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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Mar 23. 2018

곱슬머리의 비애


곱슬머리의 비애.

적어도 일 년에 두 번은 매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긴 얼굴형을 가진 나에게 머리 뿌리 볼륨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에, 머리가 다시 제각기 뻗어 나오는 시기가 되면 은근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매직을 하고 난 뒤 거울 속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머리가 흡사 마치 비에 맞은 생쥐처럼 착 가라앉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최대한 참아보고 있다. 미용실을 간지 1년을 살짝 넘어간다. 그동안 끝머리는 집에서 조금씩 손질을 해주었고, 비가 오거나 머리를 완전히 말리지 않고 자서 더욱 곱슬거리는 날에는 고데기로 조금씩 펴가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내일 아침에는 또 어떤 머리 스타일이 나올지 오늘 밤에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예 빠글빠글한 머리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그건 나의 소박한 꿈이었다. 요즘은 히피펌이라고 하던데. 아주아주 곱슬거리게 해서 오른쪽으로 머리를 튕기면 그쪽으로 휙, 왼쪽으로 하면 그쪽으로 휙, 넘어가는 머리. 나는 왜인지 이 머리를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시도하지 않으냐고? 취직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도 많지만 내가 일하게 된 곳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보수적인 회사이다. 이 생각을 하면 나는 꼭 아수라 백작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내면에서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난히 보수적인 분위기의 지금의 회사에 잘 적응하고 있다.


원래 이럴 수 있는 건가? 근 몇 년 간 유럽 살이, 두 차례의 중남미 생활까지, 호기심이 많아 그렇게 안 경험해보고 안 나가고는 못 배기던 나인데 이 곳에 적응해서 벌써 한 달을 채워가는 것을 보면 나는 어쩌면 적당한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글쎄. 확실히 지금까지 지내왔던 시간들에 비하면 평화롭긴 하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사무실에 개인적인 분위기. 어쩌면 부수적으로 신경 쓸 것이 많이 없어서 좋다. 실적 스트레스가 없다는 점도 생각보다 큰 메리트인 것 같고.


단지, 내가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 직업 자체는 참 안정적이고 잔잔한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똑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생각을 하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나뿐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은, 이제 손에 잡히는 현실로 느껴진다. 누구나 마음 한편에 다른 길을 생각하면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걸까? 가고 싶은 다른 길 앞에서 주저하다 일단 눈 앞에 닥친 여러 조건들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다시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계속 이상을 추구하며 아직 나조차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다른 길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철없는 행동일까.



오늘도 나의 곱슬머리는 삐죽 튀어나와있다. 깔끔하게 보이려 항상 질끈 묶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누가 봐도 나는 반곱슬이다. 내가 언제까지 이를 감출 수 있을까. 다시 매직을 해서 머리를 피면 될까. 6개월 뒤 또다시 스멀스멀 곱슬끼가 올라오려고 하면 또 매직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나도 정갈한 생머리를 가질 수 있게 될까 아니면 평생 억누르며 곱슬머리로 살아야 할까.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게 되는 나는 세련되고 네모반듯한 건물에 빼꼼히 열린 작은 창문 하나. 이 건물에서 유일한 곱슬머리는 나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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