비해 준 것은 소녀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녀는 자아와 사회적 기대를 동시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엄마, 드레스 입고 여기저기 다니는 거 너무 불편할 것 같아.”

그림책의 마지막까지 소녀는 드레스를 벗지 않는다. 작가는 우리가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의 규범과 기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소녀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모험을 하고, 자신을 개발하며 성장한다. 소녀도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는 우리가 때로는 사회의 기대에 따르려는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엄마, 결혼 안 해도 드레스 입으면 신부가 되는 거야?”

작가는 소녀가 부모님으로부터 드레스와 노를 받자마자, 소녀를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신부'로 표현한다. 이는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내면에서 새로운 변화와 성장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결혼식의 신부처럼 소녀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부모님으로부터 온전히 독립하고,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맡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작가는 더 이상 그녀를 어린 소녀로 묘사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인식하고 받아들인 성숙한 여성인 '신부'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소녀처럼 '신부'가 된다. 누구에게나 독립하고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대학 입학, 첫 직장, 결혼, 출산 등 각각의 순간마다 우리는 새로운 역할과 책임을 안게 된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헤어져 혼자 살아가야 했던 대학 입학 때, 새로운 환경에서의 도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첫 직장에 입사하고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결혼 후, 가정을 꾸리고 이끌어가는 과정에서는 사랑과 책임감이 교차했다. 딸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부모로서의 큰 기쁨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부’가 되는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존재와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신부가 바다로 결혼할 짝을 찾으러 가자, 남자들은 배를 준비하고 여자들은 노를 갖고 있었다. 이는 사회적 관습과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드러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결혼할 때 남자는 집을, 여자는 혼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신부는 노가 하나뿐이라며 거절당한다. 이는 그녀의 재능이나 능력이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고정된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종종 개인의 고유한 재능과 능력을 인정하기보다는, 정해진 틀과 기대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넘어, 개인의 고유한 재능과 능력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한다.


노 한 개는 신부의 현재 상황과 자아를 나타낸다. 그녀가 삶의 여정을 시작할 때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우리도 종종 신부와 비슷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노 한 개도 우리의 고유한 능력이다. 이것이 사회적 기준에 못 미친다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신부처럼,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장점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자신 있게 펼침으로써 성장과 발전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신부는 바다에서는 자신의 기대와 바라는 대상을 찾지 못했고, 이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다른 길을 찾기 위해 산으로 향했다. 신부가 산으로 향하는 것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내면의 여정의 전환을 나타낸다. 바다는 자유와 모험을 상징하는 반면, 숲은 종종 내면의 여정과 탐색을 상징한다. 소녀가 바다에서 결혼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실망한 후에 산으로 향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고 성장하기 위한 내면의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숲에서의 경험을 통해 소녀는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발견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숲은 소녀의 내면 성장과 변화를 촉진하는 공간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산에는 주인공처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자아를 발견하려는 비슷한 여정을 거친 신부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산에서도 배를 찾고 있다. 이는 그들이 내면의 여정을 거치더라도 여전히 외부적인 것에 의존하거나 외부에서의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 산꼭대기에 엄청 큰 배가 있어. 산에 왜 배가 있어?”

산꼭대기에 배가 있는 것은 사실상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이는 자아의 발견과 성장이 내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산에서도 짝을 찾지 못한 신부는 우연히 늪에 빠진 사냥꾼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그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자신의 능력과 용기를 일깨워준다. 신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데, 이는 그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힘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다. 신부는 그 과정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성장한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사냥꾼처럼 영감과 도전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거나, 책 속의 영감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내 안의 갈망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고, 우리 안의 능력과 가치를 찾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우리의 내면 여행을 이끌어주는 안내자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삶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소녀는 노를 이용해 자신의 능력을 키워갔고, 동시에 자신의 재능도 발견했다. 많은 야구 감독들의 제안 속에서, 신부는 단순히 팀의 성적이나 연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얀 눈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추운 지역의 야구팀과 계약한다. 그녀는 사회적 기대나 편견을 뛰어넘어 자신의 내적 욕망과 꿈을 추구하는 것을 선택했다. 때로는 사회적인 규범과 관습을 뒤로하고, 내면의 소망과 열망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자신의 소망과 욕망을 존중하고 실현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신부는 배가 아니라, 비행기를 통해 섬을 떠나게 되었다. 작가는 전통과 안정성을 상징하는 배와, 자유와 모험을 의미하는 비행기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배를 통해 떠날 계획이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성장하고 발전한 결과, 신랑의 도움 없이 비행기를 타고 섬을 떠나게 된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고 성장하기 위해 모험을 했기 때문이다. 




“엄마, 이 언니, 나중에 결혼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 언니는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행복할 것 같아.”

결혼 여부가 아니라, 여전히 그녀가 자신의 꿈과 열망을 따라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현재 내가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궁금함이다. 나는 노가 하나뿐이라는 핑계로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안의 목소리를 따라 나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책이 여는 독서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