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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나와 가까워지는 기분

by 이음

“토끼 굴이다! 이제 집에 다 왔네!”

거제로 가는 길, 그곳에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있다. 딸아이는 이 통로를 ‘토끼 굴’이라고 부른다. 3.7km에 이르는 해저 터널 구간.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토끼 굴이란 그녀의 표현이 찰떡이다. 빽빽한 빌딩 숲을 뒤로하고 터널에 들어서면, 짙은 어둠이 감싼다. 어둠이 깊어 질수록 설렘은 달빛처럼 번져간다. 터널 끝에 다다르면,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위로, 작은 섬들이 조약돌처럼 흩어져 떠 있고, 바다는 고요히 그들을 어루만진다. 3분 만에 열린 다른 세상. 자연의 선명한 색채가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맞는다. 마치 이제 막 태어나 처음으로 빛을 본 듯. 몸에 남아 있던 피로와 긴장이 녹아내리고, 숨은 가벼워진다.

토끼 굴을 지나 도착한 이곳에서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거센 물살에 휩쓸려 바쁘게 살던 삶에서 벗어난 느낌. 도시에선 빠르게 흘러가는 물살에 떠밀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달렸다. 1등은 꿈도 안 꿨지만, 대단한 재주가 없는 나로선, 뒤처지지 않으려, 목구멍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야 했다. 끝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 당연히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생각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빠르게 흐르는 물살에선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듯,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하는 질문을 뒤로한 채, 그저 바삐 떠내려갔다.


폭포수를 지나 잔잔한 강을 만나니 마침내 내가 보였다. 숨 가쁜 속도에 휩쓸리지 않는 삶. 오래도록 참아온 숨을 내쉬며,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분이다. 더 이상 숨을 참을 필요도, 앞만 보고 달려야 할 이유도 없다.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위를 향해 고개를 들 수 있는 삶. 일상의 소음이 멀어진 곳을 걸으며,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았으니, 특별한 기술도 장비도 필요 없는 걷기가 제격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섬 & 섬길’과 ‘남파랑길’을 걸었다. 섬 & 섬 길은 섬과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14개의 코스다. 초보자도, 숙련된 트레커도 각자의 속도로 걸을 수 있다. 나는 속도를 내지 않았다. 그저 한 발, 한 발 내디딜 뿐. 남파랑길은 부산에서 해남까지 이어지는 코스의 일부로, 거제에는 13개의 구간이 있다. 그 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끝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발걸음이 닿을 수 있을 만큼만,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바람을 친구삼아 걷다 보면, 주변이 하나둘씩 맑게 떠오른다. 돌 하나, 꽃 한 송이도 같은 게 없고, 바위틈에 자란 이끼조차 매번 다른 얼굴이다. 땅을 움켜잡은 커다란 나무뿐 아니라, 겨우 뿌리를 내린 작은 풀 한 포기에도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다. 숨은 차오르지만, 심박수는 내려간다.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어느새 빵빵해진다.


가장 좋아하는 둘레길은 우제봉 둘레길이다. ‘섬 & 섬길’ 코스 중 하나인 ‘바람의 언덕길’에 속해 있다. 거제 9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해금강을 한 발짝 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 많은 사람이 찾는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을 지나기도 하는 길이다. 우제봉 전망대에서 해금강을 내려다보면, 구름 같은 먹먹함이 밀려온다.

“바다의 금강산이라고 해서 ‘해금강’이래. 다온이 좀 더 크면, 금강산도 한번 가보자.”

“응. 근데 엄마, 거제도도 해금강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땅이지?”

“그렇지, 우리는 해금강 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거지.”

“와, 뭔가 사막 한복판에 있는 오아시스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딸아이는 해안선을 따라 우뚝 솟은 기암괴석을 보며 이곳을 떠올렸다. 섬에 사는 걸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사는 거라고 표현하다니. ‘특별한 곳에 살고 있었구나.’ 그녀의 시선은 거제에서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한 순간들로 바꿔 놓았다. 이곳을 더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 마주하고 싶어졌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계절의 변화였다. 도시의 단조로움과 달리, 거제에선 계절마다 삶의 배경이 바뀐다. 봄엔 새싹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름엔 발가락 사이로 바닷물이 간지럽힌다. 가을엔 붉은 열매의 땀방울이 보이고, 겨울엔 얼음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봄엔 대금산의 진달래와 공곶이의 수선화를, 여름엔 저구항의 수국을 즐긴다. 가을엔 구천 댐 저수지의 단풍과 섬꽃축제를, 겨울엔 장사도의 동백꽃을 찾는다.

계절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리고 힘든 시간도 언젠가는 지나고, 새로운 시작이 온다는 것을.


마음에 먹구름이 앉을 때면 ‘여차-홍포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바다를 감상하기에 좋은 드라이브 코스다. 한쪽엔 거친 산의 능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고, 다른 쪽엔 절벽을 부딪치며 찰랑거리는 바다가 있는 길.

“지난번엔 바다가 어두운 파란색이었는데, 오늘은 초록이 섞여 있네.”

딸아이는 같은 길도 매번 다르게 그려낸다. 바다가 그날의 기분과 날씨, 그리고 자리에 따라 다른 색을 입는다고 말한다. 맑은 파랑, 부드러운 남색, 춤추는 바다, 꿈꾸는 바다 등 그녀만의 표현들로. 자연은 그렇게, 우리를 시인으로 만든다.


자연의 시를 한 줄씩 읊다 보면, 나는 점점 더 착해진다. 그저 존재할 뿐,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 자연을 보며, 나도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는다. 더 이상 나를 설명하려 애쓸 필요도,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불필요한 걱정과 불안에 시달릴 필요도 없어진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걸.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다.


자연은 꽉 채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잡다한 생각과 감정을 비워낸 자리. 빈자리에 햇살이 내려앉고, 풀냄새가 퍼지며, 파도가 일렁인다. 비워야만 바람이 지나가고, 구름이 흐를 수 있다. 하루하루 빡빡하게 채워 넣지 않아도 괜찮다는걸, 속을 비워내고 나서야 알았다. 비워야만, 채워지는 것임을.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고, 순간을 충분히 누리며, 삶의 속도를 조금씩 조절해 본다. 마치 오랜 친구와 재회하듯, 나 자신과 점점 더 가까워진다.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의미 없는 일들에 흩어지게 두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진실한 삶, 소진하기보다는 채워가는 삶을 택하려 한다. 내 안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맞춰가며, 그 끝에 펼쳐질 그림을 조용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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