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스트,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름

홀스트 전기 시리즈를 시작하며

by 아이비




"홀스트? 그 사람은 '행성' 빼면 별로 유명한 곡 없잖아."




구스타브 홀스트는 영국의 대표 작곡가로 언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수식어는 엘가나 브리튼만큼 자주 등장하지 않는 듯하다. 그가 쓴 가장 유명한 작품인 <행성> 중 '목성'은 널리 연주되고 있고, 중간 멜로디는 이후 찬송가 "I Vow to Thee, My Country" 로 편곡되어 영국 애국주의의 상징으로까지 발전했지만 이 곡 외의 작품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도 낯설다는 반응이 많다.




홀스트 음악은 대체 왜 인기가 없을까?


<행성>의 인기와는 별개로, 구스타브 홀스트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인지도는 대중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그리 높지 않다. 그 이유 중 대부분은 그의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는 전통적인 형식이나 색채적 화려함에 안주하지 않고 말년으로 갈수록 실험적이고 명상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예컨대 <에그돈 히스(Egdon Heath)>의 경우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토머스 하디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매우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홀스트는 이 작품을 행성보다 더 나은 곡이라 여겼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홀스트는 지금도, 그 시대에도 좀처럼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에 띄고 싶지 않아 했다. 그는 매우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였고, 기록에 따르면 인터뷰나 연설도 꺼려했으며 교직이나 지휘 외의 자기 홍보 활동은 극도로 삼갔다고 한다. 같은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과 비교해보면 명확한 차이가 있다. 브리튼의 경우 자신의 예술관을 정치, 윤리 문제로까지 확장시키며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브리튼은 올드버러 페스티벌을 창설하고 큰 규모의 커미션도 다수 맡아서 해내며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 갔다. 이에 반하면 홀스트의 작품 하나하나는 그 근간이 되는 영국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철저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평생토록 본인에게 쏟아지는 조명 밖에서 교육자이자 작곡가로서 조용히 살았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기 어려운 요소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의 음악이 후대 영국의 음악 교육과 영화 음악 등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홀스트는 영화가 없던 시절부터 이미 영화 음악을 쓰고 있었다"는 댓글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놀랍도록 독창적인 세계


사실 홀스트는 오늘날 관악 밴드 레퍼토리에서 거의 창시자에 가까운 위상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군악대"라는 매체를 위해 따로 작곡된 '진지한' 음악이 없었고(대부분 대중음악이나 편곡된 음악이었다), 표준화된 악기 편성도 부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홀스트가 내놓은 <군악대를 위한 모음곡> E플랫장조와 F장조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의 군악대와 관악 밴드에서 꾸준히 연주되는 '고전'이자 표준 레퍼토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학생 시절 오케스트라에서 트롬본을 연주했던 홀스트는 그 경험을 토대로 훗날 자신의 작품에서 관악 오케스트레이션을 기가 막히게 해내곤 했으며, 그의 관현악 작법은 본 윌리엄스를 포함해 퍼시 그레인저, 말콤 아놀드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빌리 아일리시 "GOLDWING"



홀스트는 놀라울 정도로 이른 시기에 서구 중심을 넘어선 음악적 감수성을 건드린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관심을 보였던 주제 중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고대 인도의 경전도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해가면서까지 곡을 써냈다. 팝가수 빌리 아일리시의 곡에 샘플링된 적도 있는 <리그 베다 찬가(Choral Hymns from Rig Veda)>나 <사비트리(Savitri)>, <구름의 전령(The Cloud Messenger)> 같은 작품들이 그 예시이다.




형식보다 본질을 탐구하다


클래식을 낡은 예술로 보는 관점은 주로 외형적 요소 (긴 연주시간, 전통적 악기 구성, '고급' 언어)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그 베일을 걷어내면 우리는 음악이 다루는 인간 내면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과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홀스트는 기존 형식에 맞춘 곡을 다량으로 써내기보다는 인간과 삶과 죽음의 관계라던지 언어를 넘어선 진리, 자연과 풍경, 앎과 깨달음 같은 주제에 집착했다. 그가 자주 음악을 붙였던 힌두 경전이나 신비주의 텍스트, 영국 고전들을 보면 그가 예술로서의 음악을 뛰어넘는 무언가에 접근하려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그는 음악을 천국에 비유하곤 했다. 그의 작품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중심으로 모으는 힘이 있다. 소란한 시대에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명상과 힐링, 그리고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그 안에 흐른다.


내 소박한 글들이 홀스트를 오직 '<행성 모음곡>의 작곡가'로만 기억하는 시선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래본다. 다음 글부터는 조용하면서도 사람 냄새 나는 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따라가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