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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Aug 09. 2020

자신도 모르게 결례를 범한 기억을 서술해보시오.

 자신도 모르게 결례를 범한 기억을 서술해보시오, 라는 문제가 있다면 나는 불명예스러운 일등을 차지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질문을 살면서 받아볼 경험도, 할 경험도 거의 없지만 마침 그 문제에 적합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 약 7년 전의 일기장을 우연히 훑다가 다시 떠올려 버리고야 말았다.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을.


 스물한 살 남미의 어떤 학교에서 일할 때 나는 필리핀에서 온 다른 자원봉사자 언니와 함께 학교 다락방에서 지냈다. 우리가 했던 수많은 자잘하고도 그런데 또 하는 사람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 그런 일들 가운데 한 가지는 매점 일이었다. 학교 앞마당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공간은 학생들한테는 매점 가판대이자 언니와 나의 부엌이자 식사 장소이자 중간중간 숨어서 잠시 숨을 돌리는 곳이었다. 학생들은 아침반, 오후반으로 나눠져 있었고 중간에 간식 타임이 필수적으로 있었다. 아이들은 집에서 간식을 싸오기도 했지만 매점에서 사 먹는 수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인기 있었던 메뉴는 단연코 언니와 내가 아침마다 만드는 소시지 빵과 햄치즈 빵이었다. 말 그대로 빵 사이에 소시지 하나 혹은 얇은 햄과 치즈 한 장이 들어가는 간단한 간식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걸 준비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주방에서 아침 일곱 시 경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소시지 40개 정도를 삶고 치즈와 햄을 썰었다.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에 손바닥만 한 창이 있는 주방에서 우리는 찜 쪄지는 두 개의 귀여운 만두가 된 기분이 들곤 했다(나는 귀엽다는 말을 애정이 있는 존재에 습관적으로 넣는 사람이었고 언니는 이 경우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냄비는 충분히 큰 것이 없어서 보통 열 개 정도를 넣으면 꽉 차 버렸다. 소시지를 물에 넣기 전 한가운데를 칼로 긋는 작업도 추가해서 안 쪽까지 골고루 잘 익혀지도록 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물을 끓이고 빵을 가르고 뜨거운 김이 나는 소시지를 집게로 집어 그 사이에 넣는 작업을 네 번 정도 반복했는데, 분업화가 꽤나 잘된 모습으로 해내었다. 냄새가 끝내줬다. 특히 파라과이에 있는 독일인 마을에서 생산되는 소시지가 들어온 날은 막 익은 소시지 빵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을 정도다. 햄치즈 빵은 수요가 덜하였기에 열다섯 개 정도만 준비하였다. 이 모든 작업은 보통 30분 이내로 이루어졌다.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여서 학생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만들어야 하는 개수가 적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빵이 필수적으로 아침 일곱 시 전에 학교에 도착해야 했다. 보통은 거래처 빵집 아저씨의 키 큰 아들이 배달을 하는데 가끔 그 친구가 지각을 하거나 깜빡하여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언니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엔 나보다 스페인어를 잘하는 언니가 흙길을 몇 블록 뛰어가 자기 몸 만한 커다란 비닐에 담긴 빵들을 구름처럼 들고 돌아오기도 했다. 마치 잔다르크가 깃발을 든 모습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오는 언니의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리에게 빵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진지해져야 하나 생각하며 킬킬 웃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이었다. 빵이 또 늦었고, 언니는 몸이 안 좋았다. 이제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휴대폰이 없었기에 언니가 어떤 초콜릿 박스 종이 포장을 북 찢어 그려준 지도 한 장을 가지고 처음으로 빵을 찾으러 길을 나서게 되었다. 학교가 있던 동네는 안전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안전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아이들이 등굣길에 강도에게 휴대폰을 뺏기곤 했다. 조금 겁이 났지만 그곳에서 문자 그대로 거의 무소유로 살았기 때문에(휴대폰도 없고 지갑도 없었고 다락방에서 절대 가지고 내려오지 않는 노트북 하나, 그리고 목숨 같은 mp3 하나만 있었다) 뺏길 것도 없었다.


 길은 흙길과 약간 포장된 도로 그 어디 중간쯤이었고 벽에 있는 빨간 페인트의 그라피티들이 위험스럽게 느껴졌지만 아무튼 빵집이라고 써진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빵집 아저씨가 거주하는 집과 빵을 만드는 곳이 함께 있는 집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앞마당에는 사람들, 특히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처음에는 여기가 요즘 핫한 빵집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당에 발을 들여놓으며 작게 인사를 하니 다들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아래 위로 살짝 흔드시는 것이었다. 어떤 분들은 손을 본인 가슴에 올려놓으며 '너도 왔구나'하는 미소를 짓기도 하셨다. 평소 파라과이 사람들의 격한 인사나 아예 반대로 차가운 냉대만 경험했던 터라 이때 뭔가 이상하다고 확실히 느꼈다. 빵만 빨리 찾아서 가자,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는 싫은 소리를 더더욱 어려워했는데 요즘 들어 자꾸 늦는 빵 배달에 대해 한 번 언급하라고 오라는 언니의 명을 받았으므로 불평을 조금 해야지, 마음을 단단히 먹은 터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아저씨의 모습에 간단한 인사와 함께 찾아온 용건을 서둘러 뱉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늘도 빵이 늦어서 찾으러 왔어요.

'오늘도'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서 말했던 것 같다.

아, 나는 이 순간을 가장 후회한다.

이다음에 아저씨의 대답을 듣고 나서 나눴던 대화는 거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안녕, 미안해. 그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아저씨는 내가 서 있는 왼쪽을 손짓으로 가리키셨다.

오 마이 갓.


 50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저씨의 어머니가 깨끗하고 새하얀 모습으로 관 속에 누워계셨다. 그 안과 양 옆에는 아름다운 꽃 장식이 있었다.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이 세상을 떠난 이의 모습이었다.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나도 느낄 수가 있었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아저씨를 보며 죄송하다고, 몰랐다고 말씀드렸다. 스페인어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가 제발 떠오르기를 온 맘을 다해 빌었으나 애초에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떠듬떠듬 훨씬 더 좋은 곳 가셨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 문화권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빨리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


 다행히 뜻은 잘 전해진 모양이었다. 오히려 아저씨가 웃으며 와줘서 고맙다고 어머니는 행복하게 가셨다고, 빵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훌레 훌레 젓다가 계속 미안하다고 하다가 다시 한번 인사하고 도망치듯 마당으로 나왔다. 아직도 그곳에 계셨던 아주머니들이 꼬레아나(한국 여자)도 왔다, 저기 학교에서 일하는 꼬레아나 인 것 같다, 여기까지 와주니 고맙네 등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들렸으나 온 몸에 힘이 빠져 희미한 아디오스를 남기고 문턱을 재빨리 넘었다.

 

 스물한 살이었던 나는 내가 범한 엄청난 결례와 처음 경험한 그 어떤 생경함 사이의 충격에서 벗어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릴 뻔하였으나 며칠 후 다시 쾌활한 모습으로 빵 배달을 온 빵집 가족의 모습에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빵 집 할머니는 어쩌면 사는 동안 외국인과 말 한마디 해본 적 없으실 수도 있다. 나는 할머니가 어떤 인생을 사셨는지 단 한 문장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내가 어느 골목 빵 집 할머니를 위해 애도하고 기도했다. 언제 어디에 태어나는지에 따라 내가 그 할머니가 될 수도 있었고 그 할머니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한국 사람, 파라과이 사람이기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도 언젠가는 아이였을 것이고 빛나는 젊음이 있었을 것이며 수많은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웃고 울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왜인지 그녀의 별이 떨어질 때 다른 별들이 태어났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별들도 할머니와 나와 별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이 애잔하면서도 꽉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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