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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Sep 12. 2020

열다섯 살의 따돌림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된 애매한 나이의 아이들은 가끔 자주 증오의 대상을 바꿔치기했다. 우리는 때때로 마음속에 끊임없이 생성되는 물음표들과 혼란으로 길을 헤매었다. 지난주는 네가 이번 주는 내가 다음 주는 또 어떨지 가끔은 전조를 보고 희생양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마치 올해 여름날의 일기예보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렵기도 했다. 이제 완전히 아이 티는 벗었지만 소년, 소녀라고 하기에도 살짝 모자란 키 작은 열다섯 살들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만큼 누군가에게는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하루는 학교에서 여름에 다 같이 카누를 타는 액티비티에 참여했다. 그 당시 나에게 꽤나 날 선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그 아이는 나를 자주 째려보다가 웃었고 그러면 나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졌다. 나도 마주 보고 웃어야 할지 내가 웃으면 그 아이가 화가 날지 안 웃으면 서운해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O형의 수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교적 차분하고 소심했던 내 성격이 그녀가 나를 그렇게 대했던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았다. 요즘 MBTI가 유행하는 것처럼 그때는 혈액형별 성격 테스트가 매우 인기 있었는데 O형은 본래 '쿨-'한 성격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에 비해 안타깝게도 그녀의 눈에는 '쿨-'하지 못했던 내가 O형인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나는 내 존재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카누를 타던 날도 그 아슬아슬한 불편함 속에 살던 날 중에 하나였다. 카누 선생님은 카누에 탄 채로 옆 사람과 손을 잡게 만들었고 그래서 8대 정도 되는 우리의 카누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길러준다는 명목 하에 한 명씩 카누 앞 코를 밟고 왔다 갔다 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서로 손만 꼭 잡고 있는다면 카누가 흔들리지 않아서 안전하게 왕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한껏 즐거워 보이셨다. 그에 반해 나는 갑작스럽게 생긴 새로운 액티비티가 이유 모르게 당황스러웠다.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나의 차례가 되어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내밀고 있을 때 갑자기 밟고 있던 카누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키득대는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힘없이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빠지기 직전 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엄청난 무력감이 들었다. 구명조끼 덕에 금방 불쑥 나오긴 했지만 그대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날도 아니고 그다음 날도 아니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그 날의 진실을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몇 명의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나를 카누에서 떨어뜨리려고 일부러 내 차례에 카누를 앞뒤로 흔들었다고 했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는데, 이는 사람을 물에 빠뜨린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것처럼 상당히 과장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나를 죽이려는 의도가 결코 아니었겠지만(구명조끼도 있고 선생님도 같이 계셨고 걱정할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그 컴컴한 물속으로 누군가를 떨어뜨리려는 발상 자체가 내게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섭게 느껴졌다.


 차라리 몰랐으면 모른 채로 지냈을 텐데 알고 난 뒤에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저 애는 나를 그 캄캄한 물속으로 끌어내려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 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물을 잔뜩 먹은 종이 더미처럼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때 그녀와 대면했어도 분명 장난이었다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고 두려웠고 불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칼날이 부메랑처럼 이번엔 그녀에게로 향하는 날이 왔다. 그런데 나는 그런 날이 마침내 왔음에도 그 자리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되짚는 것도, 내 마음을 설명하는 것도, 심지어 화를 내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그냥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동안의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내게서 도려내버리고 싶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오래 가졌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아, 이 말은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어. 했으면 안 됐어. 그 행동은 그녀가 짜증 냈을 만 해. 그래서 친구들이랑 욕했을 만 해. 내가 잘못했어.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 원인을 도무지 모르겠을 때에도 스스로에게서 뭔가 꼬투리를 잡았고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했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불친절했든지 짜증을 냈든지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했든지 우리 둘이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녀에게는 나를 인격적으로 무시할 권리가 없었다. 반복적으로 날 소외시키고 O형의 수치라고 말할 권리도, 그 캄캄한 물속으로 떨어뜨릴 권리도, 그녀에게는 애초에 없는 것이었다.


 한참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선생님께서 친목도모를 위해 <걸스데이>이라는 작은 모임을 기획하신 적이 있었다. 좋은 의도였지만 내게는 매우 끔찍한 날로 기억되는데 그건 입을 따로 맞춘 그녀를 비롯한 몇몇의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까임을 당하는 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셔서 분위기 자체는 차분하게 유지되긴 했지만 그들이 한 얘기 중 억울한 것들이 너무 많아 자꾸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최선을 다해 참았다. 내게는 울음이 나오려고 하면 입을 꾹 닫아버리는 습관이 그때부터 있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걸스데이>는 그냥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무엇인가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그 날 야속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오래도록 선생님을 향했다. 선생님, 마무리를 해주셔야죠. 이렇게 끝내시면 어떡해요. 걸스 클럽은 끝났지만 저는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 한단 말이에요. 제게는 이런 모임이 필요치 않았어요.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주세요. 중재 좀 해 주세요. 무슨 말이라도 해주세요. 제발.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 중 하나가 '망각'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어느 정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단 몇 달 동안 있던 일이고 또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꽤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당시 곁에 계속 있어주었던 친구들과 그 이후에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책들을 통해 나는 나를 너무 탓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배웠다.


 나의 안부는 그 누구보다 내가 물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내 편에 서야 했다. 아무리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해도 그래서 가끔은 나 조차도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그래도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아무도 내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아도 나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믿기 편한 거짓말에 속는 척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워도 깊숙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너의 진심을 알아, 하고 안아줘야 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 눈물이 났다. 누군가가 미우거나 억울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아픈 마음을 붙잡고 살아야 했던 그 어린 날의 나를 다시 한번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아이를 만나 온몸으로 껴안는 상상을 한다. 너보다 열 살은 넘게 먹은 내가 말해줄게. 너는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거야. 그 사랑을 많이 나누는 사람이 될 거야. 넌 진짜 진짜 많이 웃을 거야. 내가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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