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바보 같게도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by 아이보리

그제야 내가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얕보이기 싫어서 담담한 척했지만 사실 울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외면했다.


항상 느리게 마음이 아픈 것을 느끼고는 혼자가 돼서야 다시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어본다. 나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을, 어쩌면 아예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살고 있을 그 사람이 밉다. 난 정말 그 사람이 미운데 함께 했던 시간들을 간간히 떠올리는 내가 너무 싫다.



정말 아껴놓던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어제 그 사람과의 어떤 일을 계기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졌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몇 개월 전 메모에는 내가 그 영화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슬프게 선명하다.


재개봉하면 꼭 보고 싶었는데 혼자 보자니 괜히 청승맞은 것도 같고. 타지에 있는 지금, 문득 내 방 침대 위가 그리워진다. 거기서 따뜻한 전기장판 틀어놓고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한 손에는 과일이나 달달한 과자 접시, 다른 손에는 짭짤한 하몽을 들고 이 영화를 보고 싶다. 특히 이런 종류의 영화는 혼자 보는 게 제 맛이지, 그럼. 아 벌써 설렌다.


똑같은 영화인데 이를 대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아무 생각 없이 재개봉에 들떠서 써놨던 메모가 이제는 어색하게 느껴진다. 저 메모를 내가 쓴 게 맞나 의심이 든다. 그렇다고 그 어떤 계기 때문에 평생 안 보기에는 나만 손해인 것 같아 언젠간 보긴 볼 건데, 글쎄.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제시와 셀린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그 사람은 내게 약을 주고 병을 줬다. 나에게 약을 준 순간, 후에 그가 병을 주고 떠날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이미 이러한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한테 배신을 당한 느낌이다. 현재로서는 그저 그 사람을 다시 만나서 꼭 다시 그 날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이게 혹시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보기 위한 핑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아니야 그렇진 않아, 꼭 그런 건 아니다. 여러 마음이 공존하는 건 맞지만 꼭 그 목적은 아니야. 이번엔 내가 떠나는 사람, 그가 남겨지는 사람이 되어 그 마음을 느껴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을 다 말해버릴 거야.



그러다 또 화살은 나에게로.


처음부터 그 자리에 내가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이렇게 미안한 마음도, 화나는 마음도, 비참한 마음도 들지 않았을 텐데.

그 눈빛이 계속 생각나지 않을 텐데.

알면서도 틈을 줬던 나 자신에게 이렇게 죄책감이 들지는 않을 텐데.

그때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초저녁쯤 다른 영화를 틀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그 사람이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는 나와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백 프로 확신할 수 있다. 만약 그가 그 영화를 좋아했다면 이 영화도 좋아할 것이다. 나는 그 영화를 지우려 이 영화를 본 것인데 여기서도 그가 떠오른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내가 그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몰랐으면 좋겠다.


벌써 새벽 세시다. 자고 나면 좀 괜찮아질지도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 애가 결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