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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미 Jul 09. 2023

황우석과 '우빛속'의 상관관계

요즘 과학과 기술에 관하여


기사는 넷플릭스 다큐로 선보인 다큐멘터리 영화 '킹 오브 클론(King of Clones)'을 통해 최근 근황을 알린 황우석 박사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킹 오브 클론(King of Clones)'다큐멘터리 영화 '킹 오브 클론(King of Clones)'

머니투데이 김인한 기자 <"낙타 복제요? 150마리가 넘죠" 만수르와 손잡은 황우석 충격 근황>


황우석 박사라니, 언제 적인가.

2000년대 초중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줄기세포'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레 떠올랐고 무엇보다 '사기꾼'이라는 연상작용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런 황우석 박사가 UAE에서 만수르의 지원으로 동물복제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기사들은 대단하기도 하다면서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 표정이다.

댓글들을 살펴보니 의견도 나뉘는 모양새다. 명예롭지 못한 과학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응원이 담긴 기대감과 비윤리적이었던 과거의 행실 지적이 함께다. 나도 당장은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아무튼 그는 낙타 150마리를 복제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곳에선 최고의 품종인 낙타를 복제했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금전적인 성취는 이룩한 셈이다. 2000년 중반에도 '복제'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인간 윤리의 문제로 말이 많았다. 게다가 논문 조작을 일삼은 그의 탐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여전하다. 그러나 애초에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동안 황박사가 이룩한 과학 성과를 떠올리면 이 찝찝한 느낌은 간단치 않다. 의료뿐 아니라 이를테면 챗GPT, AI, 메타버스, 블록체인 등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고 기업도 개인도 이를 대비하기 위해 분주하다.


나는 과학과 기술의 거침없는 시도에 대하여 생각한다.

 20여 년 전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면접관이 했던 질문이 있었다. 지원했던 과는 부모님이 극구 반대했던 소위 '굶는과'. 국어국문학과였다.

"앞으로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할 테고 소설과 시도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어요. 학생이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때에만 해도 모토로라 폴더폰이 유행했던 때라, 도저히 먼 미래의 일인 것만 같아서 피부에 닿게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소설과 시를 인공지능이 쓴다라.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 초 만에 그림을 그리는 AI를 마주하고, 시나리오도 쉽게 써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때 19살인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더랬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충족되지 않는 것들을 인문학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과연 그런가. 나는 명예를 크게 실추당한 과학자의 최근 근황을 보면서 장담할 수 있는 대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소설을 읽는다. 포항공대 석사까지 마친 대한민국 SF소설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를 갈 수 없다면>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대답이 될 수도 있을만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말하고 싶다. 애초에 국어국문학과가 아닌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한 젊은 작가가 쓴 SF. 나는 신선한 이야기를 기대했고 기대를 충족했던 기억이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지구 밖 마을이 있다. 유토피아라 불리는 이상적인 공간에는 차별과 배제가 없다. 이곳 사람들은 생에 한번 '지구'로 순례를 떠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러한 지구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안정과 평화를 버리고, 혼란과 고통을 선택한다. 주인공은 어디에서부터 이 모든 것이 생겨났는지를 파헤친다.


얼굴에 있는 흉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자란 바이오 해커 릴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 '흠이 없고 완벽한, 개조인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릴리는 엄청난 부와 명성을 쌓는다. 이를테면 황우석 박사의 클론과 비슷한 복제의 방법으로 결함을 가진 유전적 요인은 배제한 인간을 창조하는 방식이다. 곧 유전적으로 완벽한 배아를 만들어서 부유층에게 파는 일을 한다. 그러나 어딜 가나 부작용은 있는 법. 개조에 실패한 인간들은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릴리는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완벽과는 거리가 먼, 결핍이 온전한 개성으로 인식되는 유토피아적 마을을 만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얼룩에 관해 무어라고 흉보는 것을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나의 독특한 얼룩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마을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항상 떠날 때보다 줄어있었다. 시초지인 지구는 인간배아 디자인으로 탄생한 무결점 신인류가 사는 세계와 배아 디자인을 받지 못한 '비개조인'이 사는 세계로 분리되었다. 차별이 공공연히 표출되고 분리된 세계에 왜 돌아가려는 걸까.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상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유토피아는 서로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차별이 없기때문에 행복한 느낌만 있다. 그러나 행복의 근원을 알 수 없다.

다소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예찬일 수 있으나 삶이라는 것은 괴로움과 더 많은 행복을 준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과 기술은 한 인간이 막을 수도 없는 시류와도 같은 것이어서 한편으론 무력감이 든다. 하지만 분명 점점 잊혀 가는 어떤 것. 우리의 다음과 그 다음 세대를 위한 정수를 전달하는 일. 그것만이 유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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