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가 결혼을 한다

by 아이보리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지하철 안이었다.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혹시 알고 있었냐며 툭 보낸 문자에 나는 순간 아찔했다. 그 짧은 순간에 마음이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벌써 십 년 전이다. 평범하지 않은 곳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함께 했다. 내가 아찔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아마 그 시절의 추억에 그 아이가 겹쳐져서 그런 것일 것이다. 딱히 내가 그와 잘 되고 싶었다거나 미련이 남은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사이에 공식적인 관계가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하는 느낌이 좋았고 나 또한 그의 순수함이 좋았다. 쪽지를 주고받던 방식과 서투르지만 마음을 표현하려고 내게 주었던 선물들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한 번도 내게 어떤 관계에 대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오해와 지침이 반복되어 결국 서서히 마음이 꺼지고,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문제는, 그 시절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성인이 된 나는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상형을 이야기할 때-문득, 아주 문득- 나도 모르게 내가 하고 있는 얘기들이 그의 성품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화가 났다. 어렸을 때의 그 기억이 아직도 내게 남아 영향을 주고 있다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나 혼자만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게 싫었다.



삼 년 전인가, 오랜만에 그와 연락이 닿았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다음 날 7시쯤 전화한다고 했다.

나는 밤을 설쳤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산책로로 달려갔다. 전화를 받을 준비를 마쳤다. 조용한 곳에서 전화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고도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화는 오지 않았고, 나는 괜한 오기로 내가 먼저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눈물을 삼키고 나만의 방법으로 해결해보려고 애썼다.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하고 괜히 한 톤 올라간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통화를 하는 동안은 너무 반갑고 좋았는데 다른 사람과 한참 통화해도 울리지 않는 내 핸드폰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잊어버렸나? 바쁜가?


그러다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먼저 전화하면 안 될 이유가 뭐 있어, 자존심 세울 이유가 뭐 있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재빨리 그의 이름 옆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 와중에 빠르게 뛰는 심장에 짜증이 났다.


결국 그는 받지 않았다. 허무했다. 내가 뭐하러 어젯밤부터 잠을 그렇게 설친 건가 또 화가 났다. 산책로를 나와 집에 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모임이 지금 끝났다고 했다. 얘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리 얘기할 수 있었잖아, 가 입 끝까지 나왔다가 도로 들어간다. 이제 이런 말은 소용이 없다. 그 아이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이후 무슨 말을 했는지 더 이상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잘 지내라는 말로 끝을 맺었겠지. 목소리는 좋았던 것 같다. 안심이 된다.


나는 그날 밤도 잠을 설쳤다.



그런데 그 애가 결혼을 한다고 왜 눈물이 나는지, 왜 숨이 순간적으로 막혔는지 모르겠다.


청첩장은 따로 받지 못했다. 결혼식 이틀 전엔가, 문자가 왔다. 시간 있으면 와달란다.

정말 축하해, 그런데 외국에 있어서 참석은 어려울 것 같아. 행복하게 살아. 예의 바른말들로 답장을 보냈다. '외국'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은근한 우쭐거림으로 나는 겨우 알맹이 없는 자존심을 세웠다.


물론 진심으로, 진심으로 나는 그가, 그 친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부정은 못하겠다. 그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도 버리지 못했던 그 편지 한 장, 예전 일기장 속에 꼭 꼭 감춰놓은 그 한 장처럼 나는 결코 그 아이를 깨끗이 지워버리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아직도 그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나와 그 아이의 모습을 아끼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 아이의 성품을 찾으려 했던 것도 내가 애초에 그만큼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내 기대가 높아진 거라고 하겠다. 그렇다. 그 아이는 평생 나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을 것이고 나는 이를 고마운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덕분에 나의 추억은 어느 정도 더 깊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를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이에 매여있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건 완전히 사라지기를 바란다. 나는 더 이상 그 시절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 아이가 아니다. 이제 그 기억에서 발을 뺄 차례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 마음속의 그 아이에게 이별을 고한다.


안녕.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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