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꿈, 기억하시나요?
종이에 무언가 글씨가, 그림이, 메시지가 쓰여지는 소리다.
넙적한 상자 같은 기계에 종이가 들어가면,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종이에 뭔가 글씨를 써 준다.
초록색 PC 화면 안에만 있던 문자들이 내 손에 쥘 수 있는 하얀 종이에 아로새겨지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디스켓 안에 숨어있던 메시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만져볼 수 있는 종이 위의 문자로 맞이 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쯤의 이야기다.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사러 읍내의 기차역에 갔을 때였다. 빳빳한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역무원 아저씨가 매표소 창구의 조그만 구멍으로 어디를 가는지, 언제 가는지를 물어온다. 그리고 이내 '투다다다~'하는 소리를 내며 단말기를 능숙하게 조작하고는 다시 한번 출발시간과 목적지를 다시 묻는다. 어머님의 지갑에서 꼬깃꼬깃 하고 나온 지폐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 '짤랑~' 동전 소리가 역무원 아저씨의 손에 내려앉고, 단말기 옆의 하얀 상자에서는 양쪽 가에 구멍이 뚫린 종이를 꿀꺽꿀꺽 먹어가며 굉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찌잉찌잉... 그리고 어머니 손에서 '하넌만 구경할게요~'하며 받아 든 승차권에는 목적지와 출발시간이 조금은 거칠게 아로새겨 있었다.
그게 굉장한 소리를 내는 하얀 상자인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와의 첫 만남이었다.
신기했다.
PC 안에만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다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마침 같은 반 친구가 오래된 프린터를 한대 팔 생각이랬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이지만 반년 꼬박 모은 꼬깃꼬깃한 이만원에 하얀색 앱슨 프린터를 데려왔다. 지금은 많이 잊힌 25핀 병렬 포트에 프린터를 연결하고 도스 프롬프트에 처음으로 텍스트 파일을 출력하는 명령어를 찍어본다.
A:\> TYPE HELP.TXT > LPT1
프린터에서 이내 '찰칵찰칵', '지이이잉'소리와 함께 얹어놓은 하얀 종이를 꿀꺽꿀꺽 집어삼키고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굉장한 소리와 함께 영문 알파벳이 가득 찍혀있는 종이를 뱉어낸다. 이 신비로운 기계는 컴퓨터 안에 있는 어떤 것이든 종이 위에 그려준다. 재미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글이든 그림이든 아래아한글 문서든 닥치는 대로 인쇄해 봤었던 것 같다.
그렇게 PC와 가까워졌다. 자료를 정리하는 일, 그리고 그렇게 정리한 것을 표현하는 일이 그저 재미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사가 된 기분도 조금은 들었다. 그래서 생활기록부 장래희망에 막연히 '프로그래머'라고 적어보았다. 그 뒤 나름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 프로그래머로서 개발자로서 일하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느꼈던 저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시작인 듯싶기도 하다.
자, 이제 요즘 세상 사는이야기를 좀 해 보자.
마냥 신기한 것들이 가득했던 유년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적당히 배 나온 30대 중년의 아저씨가 키보드의 컨트롤키에 손가락을 고정시킨 채로 C와 V키를 찾아 헤매고 있다. 늘 쓰던 개발 툴을 실행해서 단순 데이터 조회를 위한 화면에 텍스트 박스 몇 개와 체크박스 몇 개를 추가하고 '일괄등록' 또는 '엑셀 다운로드'라는 이름의 버튼을 만든다. 테이블의 제목을 진하고 그리고 조금 큰 글씨로 바꾸고, 조회 버튼을 좌우로 좀 더 크게, 그리고 삭제 버튼의 배경색을 빨간색으로... 그리고 이내 프로젝트룸에 걸걸한 목소리를 흩뿌린다.
"개발서버 작업 중이신 분 있으십니까? oo 과장님 개발서버 지금 빌드하고 재기동합니다요~"
뭐 특별한 것은 없다. 신기한 것, 뭔가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들은 월말 통장에 찍히는 그리고 각종 공과금과 카드사에서 "퍼가요~"를 하는 그 사이버머니에 조금도 보탬이 되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고객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촌스럽고 큼지막한 버튼 디자인과, 의미는 모르지만 몇 년째 별 탈없이 돌아가는 복사/붙여 넣기를 위한 집계 쿼리 몇 뭉텅이가 야근과 주말출근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고 있다.
우아하고 스마트하고 폼나는 천재 프로그래머를 상상하시는가? 시원한 전망이 보이는 시원하고 여유 있는 창의력이 뿜뿜할 것 같은 사무실에서 테이블에 스타벅스 커피 한잔 우아하게 올려놓고 까만색 화면에 춤추듯 코드를 흩뿌려가는 짱짱맨 개발자를 찾고 계신가? 그런 사람은.. 글쎄다 아마도 여기엔 없다. 그냥 적당한 사무실 구석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와 같이 이전에 잘 돌고 있는 서비스 중에 비슷한 코드가 있는지 소스코드를 뒤적거리는 아저씨 한 사람만 있다. 가끔은 평소에 얼굴 보기도 힘든 높으신 분들을 등 뒤에 병풍처럼 두르고 쿼리가 잘못됫는지, 연계 서비스 주소가 잘못됫는지, 아니면 방화벽 정책을 깜빡했는지, 그것도 아니면 단말기가 이유도 없이 미쳐 날뛰고 있는지 식은땀 뻘뻘 흘리며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애꾿은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는 아저씨도 여기 한 사람 있다.
물론 앞서 예로 들은 상황은 많은 과장과 상상이 섞여 있는 것일 뿐, 개발자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 모두가 이런 답답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릴 적 신나게 키보드 두들기며 "나도 재미있는 게임 만드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외치던 그때의 흥분과 열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화려하고 멋지진 않지만 내가 작성하는 코드 한 줄 한 줄이 세상을 보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진 개발자라는 이름의 그대, 과연 그러한가?
그래, 그럼! 당연하지!
라고, 대답을 해 보자.
정말로, 우리 지금 왜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가? 단지 월말에 들어오는 월급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화면에 코드를 찍고 있을 때만큼은 즐겁지 아니한가? 개발 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두근두근 설레고 명령어 하나하나의 입력에 희열을 느낀다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코드를 작성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어색하다거나 불편하다거나 한 것 없이 그냥 내게 있어 평범한 일상이라 느껴지는, 마치 오랜 연인과의 데이트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라고 물어본다.
그렇다. 개발자인 나에게 있어 프로그래밍이란 오래된 연인과의 데이트 같다.
그래서 조금은 오래된 노래 한 곡을 가져와 본다.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가끔씩은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
그런 것도 예전에 가졌던 두근거림은 아니야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렘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는 거야 이야하~
주말이 되면 습관적으로 약속을 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고 생각을 하지
가끔씩은 서로의 눈 피해 다른 사람 만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이별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지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렘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 거야 이야하~
매일 아침 반쯤 감긴 눈 비비며 의무감으로 출근을 하는 우리. 가끔은 "그래도 개발할 때가 재밌지~"라며 서로를 위로하는 우리. 또 누군가는 주식을 하고 가상화폐에 투자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매주 로또복권 한 장씩 사며 자연스레 퇴직할 핑계를 찾으려 할 때도 있겠지.
그래도 우리 처음 시작은 즐거웠지 않았나?
처음의 그 느낌을 다시 떠올린 다는 것.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한 번쯤은 그 아련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예전 그 기억을 떠올려 보자.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별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이겠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얼마나 신나고 흥미진진했던가.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자.
그리고 잠시 마법사가 되어 보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사.
그리고 오래된 연인과 색다른 장소에 여행을 간다는 기분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 보자. 뭐 사는데 쓸모없는 엉뚱하고 하찮은 것이어도 좋다. 예를 들면 "딥러닝을 공부해서 가수 아이유 사진과 희극인 신봉선 사진을 구별할 수 있는 알파고를 만들겠어!!"라는 것도 좋다. 그다지 쓸데는 없겠지만, 그래도 재밌지 않을까?
이제 다시 물어본다.
당신의 즐거웠던 순간, 그 처음은 무엇이었는지....
이미지는 여기서 가져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