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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은 건 사람이 아닌 우리의 시선

미디어가 바꿔야 할 치매의 얼굴, “자극이 아닌 이해, 병이 아닌 사람”

by 황교진

공포 대신 이해로...치매를 인간의 존엄으로 다시 그리기


치매를 집중해서 다루는 언론사에서 일한 지 만 2년이 넘었다. 나는 친할아버지와 장모님이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경험이 있고, 청년기부터 20년 넘게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기도 했다. 20대에 영케어러로 시작해 50세가 다 되도록 ‘장기 중환자의 보호자’로 살아왔다. 〈디멘시아뉴스〉에 합류하기 전에는 뇌질환 환자 가족을 위한 소셜벤처를 창업해 운영했다.


사람이 어느 순간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건, 가까이 있는 가족에게 큰 재난이다. 그러나 치매는 한순간에 모든 기억을 앗아가지 않는다. 가까운 기억부터 흐려지고, 시간이 지나며 오래된 기억이 사라진다.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거나 성격이 바뀐 어르신을 ‘귀신 들린 사람’으로 여긴 무지한 시절도 있었다. ‘노망’이라 치부하며, 나이 들면 걸리는 흉한 병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늘 그 곁에는 변(排泄)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장기적으로 고단하고 경제적으로 지쳐 가는 치매 가족들을 위한 치유 콘서트를 기획해 진행한 적이 있다. 1부는 시어머니 치매를 10년간 돌본 며느리가 사례 발표를 했고, 2부는 보호자들의 정서와 마음을 위로하는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3부에는 치매를 진료하는 전문의를 초대해 객석에 계신 보호자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인기 있는 시간은 3부였다. “치매는 왜 걸리나요?”, “나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 빗발쳤다. 3년, 5년, 심지어 10년째 돌보고 있어도 치매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병원에 자주 갈 수 없는 이들은 정보가 부족하다. 발병 전엔 관심이 없고, 발병 후엔 정보가 없다. 그래서 치매는 ‘무지로 인한 공포’가 가장 큰 병이 되곤 한다.


치매는 원인에 따라 70가지 이상으로 나뉜다. 조기 발견으로 호전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흐르며 중증 환자가 되고 가족의 이해와 돌봄을 필요로 한다. 인류가 치매를 완전히 정복하려면 전 주기를 아우르는 치료제가 필요하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현재 사용되는 약물은 증상의 악화를 늦추거나 인지 저하 속도를 완화하는 수준이다. 완치나 병의 정지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2018년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쓰이던 주요 약물의 건강보험 급여를 전면 중단했다. 약효가 제한적이고 부작용 우려가 크다는 평가에 따라 정부가 나서서 비약물적 돌봄(Thérapies non médicamenteuses) 정책으로 방향을 바꿨다. 감각·정서·인지 자극을 활용한 예술·음악·회상치료 등이 대표적인 치매 치료법이다. 치매는 환자와 가족, 환자와 돌봄 제공자의 관계와 존엄, 일상 회복을 우선하는 돌봄 시스템 즉, ‘사람 중심 케어’가 현재로선 가장 좋은 해결책인 셈이다. 치매는 치명적이고 공포스러운 가정 재난이라는 인식을 바꾸고 ‘조기 진단·조기 치료 후 돌봄과 연계하면 삶의 질을 일정 기간 유지할 수 있다’는 현실적 메시지가 핵심이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으로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을 때, 점차 중증 환자의 모습을 마주할 때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려주는 사회적 시스템 구비와 당사자 가족이 미리 공부해 두는 대비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치매는 더 이상 ‘특별한 누군가의 불행’이 아니다


모두가 나이 들어가는 사회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섰다. 치매는 미래의 나 자신의 이야기이며, 더는 숨기거나 외면해야 할 병이 아니다. 무지와 두려움이 경도 환자를 중등 환자로 만드는 법이다. 그러나 미디어 속 치매는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예능은 시청률을 위해 자극적인 상황을 예고하고, 드라마는 비극의 전조처럼 치매를 등장시킨다. 뉴스는 ‘치매 노인 실종’, ‘치매로 인한 사고’, ‘치매 노인 요양시설 학대 피해’ 같은 제목으로 공포를 되풀이한다. 그 속에서 치매는 질병이 아닌 ‘파국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한 스타 강사가 방송에서 “기억력 검사 0.5점이 나왔다”고 말하며 자신이 치매에 걸린 듯한 이야기를 꺼냈다. 정확히 어떤 검사이고 그 점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 전달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는 수많은 포털 기사와 유튜브 영상으로 증폭되며 이미 ‘치매에 걸린 스타 강사’로 전달됐다. 대중은 ‘치매는 갑자기 찾아오는 공포’라는 인식을 다시 한번 각인했지만, 스타 강사는 일시적인 기억력 저하 증상으로 활동을 이어가며 치매 환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대중 앞에서 전달된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 고백은 실제 치매 가족에게 아픔을 주고 사회적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강연의 목적이 자기 성찰이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중장년층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심어준 셈이다.


예능에서도 이런 방식은 반복된다. 다음 회차 예고에서 “부모가 치매 진단을...”이라는 자극적 문구로 시청자의 눈길을 끈 뒤, 알고 보면 설정이거나 오해로 마무리되는 식이다. 현실의 치매 가족에게는 ‘우리의 고통이 누군가의 시청률 장치가 되는’ 불쾌한 경험으로 남는다. 그렇기에 미디어가 치매를 다루는 태도는 단순한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병이 아닌 사람, 공포가 아닌 존엄


영화 〈스틸 엘리스〉는 드물게 치매의 진단과 증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존엄’을 중심에 둔 작품이다. 언어를 잃어가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으려는 엘리스의 내면과 가족의 감정을 섬세하게 따라간 이 영화는, 치매를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다수의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히 증상의 비극성에만 집중한다. 배우의 연기력 과시를 위한 장면, 혹은 가족 해체의 서사 속 한 장치로 소모될 뿐이다. 그 사이 치매는 ‘죽음 이전의 죽음’으로 이미지가 굳어간다.


이런 가운데 MBN의 예능 〈언포게터블 듀엣〉은 새로운 방향을 보여줬다. 치매가 있는 부모와 자녀 혹은 배우자가 함께 노래하며 잃어버린 기억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음악이 ‘기억을 불러오는 매개’로 쓰였다는 점에서, 예능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치매 환자가 무대에 선다’는 설정만 들으면 신파적으로 예견할 수도 있지만, 실제 방송은 다정하고 담백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환자와 가족은 ‘병’이 아닌 ‘사람’으로 연결되었다. 시청자가 느낀 것은 연민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이것이 미디어가 해야 할 일이다.



치매를 상식으로 이야기할 시간


언론과 방송이 치매를 다룰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타자화’다. 치매는 나와 상관없는 병, 혹은 ‘돌볼 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보편적 현실이다. 또한 치매는 한 번 걸리면 끝인 병이 아니다. 조기 진단과 치료, 생활 습관 개선으로 중증으로 진행되지 않는 예도 있고, 무엇보다 돌봄과 사회적 지원이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균형 있게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공포를 자극하는 대신 ‘이해’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치매는 함께 관리해야 할 삶의 일부’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사회의 인식은 달라질 수 있다. 치매를 다루는 기사 한 줄, 방송 한 장면이 누군가의 마음을 무너뜨릴 수도 일으켜 세울 수도 있다. 그 무게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미디어의 진짜 책임이 시작된다.


1972년 일본 작가 아리요시 사와코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치매를 돌보는 이야기를 담은 《황홀한 사람》을 발표했다. 이 사회 참여 소설은 1970년대 초 일본 고령사회 문제를 다뤘다는 점, 저자 아리요시 사와코가 취재에만 무려 10년을 쏟아부어 치매 가정을 인터뷰한 점 그리고 1972년 처음 발표된 책이 그해 192만 부로 시작해 3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인 점 등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는 문학 작품이다. 50여 년 전 일본 사회의 노화, 치매, 간병과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각 세대의 시선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일본의 노인복지제도의 근간을 바꾸었으니, 한 권의 문학서가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갖는지 상징해 주기도 한다. 작가는 1970년대에 이미 치매를 ‘노화로 망가진 인간’이 아니라 ‘존엄과 이해가 담긴 돌봄이 필요한 가족’으로 그렸다. 이처럼 문학 작품 한 편이 치매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선진화된 노인복지 정책을 만드는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의 미디어도 변해야 한다. 치매를 ‘두려움의 서사’에서 ‘돌봄과 관계의 이야기’로 옮겨놓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이 드러난다. 미디어가 해야 할 일은 병으로 인한 불행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병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빛을 발견하는 일이다. 치매를 다루는 미디어의 일원으로서, 나와 우리 가족이 이 병을 마주하는 날을 떠올리며 한 줄을 쓴다. 그것이 초고령사회 한국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따뜻한 품격이라고 믿는다.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치매에 걸렸다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회 분위기를 바란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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