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 시골마을에서 왕립 음악원으로

<행성 너머의 홀스트> 1화

by 아이비





이야기의 시작은 19세기 초, 유럽의 경계선이 아직 불분명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스타브 홀스트의 증조부인 마티아스 홀스트는 우리가 흔히 지도에서 ‘유럽 동네 오른쪽 어딘가’쯤으로 뭉뚱그려 넘기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난 발트 독일인이었다. 당시 라트비아는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마티아스는 그곳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혈통은 독일계와 스웨덴계가 섞여 있었다. 발트 지역은 한때 스웨덴의 지배도 받았기에, 그의 스웨덴 혈통 역시 그 지역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었다.



러시아 제국 궁정에서 활동하며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일찍이 인정받은 마티아스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곧 러시아를 떠나야 했고, 이때 많은 유럽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했다. 런던에 정착한 그는 이민 1세대로서 하프를 위한 곡과 여러 극음악을 작곡하며 새로운 삶을 꾸려나갔다. 그의 아들 구스타부스 발렌타인 역시 아버지처럼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첼트넘에 눌러앉아 작곡도 하고 하프도 가르치며 그럭저럭 살던 그는 제자들을 좀 더 끌어모아보고자 본인의 이름 중간에 ‘폰(von)’이라는, 귀족 냄새를 솔솔 풍기는 독일식 호칭을 슬쩍 갖다붙이는 일종의 취업 사기(?)를 저질렀고, 덕분에 이 ‘폰(von)’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인 아돌프, 그리고 그의 손자에게까지 대물림되었다.



구스타부스 발렌타인의 아들 아돌프 폰 홀스트는 아버지의 음악 유전자를 물려 받아 첼트넘에서 명망 있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성가대 지휘자로 자리잡았고, 본인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클라라와 결혼했다. 클라라도 교회에서 노래와 오르간 연주를 도맡았던 재능 있는 음악가였는데, 집안 족보를 들여다보면 고조할머니는 스페인 출신 배우였으며, 아일랜드인과 결혼해 영국으로 건너왔던 인물이었다. 아돌프와 클라라 부부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1874년 9월 21일에 태어난 첫째는 그의 조부의 이름을 따 구스타부스 시어도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니 이 아이가 훗날 <행성 모음곡>으로 이름을 남긴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다.



2년 뒤에 태어난 그의 동생 에밀 고트프리트는 나중에 이름을 어니스트 코사트(Ernest Cossart)로 바꾸고 뉴욕,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유명 배우가 되었다. 무려 4대에 걸친 예술 DNA! 게다가 두 형제가 한 명은 지휘봉을 들고, 한 명은 브로드웨이 조명을 받았으니 이쯤 되면 이 집안은 무대 체질이 거의 유전자에 각인된 수준인 듯하다.




영화 "Angel"에 출연한 어니스트 코사트의 모습(화면 왼쪽에 등장하는 하얀 보타이를 맨 남자가 코사트)





불쌍한 아이



홀스트 형제의 어머니 클라라는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건강은 좋지 않았다. 1882년에 그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큰 슬픔에 잠겼다. 아돌프는 여동생 니나에게 아들들을 대신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니나는 맏형이 11살이 되던 1885년까지 함께 살며 두 아이를 돌보았고, 어린 구스타브는 니나의 이러한 헌신에 감동하여 자신의 초기 작품 몇 곡을 그녀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아돌프는 1885년에 또 다른 제자였던 메리 스톤과 재혼했다. 이들 사이에서도 두 아들이 태어나 각각 ‘맥스’와 ‘솔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새어머니 메리는 신지학에 심취해 있어서 가사에는 무관심한 편이었고, 그 결과 아돌프의 네 아들들은 모두 약간의 방목 상태에서 자라났다.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구스타브에게 이러한 방임은 치명적이었는데, 훗날 구스타브의 딸 이모젠은 이러한 유년기를 요약해 그를 ‘불쌍한(miserable) 아이’라고 부르곤 했다.



“어린 시절 그는 항상 겁에 질려 있는 불쌍하고 과민한 아이였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것을 즐겼고 그리그의 음악을 좋아했지만, <서정 모음곡>을 피아노로 쳐볼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집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요.”

-이모젠 홀스트



아버지 아돌프는 아들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다소 엄한 편이었다. 집안의 규율을 어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본인들의 방에 갇히거나 하루종일 멀건 죽만 먹는 벌을 받기도 했다.



구스타브는 시력이 좋지 않았고 근시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안경을 쓰라고 권하지 않아 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더불어 천식까지 앓고 있어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이 차올라 중간에 쉬어 가야 할 때가 많았다. 1886년에 첼트넘 그래머 스쿨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내성적인 성격과 그리 좋지 않았던 체력 탓에 학교 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어릴 적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피아노 연습은 재미있었지만 바이올린은 그에겐 아무래도 지루했다. 남동생 에밀은 그런 형을 놀리려고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연습 시간을 늘리는(!) 초딩형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다 홀스트는 악기 하나를 더 배우게 되었는데 바로 트롬본이었다. 금관악기를 입으로 부는 것이 천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는데, 실제로 트롬본 연습을 시작한 뒤부터 기침이 줄어들었다고 하니 보기보단 제법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무렵부터 홀스트는 작곡에도 조심스레 도전하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된 작곡 수업은 받은 적 없었지만 베를리오즈의 <관현악법>이라는 두툼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냈다는 뿌듯한 업적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감 반 설렘 반으로 맥컬리의 시 <호라티우스>에 관현악 편성으로 음악을 붙이려 시도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리던 음악을 피아노로 옮겨보자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소리가 났고, 깜짝 놀란 그는 한동안 악보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음악을 쓰는 일에 끊임없이 도전했으며 그가 남긴 첫 작품들은 가곡, 피아노곡, 오르간을 위한 곡, 그리고 1892년에 쓴 교향곡까지 다양했다. 스타일 면에서는 멘델스존, 그리그, 아서 설리번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한편 그의 아버지 아돌프는 아들이 작곡가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피아니스트로서 안정적인 커리어를 이어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어린 시절부터 양손에 신경염을 앓고 있었던 홀스트에겐 피아노 앞에 앉아서 오래 연습하는 일이 마치 고문과도 같았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팔이 마치 “전기로 가득 채워진 젤리 같다(like a jelly overcharged with electricity)”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 상황에서 피아니스트가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지 같아 보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촌뜨기 소년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홀스트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며 연주회의 세팅와 뒷정리를 돕곤 했고, 그 모습을 본 아돌프도 비로소 아들의 음악 활동을 허용해볼까 하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함께 연주하며 공개 피아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1891년, 홀스트가 첼트넘 그래머 스쿨을 졸업하자 아돌프는 의외로 꽤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옥스퍼드에 있는 머튼 칼리지(Merton College)의 오르가니스트 조지 프레더릭 심즈에게 4개월 동안 대위법을 배울 수 있도록 연결해준 것이었다. 이를 거름삼아 홀스트는 2막짜리 오페레타 <랜즈다운 성(Lansdown Castle, 1892)>을 직접 작곡해냈다. 아서 설리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작품은 다음 해에 첼트넘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고 관객 반응도 아주 좋았다. 아들의 성공을 눈여겨본 아돌프는 이를 계기로 훗날 구스타브가 왕립 음악원에 진학하도록 선뜻 지원해주게 된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열일곱 살의 홀스트는 드디어 음악가로서 첫 정식 일자리를 얻었다. 영국 남서부 코츠월즈(Cotswolds) 언덕에 자리한 윅 리싱턴(Wyck Rissington)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 겸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버튼온더워터(Bourton-on-the-Water) 성가대 지휘자도 맡게 되었다. 보수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이런 경험들은 젊은 작곡가로서 합창 음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이때부터 합창 음악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마을버스라고는 전무한 시절이었기에 홀스트는 윅 리싱턴에서 버튼온더워터까지 약 4km(2.5마일)나 되는 거리를 늘 걸어다녀야 했다. 몸은 약했을지언정 그는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새어머니가 신지학에서, 아버지가 술에서 위안을 얻었다면 홀스트는 산책과 음악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젊은 시절 그는 당시 예술청춘이라면 한번쯤 빠져들 수밖에 없던 바그너의 매력에 홀리게 된다. 1892년 7월 13일, 그는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하는 <신들의 황혼>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일부 장면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7시부터 시작된 공연은 자정까지 이어졌고, 거의 모든 관객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숨죽여 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었던 우리의 시골뜨기 오르간 연주자는 공연의 웅장한 스케일뿐만 아니라 음악의 열정적인 표현, 그리고 대담한 불협화음들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첼트넘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부터 바그너는 아서 설리번과 함께 그의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한번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고는 감동에 젖어 하룻밤을 꼬박 새가면서 근처 강변을 서성이기도 했다고.





<트롬본과 오르간을 위한 콘체르탄테, 1894>





왕립 음악원에서의 일상



홀스트는 영국 왕립 음악원(Royal College of Music)에 장학생으로 들어가려고 무척 애썼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여기저기서 돈을 꿔가며 지원해준 덕에 겨우 일반 전형으로라도 입학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는 1893년 5월에 첼트넘을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왕립 음악원은 런던의 켄싱턴 지역에 있었는데, 가난한 학생이 그런 대도시에서 살림을 차린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켄싱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당시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해머스미스(Hammersmith)라는 지역이 적절한 대안 같아 보였다. 음악원까지 오가는 차표값마저 아까워서 홀스트는 주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곤 했다. 밥값이며 옷값까지 아끼고 또 아꼈지만 돈은 늘 부족했다.



입학 시험을 볼 때 홀스트의 옆자리에는 나중에 유명한 음악가이자 비평가가 된 프리츠 하트(Fritz Hart)가 앉았다. 하트는 당시 홀스트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그 당시 구스타브는 해머스미스에 살았다. 그는 조용한 뒷골목의 작고 깨끗한, 그렇지만 가구라고는 일절 없는 단칸방에서 지냈다. 피아노 또한 없었지만 그는 가진 것에 감사하자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되돌아보면, 그는 피아노를 가진 다른 학생들보다도 음악원 생활을 더 잘 해냈다. 그는 지갑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자전거가 없을 때면 차표값을 아끼려고 집까지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방학이 되면 구스타브는 첼트넘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갔는데 그 모습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사이클용 반바지를 입고는 그 위에 우비를 걸치고 있었다. 자전거 핸들에는 조그만 꾸러미들을 주렁주렁 달아놓고 어깨에는 트롬본 가방까지 메고 자전거를 달렸다. 날이 어두워지면 그는 코츠월즈의 한적한 언덕에 올라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풀썩 주저앉아 다리를 쫙 펴고 트롬본을 꺼내 통쾌하게 불어제끼곤 했다.”



홀스트는 여느 학생들처럼 왕립 음악원에서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렸고 연주회에도 자주 다녔다. 그는 주위 사람에게 친절했고 다가가기 쉬운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끔 특유의 고집과 밑도 끝도 없이 순진한 면모로 동기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특히 음악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그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홀스트를 보며 한 친구는 경이로움(?)을 담아 이렇게 적었다. "세상의 그 어떤 사악함과 추문도 네 앞에선 꼬리를 내리고 말 거야."



그런 '어린 현자' 에게도 가난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가 평소 챙겨먹었던 음식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말린 견과류 정도가 다였고, 영양 결핍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앓아오던 팔의 신경염이 점점 더 악화되어 피아노 연습조차 버거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피아니스트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조지 케이스(George Case)에게 트롬본을 배우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오르간 공부는 계속했는데, 훗날 그의 대작 <예수의 찬가(The Hymn of Jesus)>의 바탕이 된 평성가(plainchant)를 처음으로 접한 것 또한 그에게 오르간을 가르쳤던 윌리엄 호이트(William Hoyte)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W. S. 록스트로와 프레드릭 브리지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던 홀스트는 당시 저명한 교수였던 찰스 빌리어스 스탠퍼드(Charles Villiers Stanford)에게 작곡을 사사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 마드리갈 작곡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학문적 대위법은 이들의 예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나중에 대학을 졸업한 뒤에, 교수들보다 오히려 버드나 윌크스 같은 옛 작곡가들에게서 대위법에 대해 더 많이 배웠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작곡에 대한 열정은 넘쳐흘렀지만 피아노가 없던 그는 머릿속으로 음악을 구상한 뒤 음악원에 가장 먼저 도착해 피아노로 연주해보곤 했다. 물론 본인 아이디어와 실제 음향의 간극에 절망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스탠퍼드의 지도 하에 작곡을 이어나갔다. 아버지 아돌프는 그를 위해 일주일에 1파운드씩 용돈을 보내 주고 있었다. "그렇게나 돈이 많이 필요하니?" 하고 불평할 때도 있었다지만. 그의 아들은 술담배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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