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과 우울의 실패학, 2019
*스포일러가 담겨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실패했다는 자책
능력이 클수록 실패에 대한 우울감은 크다. 견뎌내는 방법은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내 판단과 능력에 연결되어 일어난 결과를 어떻게 뿌리친단 말인가. 타노스의 손가락을 튕기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왜 그걸 막아내지 못했을까. 나 때문에 우주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동료들도 내가 죽인 것만 같다.
살아남은 히어로들은 이 자책감을 견딜 수 없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후 나는 깊은 우울감을 견디는 중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본 주말에 아이의 치과 교정 시술을 받고 대학 등록금에 해당하는 치료비를 카드로 결제했다. 10년 넘게 매달 27만 원씩 빠져나가는 손해보험에 아이 치과 치료 보상은 없다. 식물상태로 20년을 지내오신 어머니를 병 간호하고 천정부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분투하며 살았다. 엄마를 천국에 보내 드린 뒤 2년째가 되면서 마음에 크게 짓눌러 오는 무기력감과 우울감으로 요즘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들다. 경제적 부양에 대한 책임에 짓눌리며 히어로처럼 힘을 발휘해야 하는 가장의 세상에서 타노스의 펀치를 연타로 맞으며 통증을 참고 살아간다.
타노스를 다시 만나면 가장 죽이고 싶은 히어로는 토르다. 그는 신적 존재로 파워 클래스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더불어 최상급이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손을 타격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과를 되돌릴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어벤져스의 실질적인 리더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다. 어벤져스 1편을 기억해 보라. 서로 힘만 쎄 가지고 중구난방 자기주장만 하며 혼란한 팀을 결속시키며 진두지휘한 것이 캡틴 아메리카다. 파워 클래스는 좀 뒤질지 모르지만 그는 리더로서 상징적이고 탁월한 사령관이다. 전투에서는 파워보다 리더십이 중요함을 캡틴 아메리카가 보여준다. 아이언맨은 자본력(군비), 과학기술력의 총체로 현대 전에서 필수적인 요소를 갖춘 또 한 명의 헤드이다. 그래서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싸우는 형국이 연출된다. 두 히어로가 세상의 절반이 사라진 혼돈의 시간을 수습해야 한다.
토르, 신이며 왕이지만 절망 앞에서 순수한 인간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가장 충격적인 지점이 토르다. 인간적으로 호감이 급상승한 토르의 망가진 모습이 등장한다. 크리스 헴스워스는 곧 <맨 인 블랙: 인터내셔널>의 에이전트 H를 선보이는데, 앞선 엔드게임에서 토르의 멋짐을 완전히 포기했다. 190센티미터의 키에 프로 레슬러의 근육, 굵직하고 야성적인 남자의 목소리, 멋진 붉은 망토, 잘 정돈된 수염에 긴 금발 머리를 지닌 토르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완벽한 남자였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닥터 조로 나온 한국 배우 수현도 극 중 여러 히어로 중에 관심을 둔 남자가 토르였다. 그가 타노스의 목을 베어 버린 뒤 5년 동안 완전히 망가졌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 한쪽 눈을 잃지만 각성하면 신적인 전투력을 발휘하여 타노스와의 맞짱에 자신만만한 그였지만, 결국 사랑하는 어머니를 지키지도 못했고,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며, 문제아였지만 동생도 죽었다. 1500년을 살면서 무수한 적을 끝장냈어도 가까운 소중한 사람들은 지키지 못한 데다 타노스의 끔찍한 야망도 막지 못했다. 그 자책감이 얼마나 큰지는 배 나오고 바보 같고 소심해진 토르에게서 그대로 볼 수 있다. 힘으로 그에 맞설 존재는 각성한 헐크 정도였는데 타노스에게 당하고 말다니. 지키지 못한 지구와 세계, 이제 자신의 아스가르드 왕국을 다스릴 여력조차 없다. 가장 힘이 센 존재인 그가 몸이 다 망가져 버렸고, 삶의 에너지조차 고갈되어 자기 몸도 간수하지 못하는 나약한 허울뿐인 왕이 되었다.
난 웃으며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책임감이, 좌절과 절망의 결과에 맞닥트리자 한순간의 결정에 대한 후회와 자책은 자신의 호흡까지 버겁게 한다. 술에 취하고 고기에 취하고 허탈한 웃음에 찌든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 웃는 것마저도 죄책감이 든다.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그에게서, 답 없이 견뎌가는 이 시대 가장의 일면이 보인다. 그때 브루스 배너(헐크)가 이상하게 순해진 얼굴로 왔다. 몸에서 제거해야 하는 병이라고 생각한 헐크의 존재가 친구가 되어 분노는 쭉 뺀 채. 토르 앞에 금지어인 타노스를 언급하며 아무렇지 않게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한다. 토르가 슬럼프에 빠진 히어로의 세계에서는 캡틴 마블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시간을 거슬러 간다는 데 동참한다. 그는 어쩌면 죽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더 끌렸는지도 모른다.
토르는 토니 스타크가 완성해 낸 '시간 탈취 기계'로 과거 아스가르드 왕국에 도착한다. 저기 시녀들과 함께 엄마가 걸어가고 있다. 아, 나는 그 장면에서 가슴이 저며왔다. 망가진 토르를 먼저 발견한 것은 엄마 프리가 여왕이다. 굳이 미래에서 왔다는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프리가는 아들이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린다. "많은 힘든 일을 겪었구나" 하며 아들을 꼭 안아준다. 인간적인 모습이 된 토르는 다시 만난 엄마의 그 말에 심장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히어로의 책임감에 짓눌리며 패배자가 되어 살아오다가 이제야 남들과 같아진 존재로 깊은 모성애의 이해와 위로를 받는다. 바보 같이 토르 모자의 포옹 장면에서 울고 말았다. 아니, 어벤져스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다니! 내 우울이 경계선상을 이미 넘어선 것인가. 토르는 프리가의 위로로 다시 자신의 망치를 손에 쥔다. 배가 불뚝하고 초라한 행색이지만 그는 여전히 토르이다. 깊은 좌절과 절망의 실패자를 변화시키는 힘은 엄마의 위로였다. 1600살 토르에게도 모성애는 절실한 것이었다.
히어로이기를 요구받는 중년 가장에게 삶의 고단함과 실패감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고 받아주는 모성애의 포옹과 위로가 그립다. 토르는 다시 만난 타노스와의 전쟁을 마치고 왕권을 발키리에게 넘긴다. 권력보다는 쉼이 중요해졌다. 나는 언제 이 땅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쉼을 맞이할 수 있을까.
블랙위도우, 어벤져스의 문제 해결을 맡은 그녀의 우울과 희생
블랙위도우의 나타샤 로마노프는 어벤져스 안에서 제일 유약한 것 같지만 캡틴 마블이 등장하기 전까지 부드러움과 걸크러쉬의 파워를 겸비한 중심축으로서 든든한 존재이다. DC의 원더우먼까지는 아니어도 문제 해결의 디테일을 담당하며 남자 히어로들의 거칠거칠함에서 발생하는 구멍들을 정리해 준다. 캡틴 아메리카와 헐크를 도닥이며 집중력을 심어 주는 나타샤는 어벤져스의 제갈공명 같은 존재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치유자 클럽에서 희망과 긍정의 전도사로 활동하며 억지로 자신의 멘탈을 지키며 견디는 동안, 나타샤는 우주 화상회의를 주재하며 절반의 인구가 사라진 황폐한 현실에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으려고 애쓴다. 그녀가 포기하는 순간 어벤져스의 기능은 사라지고 말 것만 같다.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순응해 가는 듯해도 나타샤만큼은 무기력해질 수가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작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능력에 한계를 느낀 그녀는 고통스러워 눈물이 주룩주룩이다. 가만히 있으면 눈물만 나는 세상, 우울한 세상에서 그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는다. 스티브(캡틴 아메리카)가 다가오자 "뻔한 위로를 하려고 하면 샌드위치로 맞을 줄 알라"는 말을 던지는 그녀의 말이 공감된다. 억지 긍정은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헛소리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못하다. 문제 해결의 가능성도 없는데 무슨 희망과 긍정이란 말인가.
호크 아이, 죽여야 견딜 수 있다
호크 아이는 아내와 딸 모두 잃었다. 그에게 남은 건 악밖에 없다. 못된 놈이라도 찾아서 죽여야 견딜 수 있다. 가만히 있다가 당해버린 데 대한 자책과 분노로 무엇이든 원인이 될 만한 적을 찾아내야 한다. 역시 나타샤가 그를 찾아온다. 둘이 짝이 되어 소울 스톤을 찾으러 간다. 여러 스톤 중에 가장 신화적인 곳을 맡았다. 타노스가 딸을 죽여 그 희생의 대가로 얻은 스톤이다. 둘 중 누군가는 죽어야만 얻을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상 분명히 호크 아이가 죽을 줄로 예상했다. 가족을 잃어버린 그가 마지막에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야 뭔가 맞을 것 같고, 누가 봐도 그런 희생을 나타샤가 감당하게 할 수는 없다. 호크 아이를 밑도 끝도 없는 살인의 방황에서 건져낸 것이 나타샤 아닌가.
그러나 나타샤는 결국 자기 몸을 던진다. 가족을 잃은 호크 아이가 다시 가족과 만나는 선물을 안겨 주고 싶을 만큼 그녀는 천사였다. 그래서 엔드 게임 마지막 장면에 호크 아이가 가족과 만나 행복한 표정을 짓는 씬이 두 번이나 나온다. 나타샤에게 가족은 어벤져스 자체였기 때문에, 되찾은 스톤으로 모든 상실을 회복하는 게 중요했다. 그녀의 깊은 우울감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산화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깊은 우울감에 빠질 때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많이 남기고, 고통과 책임으로 얼룩진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하는 상상에 빠질 때가 있다. 위험한 우울의 경계선 상에서 가장은 스톤과 자신을 바꾸고 싶어진다. 이 글 위험해 보이지만, 어벤져스로 이런 글을 쓰는 건 치유를 얻는 방법이기도 하다.
스티브, 더 이상 친구가 죽지 않는 인생을 택한 지구 리더
나타샤를 사랑한 헐크는 타노스를 이긴 뒤 계속 나타샤를 살릴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나타샤의 죽음을 되돌릴 방법을 찾지 못한다. 나타샤의 가족은 어벤져스였다고 말하는 스티브는, 사실 희망의 상담 리더를 가장하여 자신을 지켜야만 한 리더였지만 그도 깊은 우울을 견디고 있었다. 스티브는 나타샤의 죽음에 가장 굵은 눈물을 흘리며 애도한다. 어벤져스의 리더로서 위기 때마다 자신을 도운 나타샤를 그리며 누구보다도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티브는 임무를 마치고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연인인 페기 카터 대령과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팔콘이 노인 스티브에게 이제 캡틴 아메리카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쉽다고 하자 스티브는 캡틴의 방패를 팔콘에게 넘긴다. 스티브는 캡틴이 아닌 인생을 살아온 것을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친구를 잃지 않아도 된 삶에 자족하여 평온한 얼굴이다.
마블 영화가 훌륭한 지점이 이 부분이다. 개성 강한 히어로들이 연대기적으로 얽혀 있는 스토리의 힘을 발휘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 세계관의 능란함을 DC는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힘과 힘의 대결로만 나오는 DC가 언제 정신 차릴지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DC의 히어로들은 힘과 외모 외에 철학을 발견할 수가 없다. 내가 <캡틴 마블>을 좀 재미없게 본 이유가 그러하다. 오직 힘의 각성에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듯한 부분이 DC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와서야 그럴 만했다는 이유를 발견했다. 다들 절망하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해 갈 슈퍼히어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캡틴 마블은 절망한 어벤져스 속에 워낙 슈퍼맨 같은 존재라 시원시원해서 보기 좋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딸과 아내를 떠난 우울한 희생자, 나는 아이언맨이다
아이언맨(토니 스타크)은 허술해 보이지만 완벽하게 준비하는 리더였다. 그런 그가 엔드게임 첫 장면부터 죽음을 암시한다.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대안을 마련해 놓는 토니가 처절한 좌절감 속에 유언까지 해두다니! 아이언맨 없는 어벤져스는 상상할 수 없기에 살아날 것이라 생각했고, 캡틴 마블 덕분에 살아난다. 어벤져스의 과학기술력을 맡은 토니는 대안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는 조금도 천방지축 날뛰지 않는다. 한적한 시골에서 페퍼 포츠(기네스 팰트로)와 딸을 낳고 만족하며 살아간다. 딸이 너무 귀여워서 가정적인 아빠가 되어 사는 지금에 만족하고 있다. 스티브와 나타샤가 앤트맨을 데리고 와서 양자 세계에 들어가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고 해도 조금도 끌리지 않는 얼굴이다. 이미 수많은 시뮬레이션으로 그는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정확한 시점으로 도착하기, 다시 돌아오기)의 답을 찾던 중에 놀랍게도 그들이 다녀간 날 밤에 시뮬레이션을 성공시킨다. 아내 페퍼는 아이언맨을 말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며 토니를 어벤져스의 자리로 떠나보낸다.
스톤을 모두 찾아 손가락을 튕기며 사라진 자들을 되돌리는 것은 죽을지도 모르는 방사선에 노출되어야 한다. 줄곧 전투력 한 번 보이지 않던 순한 헐크가 나선다. 엔드게임의 가장 화려한 전투 신의 클라이맥스가 펼쳐지고 마지막 희생양으로 토니가 자신을 바친다. 과거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그는 어벤져스의 아버지 같은 역할로 자신을 희생하고, 모두를 죽이겠다는 타노스의 야심을 수포로 끝냈다. 이런 희생은 <반지의 제왕>에서도 나온다.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토니 스타크는 어벤져스의 존재를 위해 먼저 떠난 나타샤가 씨앗이었다면 자신은 열매가 되어 산화한다. 이제 인생을 즐기고 누릴 수 있던 딸과 아내를 남겨둔 채.
우울의 실패학으로 시작하여 희생의 미학으로 끝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고단한 히어로들은 자신의 역할을 양도한다. 자신의 정체성이 생명을 지키는 것임을 각성하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더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어벤져스를 또 만든다면 극장에 달려갈 것이다. 마블이 처음부터 이 긴 대장정을 기획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41년 마블코믹스를 세우고 마블 스튜디오 영화로 한편 한편 만들다 보니 대중을 매혹시키는 시리즈가 탄생됐다.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가고 한편 한편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우울함도 그렇다. 실패감에 젖어 가만히 있기보다 쉬운 것, 할 수 있는 것, 내 가슴이 조금이라도 뛰는 것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다 보면 인생이라는 긴 시리즈의 독특하고 매혹적인 콘텐츠가 탄생할 것이다. 스티브와 나탸샤처럼 울고 싶은 순간도 만난다. 울고 싶을 때는 펑펑 울어야 한다.
토르처럼 몸이 망가질 때 "야채도 좀 먹어"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늘 그립다.
덧, 스칼렛 요한슨의 스무 살 시절
스칼렛 요한슨이 어벤져스를 떠나는 건 더 이상의 어벤져스를 기대하지 못하게 만든 요소다. 물론 아이언맨도 희생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액션은 철갑 슈트를 입은 아이언맨보다 훨씬 화려하고 섬세한 퍼포먼스였다.
아역배우부터 꾸준히 연기 인생을 살아온 스칼렛 요한슨의 스무 살 매력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에서 볼 수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본 후 그녀가 그립다면 꼭 이 영화를 보기 바란다. 어벤져스의 우울함과 20대 스칼렛 요한슨의 우울함을 겹쳐 싱그럽고 풋풋한 그녀의 미소를 연이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