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없는 소녀>
스쳐 지나가는 한 장의 사진, 하나의 문구가 마음을 헤집을 때가 있다.
입을 굳게 다문 소녀의 옆 모습을 담아낸 영화 포스터가 그러했다. 요란하거나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한 소녀의 사진과 한 줄의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가까운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검색했지만, 그 많은 상영관에는 몇몇 블록버스터 영화로만 반복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지척의 영화관을 놓고 에둘러 멀리 찾아 나섰다.
다행히 ‘그 영화관’에서는 하루에 2번 상영을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그 영화관’에 내려가는 입구는 어둡고 좁다. 거대한 자본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의 홍보는 복도에 세워놓은 몇장의 포스터들이 전부다. 관객은 역시 서너명 뿐이었다.
아일랜드 영화 <말없는 소녀>는 한 소녀의 ‘처음으로 마주하는 찬란한 여름’을 그린다. 클레어 키건의 동명소설이 원작으로, 1981년 작은 마을의 소녀가 먼 친척인 숀과 아일린 집에 잠시 머무르는 얘기다.
중요하다 할만한 사건도, 극적인 장면도 없다. 화면을 채우는 거라곤 목가적인 아일랜드 농장과 초라한 집이 전부다. 하지만 놀랍게도 몰입하게 만든다. 진실된 울림을 준다. 그건 절제된 연출과 과장되지 않은 섬세한 연기 탓이었다. 보는 내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같은 착각을 가져올 정도였다.
영화는 제목만큼이나 말이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들을 사고로 잃었던 부부의 아픔이 그대로 전달되는 까닭은 진심이 담긴 침묵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큰 위안을 전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 정서적으로 학대받던 소녀에게 숀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 말 안해도 돼. 많은 사람들이 침묵할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단다.”
영화의 마지막, 처음으로 사랑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된 소녀가 숀에게 힘껏 달려오는 장면은 보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 텍스트가 올라가기까지 어떠한 조명도 켜주지 않은 극장의 배려가 고마웠다. 어두운 영화관의 긴 계단을 밟고 올라오면서 잠시 유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지상에 올라오니 빛이 있었다. 눈부신 빛은 그 기억의 파편들을 섬세하고도 묵직한 영화의 감동에 스며들게 했다.
영화 포스터를 다시 스쳐 지나가며, 그 소녀가 ‘처음으로 마주한 찬란한 여름’에 함께 있을 수 있었음에 잠시 행복했다. 비록 그 감정과 그 느낌이 현실속에 얼마 가지 못하더라도 난 기꺼이 그 시간을 기억해 낼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충분한, 달려가 안길 수 있는 사람은 도무지 될 수 없겠냐며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다. ‘조용하고도 단호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