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요. 유감스럽지만 연습은 불가능해요.

by 아이보리

시험이 끝나고 주어진 자유 시간에 나는 거의 피아노를 치며 보낸다. 아, 그렇다고 잘 친다는 건 절대 아니다. 어렸을 때 피아노 배운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펴봤다는 바이엘, 하농, 체르니 100번을 겨우 넘어 체르니 30번 중반까지 뗀 정도? 잘 치고 못 치고를 떠나서 피아노를 생각하면 그냥 애틋하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배우기 싫어서 몸살을 했는데 지금은 악보를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럽다.


오른손과 왼손의 합작도 그렇고 여러 건반이 합쳐져서 이렇게 풍성한 소리가 나는 것이 어떨 때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피아노뿐 아니라 모든 악기는 참 놀라운 발명품 같다. 독주와 합주의 느낌은 또 다른데, 혼자 내는 소리는 간결하고 분명하지만 함께 낼 때의 그 꽉 찬 느낌은 항상 마음을 울린다. 특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들이 모여 균형을 이룰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희열이 있다. 음악을 들을 때면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내게 독주가 선의 이동이라면 합주는 어지러운 듯 조화를 이루는 유화 같은 느낌이다.


오늘도 새 악보를 뽑아 연습하다 보니 시간이 후딱 간다. 시험도 끝났고 아무런 제약 없이 오랜만에 갖는 나만의 시간이다. 잘 할 필요도 없고 실수를 아무리 많이 해도 상관없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어젯밤 12시부로 나의 공식적인 시험 기간이 끝났다. 하지만 완전히 끝났다고는 할 수 없다. 유난히 몸과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던 일주일이었다. 동영상 과제였던 마지막 기말시험을 마감 2분 전 메일로 보내고 멍하니 이를 닦는 거울 속의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핸드폰이 고장 나서 동영상 끝 부분 10초 정도가 잘렸다. 이젠 그냥 어쩔 수 없지 싶다. 이제는 전처럼 시험 끝났다고 와아- 하는 기분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나이를 체감한다. 내일 볼 시험이 없다는 것이 크게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면이 폭풍 전야같이 고요하다. 나는 이런 내 모습이 불안하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피곤한데도 오히려 잠이 깨는 기분이다. 아까의 대화를 곱씹어보다 아차, 싶다.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나기 시작했다. 금방 멈추지 않을 것을 알기에 괜히 그 생각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안다. 나의 투덜거림은 의미가 없다는 것. 나도 잘 알지. 그래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면서도 너는 그렇게 답했던 걸까. 난 단지 수고했다고 위로받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아무나한테 이런 말 잘 안 하는 거 알잖아.


한편으로는 하고 싶은 말 그냥 해버리는 네가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한 말이어서, 7년째 친구인 네가 그래서 나는 좀 더 슬펐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함께 갔던 짜장면 집에서 갑자기 고였던 눈물 때문에 나는 탕수육을 얼른 집어서 입에 넣고 뜨거운 척을 했다.


네가 특별한 악의 없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또 특히 네가 나를 진짜 친구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너에 대한 나의 서운함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너를 편하게 만나기 어려워진다. 점점 솔직한 나를 드러내기가 무섭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가 않다. 네가 항상 말하는 그 전문직, 그 타이틀을 얻지 못하면 네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가까운 사람인 네가 나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며 앞으로 사회에 홀로 서게 될 때 나의 위치와 형편에 관하여 내게 쏟아질 눈초리와 손가락질은 얼마나 더할까라는 생각이 마음을 괴롭게 한다. 너의 말대로 좋은 인맥, 인정받는 직업, 훌륭한 성과, 높은 연봉이라는 기준을 충족한 사람이 되어야 나는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지, 세상은 내게 큰 관심 없다. 그건 둘째치고 저것들을 갖추면 너에게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느릿느릿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이 몇 시간 후 제법 노래 같은 멜로디를 치고 있는 걸 보니 뿌듯하고 재밌다. 그런데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 연습을 열심히 하면 피아노 실력은 반드시 늘게 된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노력하면 처음보다 더 잘하게 된다는 보장이 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노력한다고 되는 일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작에 마음 편하게 살았겠다.


아까 눈물이 한 방울씩 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펑펑 울었다. 이불속 꼭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난다. 친구의 말이 심지에 불을 붙인 것은 사실이나 그와 별개로 나는 며칠 전부터 이렇게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번 그렇게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정신줄을 놓기엔 지금이 너무 중요한 시기였기에 억지로 어떻게든 버텼다.


비록 이제 겨우 스물몇 해 살았지만 인생은 이렇게 피아노처럼 똑같은 것을 몇 번을 반복해서 치고 또 쳐서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지나간 것은 그대로 지나버렸다. 물론 순간순간 많은 것을 배웠고, 실수를 줄여나가는 것은 가능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되감기는 불가능했다.


인생은 코 앞도 예상하기 힘든 것이어서 재밌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것도 사실 살만하니까 하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은 예상할 수 없고 연습할 수 없기에 더 매력적인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고 웃는 날도 있고 우는 날도 있다는 건 어쩌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는 그 말이 정말 맞다.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면 매 순간 모든 일이 하나도 그냥 왔다 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실수하는 것이 겁이 나는 어리숙한 나


오늘만이라도 인생이 피아노처럼 연습만 많이 하면 잘 살아지는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방구석에 웅크린 채로 한없이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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