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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Sep 08. 2020

누군가의 옆모습을 떠올릴 수 있나요


 학교에는 학생들이 마음대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공간이 두 군데 있었다. 한 곳은 음악실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학교 캠퍼스 안에 있던 방갈로였다. 그곳은 원래 오리 고기였나 돼지고기 음식점이었는데 학교가 생기면서 몇 년 전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고 했다. 나무로 지어진 그 방갈로는 꽤나 커서 내부에는 예전에 손님들이 좋아했을 법한 작은 인공 연못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제는 메말라버린 그 인공 호수 옆의 작은 공간에는 갈색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 있었다.


 학교에는 나를 포함해 취미로 피아노를 뚱땅거리는 학생들이 꽤 있었고 어느 때인가 갑자기 그가 방갈로에 나타났다. 그는 내가 실제로 본 사람 중에 피아노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이었다. 친다기보다는 마치 손가락이 나비처럼 피아노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방갈로의 나무 향을 맡으며 종종 그를 구경했고 그의 연주를 감상했고 감탄했다. 나보다 몇 학년 위였던 그는 머리카락이 밤톨 같기도 했고 햇빛이 비출 때는 갈색으로 빛나 가을의 갈대 같기도 했다. 연주를 하면서 짓는 표정은 가끔 너무 능글맞아서 장난스레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가 피아노를 너무나도 잘 쳤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쉽게 용서되었다.


 그가 가장 잘 치던 그 곡의 이름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만 여기서 밝히고 싶지는 않은데, 무척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그가 우연히 브런치의 독자여서 또 우연히 피아노를 검색해서 또 우연하게도 이 글을 클릭하였는데 이 곡의 이름까지 딱 떨어지면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나의 소심한 마음 때문이다. 또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그렇게 된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어느 날부터 나를 좋아했다. 학생의 연애가 왜인지 죄스럽게 느껴질 만큼 순수하고도 어렸던 그 시절의 나는 한편으로는 마음이 간지러우면서도 그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점점 꺼려졌다. 다행히 그도 한 발자국 멀리서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다. 이후에는 가끔 싸이월드에 비밀방명록을 남기는 것으로 관심을 표했고, 나도 그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피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는 날들을 지나서 시험기간이었던 어느 날 도서관이었다. 문제집을 잔뜩 쌓아놓고 문제를 풀고 있었는데 그가 커다란 검정 가방을 메고 갑자기 도서관으로 찾아왔다. 그러더니 옆자리에 털썩 앉아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널 찾아다녔어. 정말 잠시라도 좋으니 잠깐만 밖에서 얘기 좀 하자.


 칸막이가 있는 책상도 아닌데 주변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 상황에서 평소에는 멀리서만 있다가 지금 갑자기 왜 이러나 영문도 모르겠고 그냥 나중에 얘기하자고 해도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뜬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태도가 점점 더 단호해졌다.


제발 잠깐만, 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끝끝내 제발 가주세요,라고 했다.

그는 결국 그 커다란 가방을 다시 메고 도서관을 떠났다. 쓸쓸한 뒷모습을 미안한 마음으로 슬쩍 훔쳐보면서도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는 그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학을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도서관에 왔던 것이 학교에서 떠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러면 마지막 날이라고 말을 하지, 작별인사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서 마음이 한동안 울렁거렸다. 그 일이 상처가 되었던지 싸이월드에서도 일촌이 끊기고 연락도 끊겼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나 좋아했던 마음이 나의 것은 아니었기에 그 날의 기억도, 미안한 마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각보다 빨리 담담해졌다.


 성인이 된 후에 갑자기 생각난 그의 이름을 구글에 쳐본 적이 있다. 피아니스트 땡땡땡 해서. 왠지 나는 그가 피아니스트가 꼭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느 해외 신문에 작게 실린 그의 얼굴을, 나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그의 옆모습이었다. 열심히 검색해서 그의 앞모습이 나온 사진도 발견했다. 오히려 그 사진에서는 그가 낯설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항상 그의 옆모습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옆모습. 우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때는 항상 나도 모르게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발끝이라던가 왼쪽 밑 어딘가라던가. 내가 항상 오래 바라본 것은 그의 옆모습이었다. 으으 뭐야! 소리가 웃음과 함께 절로 나오던 그 능글거리는 표정과 미소 짓고 있던 입매와 살짝 아래를 보는 시선이 내게 남아있는 그의 잔상이었다.


 그가 마지막 작별인사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알 것 같다. 그래서 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시절의 그에게 미안해진다. 어린 마음에 최선을 다해 용기를 쥐어짜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이미 그에게는 성에가 낀 유리창처럼 뿌예졌을 것이지만 만약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아,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백번이고 그를 따라 나가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며 어색하지만 우정 어린 손인사를 나누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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