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스타프 홀스트, 우리에게 <행성 모음곡(The Planets)>을 선사한 바로 그 영국 작곡가입니다. 홀스트는 그 작품 하나로 그야말로 '스타'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행성> 이라는 초대형 히트작 덕분에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이후의 작품들은 의외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 찬가(The Hymn of Jesus)>는 규모나 내용, 완성도 면에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행성>을 완성한 홀스트가 차기작으로 택한 <예수 찬가>는 전혀 다른 궤도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 곡을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아예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홀스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오르간을 배우며 종교 음악과 친하게 지냈고, 훗날에는 친구이자 동료 작곡가인 레이프 본 윌리엄스와 함께 영국 찬송가집(English Hymnal)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홀스트의 머릿속에 찬송가 선율을 차곡차곡 쌓아주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홀스트가 독실한 신자였느냐? 그렇진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그와 종교의 관계는 신비주의의 틀 안에서 정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종교는 엄숙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그저 신비로운 경험,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깊은 세계와의 교감 같은 느낌이었을 겁니다. 덕분에 그는 ‘신앙인’이 아니라 ‘관찰자’로서 종교 음악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홀스트가 특별히 흥미를 느낀 건 종교와 춤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춤의 기원이 원시 종교의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믿었는데, 아마 신지학자 조지 로버트 미드(G.R.S. Mead)의 1907년 저서 <예수 찬가(The Hymn of Jesus)>를 보고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겁니다. 이 미드라는 분도 꽤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점성술과 신지학 양쪽에서 활약했고, 심지어 칼 융도 그의 저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니 말이죠.
홀스트는 그 해 11월 몰리 칼리지에서 현대 음악의 기원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종교에서의 춤의 기원을 언급했는데, 이게 참 생소한 개념이라 일부는 흥미로워했지만 어느 일부는 불쾌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예로 훗날 본 윌리엄스는 <예수 찬가>의 리허설 현장에서 일부 합창단 단원들이 기독교에서 춤을 추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면 모든 합창단이 "I am mind of all (나는 만물의 지성이니라)!"이라 외치며 빛이 쏟아지는 듯 황홀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이들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고통받는지를 알고, 이해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노시스(Gnosis, 영지)'는 그리스어로 '지식'을 뜻합니다. 이 지식이란 단순한 정보라기보다는 신비롭고 내면적인 깨달음, 즉 영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영적인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예수는 '가르치는 자'로서 이 영적 진리를 전하러 온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본디 <예수 찬가(The Hymn of Jesus)>는 루키우스(Leucius)라는 인물이 수집한 "요한행전(Acts of John)"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루키우스는 작가라기보다는 편집자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2세기 중반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요한행전은 사도 요한의 활동과 전도 여정을 담은 영지주의 계열의 이야기체 문서입니다. 요한행전이 요한복음을 인용했는지에 대한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지요.
그리고 이 요한 행전에 포함된 <예수 찬가>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춤을 추며 부르는 신비의 찬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찬송하는 노래"가 아니라 "예수가 부르는 찬가"인 겁니다. 그렇기에 따지고 보면 제목인 Hymn of Jesus는 "예수 찬가"가 아니라 "예수의 찬가"라고 불러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 곡에 대한 인지도가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나라에서는 영문 제목을 기계적으로 번역해 "예수 찬가"라고 부르며 홀스트의 작품 목록에 집어넣고 있는 듯합니다.
어쨌든 이 요한행전은 영지주의적 색채가 너무 짙어 보편 교회의 교리 체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외경(外經)이자 이단 문헌으로 분류되어 공식 성경 목록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홀스트가 이 희한한 찬송가의 텍스트를 처음 접했을 당시만 해도 영지주의 교리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관련 문헌이 출판된 경우도 드물었고, 설령 출판되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정통 교회로부터 외경으로 취급받았지요. 앞서 언급한 신지학자 조지 로버트 미드(G.R.S. Mead)는 이러한 영지주의 문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복원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손에 넣은 이 ‘이단 문서'의 사본을 홀스트에게 건넸습니다. 기성 교회의 왜곡된 영향에서 벗어난, 아주 오래된 고문헌. 아마도 이것은 과거 홀스트가 리그 베다 경전에 보였던 관심과 비슷한 방식으로 그의 이목을 끌었을 것입니다.
저도 도대체 이게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미드가 쓴 글을 직접 읽어 보았습니다. 미드에 따르면 <예수의 찬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찬송가가 아니라 아마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혹은 기독교 이전의 신비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원을 이루고 춤을 추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이러한 신비로운 장면들이 고대 신비 의례의 유산이자, 영혼의 "합일"의 실천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미스테리한 종교 의식은 홀스트의 탁월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통해 음악 속에서 새롭게 생명을 얻었습니다.
때는 1917년 상반기였습니다. 홀스트는 세인트 폴 여학교와 몰리 칼리지를 오가며 강의를 하는 틈틈이 <예수의 찬가>의 작곡을 이어나갔습니다. 문제는 원문이 고대 그리스어라는 점. 그는 그리스어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건실한 홀스트는 그런 걸로 포기할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원문의 단어 하나하나마다 발음과 그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를 꼼꼼히 적은 후, 이 과정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본인만의 번역본을 만들어나갔습니다. <행성> 작곡에 단초를 제공했던 점성술 애호가 클리포드 백스도 그를 도왔습니다. 참고로, 옛날에 리그 베다의 텍스트에 관심이 생겼을 때도 작곡가 본인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사전을 뒤적거려가며 직접 번역했습니다. 이쯤 되면 “작곡가 겸 언어 연구가”라는 타이틀이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홀스트의 번역은 미드의 출판본과는 상당히 달랐고, 더욱 직설적이며 리드미컬했습니다.
여름 학기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작곡에 몰두하기 시작한 홀스트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총 세 그룹의 합창단을 꾸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두 그룹의 혼성 합창단과 작은 규모의 여성 합창단 하나였죠. 그는 두 그룹의 합창단이 부르는 거대한 화음과 묘하면서도 아름다운 불협화음을 활용하여 (그리고 때로는 노래가 아닌 "말하기"를 통해서) 종교 의식의 강렬한 몰입감을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여성 소규모 합창단의 경우 "아멘" 이라는 단어를 구절 사이사이에 반복하며 힘을 실어주거나, 분위기를 환기시키도록 설계하였습니다. 홀스트는 <예수의 찬가>가 자신이 지금까지 쓴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역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직 1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아 공연을 준비할 수 있는 인원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이 곡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투명해보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난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계속 입대를 거절당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좌절해 있던 홀스트는 YMCA에서 음악 간사로 일하는 건 어떻냐는 제안을 받고 살로니카로 떠나게 됩니다.
191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지내던 홀스트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수의 찬가>가 카네기 영국 신탁이 주관한 작곡 공모전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었죠. 64개 출품작 중 5위 안에 든 것입니다. 심사위원단은 “영국 합창 음악사에서 주목할 만한 신작. 구상에서 작곡까지 놀라운 독창성을 지니며, 신비주의와 가사의 힘을 놀라울 정도로 잘 살린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Stainer & Bell에서 출판되었고, 1923년까지 무려 8,500부나 팔렸다고 하니, 합창곡 치고는 상당히 큰 인기였습니다.
초연은 1920년 봄, 전쟁이 끝난 뒤 그가 텍스테드로 돌아온 후 이루어졌습니다. 영국 왕립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린 수업에서 ‘선공개’를 한 뒤, 3월 25일 퀸즈홀에서 공식 초연이 열렸습니다. 지휘도 감독도 전부 홀스트 본인이 맡았죠. 이 곡을 헌정받은 본 윌리엄스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껴안고 술에 취하고 싶었다."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감격했습니다.
초연 현장에 있던 다른 청중들도 열광적으로 화답하며 앵콜을 외쳤습니다. 초연에 참여했던 한 학생은 "왕립 음악 대학에서 가장 먼저 열렸던 몇 번의 리허설에 참석했던 것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직 어렸고 우리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줄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있었던 우리에게, 이렇게나 참신한 표현력을 보이면서도 그 뿌리는 영국 합창 음악에 깊이 박혀있는 이 작품은 처음엔 충격으로, 그 다음은 어떠한 계시로 다가왔다." 고 말하며, <예수의 찬가>가 "영국 작곡가가 전 세계 음악 문화 전반에 기여할 권리가 있음을 입증해 보인 작품" 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홀스트는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감상적인 오라토리오를 버리고, 이를테면 존 태버너가 1970년대에 쓰게 될 수준의 선구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레이먼드 헤드의 말입니다.
음악학자 도널드 토비는 한 술 더 떠서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좋아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죠.
유수의 음악 잡지를 비롯하여 여러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예수의 찬가>는 초연 이후에도 인기를 누리며 향후 몇 년간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행성>과 함께 홀스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또 다른 작품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배경 설명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전주곡과 찬송가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함께 살펴보며 들어보시죠!
전주곡의 소재는 수난 주간에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평성가, Vexilla Regis Prodeunt와 Pange Lingua Gloriosi Proelium Certaminis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두 개의 곡은 그의 스승이었던 W. S. Hoyte의 찬송가집에도 등장하며, 후대에 평성가를 대중화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레이프 본 윌리엄스와 홀스트를 포함한 편집자들이 집필했던 1906년판의 <영국 찬송가집(English Hymnal)>에 수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홀스트는 English Hymnal에 실린 영어 번역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6세기에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 주교가 쓴 라틴어 버전을 참고했습니다. 전주곡의 초반부에는 트롬본이 부드러운 음색으로 Pange Lingua를 읊습니다. 악보 하단을 보면 연주자들에게 지시 사항이 있는데 역시 작곡가 본인이 전직 트롬보니스트라 그런지 유독 트롬본 연주자들에게 깐깐하게 구는(...) 느낌입니다. 이어지는 Senza Misura(박자 없이 자유롭게) 파트에 들어서면 오르간의 페달과 저음현으로 연주되는 Vexilla Regis의 선율을 들을 수 있습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제시된 소재를 성악적으로 실현한 부분입니다. 신비스러운 오케스트라 반주 위로 고음의 합창단이 라틴어 원문으로 Vexilla Regis를 노래하며 영원의 일부를 엿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곧 오케스트라가 갑작스럽게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삐걱대는 듯 교차되는 화음이 우리를 시련의 세계로 이끕니다. 홀스트는 서로 다른 두 화음이 교차하는 모티프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행성 모음곡> 중 "금성", "토성" 에서도 드러나며 그 전에는 "신비의 트럼페터", "장송곡과 축혼가(Dirge and Hymneal)" 같은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 학자는 이 대목이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암시하는 모티브와 매우 비슷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홀스트가 바그너의 음악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설득력이 있는 해석 같습니다. 암포르타스는 죄를 지은 대가로 아무리 신의 은총을 구해도 상처가 아물지 않는 비운의 왕인데, 이를 1차 세계대전 당시 인류가 겪던 집단적인 고통과 절망에 비추어 본다면 꽤 의미심장한 비유처럼 다가오지요.
이제 저 멀리서 테너와 베이스 합창단이 Pange Lingua를 낭송합니다. "나의 혀여, 노래하라, 영광스러운 전투를. 싸움의 끝을 노래하라." 음악은 G단조에서 C장조로 바뀌며 곧이어 다가올 찬가를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에워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멘이라 화답하여라" 라고 알려주시며 찬송가를 부르셨습니다. 이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 있으라!" 라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아멘이라 답하였습니다.
- 예수의 찬가 中
이제부터 본격적인 찬가가 시작됩니다. 두 혼성 합창단이 하나로 뭉쳐 "영광 있으라, 아버지여! 영광 있으라, 말씀(로고스)이여!" 이라 외칩니다. 포르티시모의 강렬한 합창과 천천히 걷는 것처럼 저음역대에서 하행하는 반주가 돋보입니다. 각 선언을 마친 후에는 여성 합창단이 "아멘"이라 화답합니다.
이어 "영광 있으라, 성령이여!" 라고 말하는 부분을 홀스트가 음악으로 풀어낸 방식은 놀라울 만큼 독창적입니다. 그는 합창단에게 노래하지 말고 마치 말하는 듯이 낭송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마치 원형으로 둘러선 제자들이 저마다의 내밀한 기도를 올리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곧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각 파트가 하나씩 합류하며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이룹니다. 홀스트의 간결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번역으로 구현된 가사와 두 그룹으로 나뉜 합창단의 교차적인 움직임이 빛을 발하는, 실로 압도적인 순간입니다.
여기서도 두 그룹으로 나뉜 합창단이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한 합창단이 Fain would I be saved(구원받고자 한다)고 노래하면 다른 합창단은 Fain would I save (구원하고자 한다)라 응답합니다. 이러한 패턴이 한동안 반복되며 교차되듯 이어집니다.
이들의 간청은 점점 더 고조되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합창단 전원이 "I am mind of all (나는 만물의 지성이니라)!"이라 외치며 황홀한 절정에 이릅니다.
곧이어 "Fain would I be known"이라는 가사와 함께 팡파르가 울리며 음악은 축제 분위기로 전환됩니다. 우리는 내면적 계시의 안내자이자, 살아 있는 지성인 로고스를 따릅니다. 구원은 믿음이나 공로가 아니라 지식에서 비롯되며, 세속적 무지로부터 벗어난 우리는 이제 이어지는 Dance를 통해 진리로 나아가는 기쁨을 여과 없이 표현하지요.
작품의 중심부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곡에서는 흔치 않은 5/4박자로 경쾌하게 진행되는데, 작곡가가 예전에 <리그 베다 찬가> 두 번째 그룹의 "아그니" 에서 썼던 것과 느낌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홀스트의 창의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원문에는 "신성한 은총이 춤을 이끈다"라는 간결한 문구가 적혀 있을 뿐이지만, 그는 합창단의 각 파트로 하여금 "신성한 은총이 춤을 추신다" 라는 말을 번갈아 노래하게 함으로써 음악에 생동감과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The Heavenly spheres make music for us (천상의 세계가 우리를 위해 음악을 연주한다)"
→ 미드는 이 부분은 "팔(8)이 우리와 함께 연주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숫자 8은 그리스어로 Ogdoad인데, 영지주의 우주론에서 Ogdoad는 육체적 세계(하부의 7층 하늘)을 넘어서 제 8의 하늘로 가는 영적 영역의 시작점입니다. 홀스트는 이 복잡한 개념에 대한 언급 없이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의역한 듯 하네요.
"The Holy Twelve dance with us (열둘이 우리와 함께 춤춘다)"
→ 미드에 따르면 열둘(12)은 로고스의 춤에 응답하는 사절단입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리듬을 이끄는 존재들이며, 현재 신성한 질서가 의식 속의 춤으로 내려와 구현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어 찬란하고 화려한 춤이 한 차례 펼쳐진 뒤,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는 핵심적인 가사가 등장합니다.
"Ye who dance not, know not what we are knowing (춤추지 않는 자들은 우리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 영혼은 반드시 춤추어야 합니다. 위대한 춤에 함께해야지만 진정한 영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죠. 참된 세계에 대한 앎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우주적 질서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며 행할 때 얻어진다는 것이 미드의 해석입니다.
다음과 같은 가사도 주목할 만 합니다.
"나는 나를 보는 이에게 등불이요,
나를 이해하는 이에게는 거울이며,
나를 두드리는 이에게는 문이며,
길 가는 이에게는 길이니라."
분위기가 잦아들면 서두에 나왔던 평성가 선율이 다시 등장하며 다음 대목으로 넘어갑니다.
초반에 <신비의 트럼페터>의 트럼펫 콜과 유사한 패시지와 함께 삐걱대며 교차되는 두 개의 화음이 나오는데, 이것은 <행성 모음곡> 중 "토성"에서 썼던 방식과도 매우 비슷합니다. 그 후 스네어드럼의 타주와 결합된 성가의 선율은 굉장한 포스를 자아내지요.
곧이어 Andante에 이르면 점진적인 고조 속에서 이 작품의 감정적, 신비적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이 펼쳐집니다.
"Ye could not know all What thing ye endure, Had not the Father sent me to you as a word,"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에게 말씀으로 보내지지 않았다면, 네가 고통 받는 것을 네가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니라.
"Beholding what I suffer, ye know me as the Sufferer,"
내가 고통받는 것을 보았을 때,
너는 나를 고통받는 자로 보았고,
"And when ye had beheld it, ye were not unmoved; But rather were ye whirled along,"
보면서도 너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전적으로 흔들렸으며,
"Ye were kindled to be wise."
너는 앎을 위해 불붙여졌다.
제자는 예수의 고통을 목격한 후 자신 안의 고통을 자각하고, 곧 로고스가 영혼 안에 들어가는 영적 점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인식이 탄생하는 서사를 함께 경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Had ye known how to suffer, ye would know how to suffer no more
(고통받는 법을 알라. 그리하면 고통받지 않을 수 있으리라)"
→ 고통의 초월은 고통의 자각을 통한 내면의 해방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처한 고난은 무의미한 고통이 아니라, 자각을 통하여 초월될 수 있는 통과의 길입니다.
로고스를 통해 내면의 깨달음을 얻은 제자에게 예수는 "Behold in me a couch; rest on me! (내 안에서 침상을 보라, 나를 너의 안식처로 삼아 쉬어라!)"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고통과 여정이 끝난 후, 인식이 쉬는 자리이며 영혼이 귀향하는 곳이겠지요.
이 찬가는 단순한 예배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는 하나의 참여 의례였습니다. 고난을 자각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고통은 해방을 향한 통로로 바뀐다 — 이는 종교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깊은 울림을 주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알고자 한다면, 나는 한마디로 말해 모든 것을 춤추게 한 말씀(로고스)이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노라. 내가 뛰었으며, 춤추었노라."
"그러니 너도 모든 것을 이해하라."
예수가 마지막 말을 마치자 제자들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흩어집니다. 의례는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묵상, 침묵, 그리고 영혼의 귀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나요? 이 모든 이야기가 허울 좋은 공상일 뿐일까요?
제가 굳이 첨언할 필요 없이, 위 영상의 6분 12초에 나오는 으스스하고 매혹적인 코드만 들어도 이 작품이 간직한 신비로움이 충분히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홀스트가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굳이 이런 신비로운 영지주의 문헌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는 것은 참으로 미스테리합니다.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며 그가 미드의 <예수의 찬가>를 거의 10년 만에 다시 들여다보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인류 문명이 총체적으로 파국을 겪었던 그 시절, 전쟁의 참화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던 걸까요?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찬가>가 전쟁이라는 커다란 비극에 대한 예술적·철학적 해답일 것이리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1916년 7월 시작된 솜 전투에서는 200만 명이 넘는 인명이 학살되었고, 그 중에는 홀스트의 친구도 있었습니다. 홀스트 본인도 참전하려 했지만 건강 문제로 입대가 거절되었지요. 그 와중에 친구 본 윌리엄스는 종군하였고 아내 이소벨은 구급차 운전사로 전장에 나섰습니다. 마을에 홀로 남겨진 그런 상황에서 나온 작품이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의 노래라는 점은 참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었기에 이토록 고통을 자초했을까? 우리는 고통을 겪는 자에서 고통을 이해하는 자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고민이 그의 음악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쉽게도 이 곡은 아직 한국 무대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한국어 해설 자료조차 찾아볼 수 없지요(이는 제가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훌륭한 작품이 더 많은 청중들에게 알려지고,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저평가된 클래식 작곡가들이 참 많지만, 특히 홀스트는 그 중에서도 재조명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