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너머의 홀스트> 2화
바그너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젊은 음악학도 홀스트. 그런 그의 음악 세계를 뒤흔든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우스터 대성당(Worcester Cathedral)에서 바흐의 <미사 B단조>를 직접 들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당시 이 작품을 처음 접했던 그는 환희에 찬 합창을 듣고 깊이 압도되었다. 특히 상투스(Sanctus) 대목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홀 천장에 머리를 박을까봐(!) 의자 손잡이를 꽉 잡고 있어야 했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이 사건 이후 그가 오르간 연주회를 열 때면 바흐는 빠질 수 없는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잡었다.
방학이 되면 홀스트는 영국 왕립 음악원이 있는 런던에서 고향인 첼트넘까지 약 156km(97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자전거로 오갔다. 차표값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도중에 쉬어갈 때면 그는 가방에서 트롬본을 꺼내 연습삼아 불곤 했는데, 한 번은 양떼 목장 가까이에서 연주하고 있었더니 근처에 있던 농부가 "당신이 내는 그 소리 때문에 양들이 때 이른 교미를 하려 들잖소!" 라며 화를 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1893년에 왕립 음악원으로 돌아온 홀스트는 음악 공부와 작곡을 계속했는데 훗날 그는 학생 때 썼던 작품들에 "어린 시절의 참상"이라는 별칭을 붙여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에 쓴 작품 중 몇몇은 실제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 일부는 유명 출판사에서도 받아들일 만큼 꽤 훌륭한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수업 때 작곡한 작품으로는 첫 번째 현악 사중주, 오케스트라를 위한 볼레로 등이 있었으며 음악원 동료들이 직접 만들거나 갖다준 텍스트에 음악을 붙여 가곡도 많이 썼다. 다만 양팔의 신경염 탓에 악보를 쓰는 작업의 속도는 한없이 느려졌고, 펜촉을 손가락에 묶고 작업해야 하는 수준까지 갔다. 이처럼 사본을 만들기가 어려운 탓에 한번은 악보 마지막 부분에 "부디 이 악보를 잘 보관해주시고 가능한 빨리 돌려달라"고 부탁하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아리아와 변주곡(Air and Variations), 1894>
당시 그의 작곡 스승이었던 스탠퍼드는 19세기 영국 남성의 패션 아이콘이자 도박사였던 보 브루멜(Beau Brummell)의 카드 게임 일화를 소재로 오페라를 창작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홀스트는 동기 프리츠 하트가 쓴 대본을 바탕으로 단막의 코믹 오페라 <반칙(The Revoke)>을 완성했고, 이 작품은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 무대에 거의 오를 뻔 했으나 아쉽게도 학생들끼리의 비공개 공연으로 만족해야 했다. 비록 여러 차례 수정 작업을 거쳤지만, 홀스트는 결과물이 꽤 자랑스러웠는지 본인의 작품 목록을 쓰던 공책에 이 곡을 "작품번호 1번(Op. 1)"이라 적어넣었다.
1895년,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홀스트는 자신의 음악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자 평생의 친구가 될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를 만나게 된다. 당시 3년을 휴학하고 음악원으로 막 복귀한 본 윌리엄스는 첫 만남부터 리처드 셰리던의 희곡 <비평가(The Critic)>을 인용하며 말을 걸어온 너드미 넘치는 홀스트에게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게다가 둘 다 잉글랜드 남서부 글로스터셔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친구가 되었다. 본 윌리엄스는 프리츠 하트나 존 아일랜드 같은 홀스트의 동기들과도 함께 어울렸고,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콘트라바순이 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음 같은 주제부터 비운의 주드(Jude the Obscure, 토머스 하디의 책)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홀스트와 본 윌리엄스는 템스강 근처를 자주 거닐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 때 작업 중인 음악을 서로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며 의견을 나누곤 했다. 이 둘은 헨리 퍼셀의 탄생을 기념하는 공연에 나란히 앉아 <디도와 아이네아스>를 관람했고, 홀스트는 훗날 영어의 음악적 어법을 찾는 데 있어 퍼셀의 이 작품에서 레치타티보(recitatives)를 들은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고백했다.
홀스트와 본 윌리엄스
해변의 트롬보니스트
이 시기부터 홀스트는 드디어 장학금의 수혜자가 되었고, 나머지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트롬본 연주자로 일했다. 그는 여름에는 해변의 휴양지에서, 겨울에는 런던의 극장에서 연주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음악원으로 모인 학생들이 각자 어느 연주회에 갔는지,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는지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울 동안 홀스트는 브라이튼(Brighton)이나 블랙풀(Blackpool) 같은 해변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주한 경험을 이야기하곤 했다. 물론 그 보수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는 공연장에서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다. 당시 영국 사람들에게는 '실력 있는 연주자는 외국인'이라는 기묘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가 활동했던 악단 그룹의 3분의 1은 외국인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심지어 관객들 앞에서 외국 억양으로 말하라는 지시까지 받았다고 한다. 성공하기 위해 아예 외국인스러운 이름을 꾸며 쓰거나 외국인 행세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수상할 정도로 독일스러운 이름을 가진 우리의 주인공, "구스타브 폰 홀스트"는 이 분야에서는 이미 반쯤 먹히고 들어가는 준비된 인재였다. 아아,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취업 사기의 전통이여! 어쨌든 그는 안타까움을 담아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연주자라면 당연히 외국인일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으로 무대에 서고 싶다면 당연히 영국인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홀스트는 악보를 꼼꼼히 숙지해가며 나름 열심히 연주했지만 바쁜 공연 스케줄과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점점 지쳐갔다. 그는 이 일을 지휘자의 이름(스타니슬라우스 부름, Stanislaus Wurm)을 따서 꾸물거리기(worming)라 부르곤 했다. "꾸물거리기는 그 누구도 하면 안되는 일이야. 모든 일에 싫증이 나서 작곡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다니까."
부름의 화이트 비에니즈 밴드(White Viennese Band)는 가끔 상류층의 호화로운 파티에도 초청되어 밤새도록 벌어지는 춤판에 음악을 연주했다. 이런 무도회에서는 일종의 '복지'로 샴페인을 무제한으로 얻어마실 수 있었고, 단원들은 연주 중간중간에 술을 들고 나타나선 홀스트에게 한 잔 하라며 성화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철저한 금욕주의자였던 홀스트는 늘 고개를 저었다. 술도, 담배도 그에겐 관심 밖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어느 날은 공연이 새벽 3시가 넘도록 이어져서 홀스트는 이미 눈꺼풀이 반쯤 내려앉은 채로 트롬본을 붙들고 있었다. 이 때 동료들이 반강제로 먹인 한 잔의 술이 마법처럼 효과를 발휘했다.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그는 전에 없던 에너지로 신나게 왈츠를 연주했다. 연주 도중 홀스트는 지휘자가 자기 쪽을 계속 바라보면서 씨익 웃는 것을 눈치채고는 의아해했다. 연주가 끝날 무렵이 되자 지휘자는 이제 거의 존경심이 담긴 눈길로 홀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지금껏 연주하고 있던 악보는 트롬본이 아니라 피콜로 파트였다. 공연 전에 누군가 그에게 잘못된 악보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피콜로는 금관악기인 트롬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높은 음역대를 가지고 있어 연주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텐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걸 다 연주해내다니! 이것참 술기운이 무섭긴 무서운 법이다.
사회주의 합창단과 첫사랑
어린 시절 홀스트는 새어머니가 친구들과 신지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워들으며 세상의 이면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키워 갔고, 커서는 음악원 동기들과 교류하며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라는 사회운동가의 책을 읽고 그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그의 관심사는 사회주의 사상 쪽으로도 뻗어 나갔다. 그는 "예술은 소수를 위한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모리스의 철학에 환호했고, 곧 '해머스미스 사회주의 협회(Hammersmith Socialist Society)'에 가입하여 모리스의 저택이 있는 켈름스콧(Kelmscott)을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는 윌리엄 모리스 자신은 물론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같은 당대 거장들이 직접 들려주는 연설을 들으며 지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예술의 귀족주의란,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소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란 예술을 모두에게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면 예술가들은 군중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어떤 비밀 신호 같은 걸 가지고 있다."
- 구스타브 홀스트
위 말을 살펴보면 확실히 모리스와는 강조점이 다르다. 홀스트 학자이자 전기 작가인 마이클 쇼트는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마르크스의 책보다는 평소 그가 즐겨 읽던 음악 잡지 '미님(The Minim)'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 잡지에는 예술과 평등을 논하는 기사들이 가끔 실렸기 때문이다. 레이프 본 윌리엄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때 홀스트의 뜨뜻미지근한 정치적 태도를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홀스트는 훗날 그를 훌륭한 교사가 되도록 만든 '동료와의 연대감'이라는 감정을 발견했다. 그래서 정치적 신념보다는 동지애(comradeship)에 가까운 감정으로 그는 해머스미스에 있는 켈름스콧의 저택에서 모이는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 레이프 본 윌리엄스
그리하여 정치에 관심 있는 열혈 단원들이 길거리를 누비며 선전물을 뿌리고 다닐 동안, 홀스트는 그들이 끌고 다니는 손수레 위에 가만히 앉아 하모늄을 연주하는 광경이 포착되곤 했다. 어찌 됐든 그의 소명은 정치보단 음악이었다. 1897년에 협회 측에서 '해머스미스 사회주의 합창단(Hammersmith Socialist Choir)'을 결성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지휘자 겸 감독의 역할을 맡아 합창단을 이끌었다.
합창단 초기 단원 중에는 해리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곧 해리는 자신의 누이 에밀리 이소벨 해리슨을 합창단에 데려왔다. 그녀는 홀스트보다 두 살 어렸으며, 밝은 금발 머리와 또렷한 파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프라노였다. 그리고 홀스트는... 그런 이소벨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소벨은 그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물 두살이었고,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음악밖에 몰라서 다른 주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단지 그녀를 절망 어린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 이모젠 홀스트
이소벨은 처음엔 홀스트에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음악밖에 모르는, 작고 마른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한(당시 그는 트롬본 연주자로 밴드 오디션을 볼 때 나이가 많아 보이게 하려는 속셈으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 청년은 그녀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합창단 활동을 통해 함께 리허설하고, 무대에 서고, 심지어 가끔 남녀 주인공 역할로 짝을 이루어 연기하는 시간이 쌓이자 이소벨도 차츰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느덧 둘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홀스트는 그녀의 권유(혹은 명령)에 따라 식사량을 늘렸고, 수염을 밀었으며, 더 세련되고 품질 좋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소벨은 자신의 부모님에게 그를 정식으로 소개시켜 주었고 식사 자리에도 초대했다. 무심한 새어머니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홀스트에게 이소벨은 '평범한 가정에서 보내는 따뜻한 하루'가 이렇게 근사한 것임을 처음으로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약혼까지 하기에 이르렀지만, 둘의 수입이 너무 적어 결혼은 아직은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홀스트는 이소벨을 위해 매주 새로운 사랑 노래를 적어 들려주었고 그 음악에는 언젠가 결혼하리라는 굳은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는 런던 곳곳을 돌며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그리고 극장에서 트롬보니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극장 공연은 몇 시간이고 계속 피트에 갇혀 있어야 해서 꽤나 지루했는데, 한번은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공연 중에 본 윌리엄스에게 빌린 책을 보면대에 세워놓고 몰래 읽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연주할 차례가 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악기를 치켜들곤 했다.
그래도 늘 그런 재미없는 일만 있던 건 아니었는데 1897년에 처음으로 영국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연주회에서 제2트롬본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것도 그였다.
왕립 음악원에 입학한지도 어느덧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음악원에서는 장학금을 1년 더 연장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홀스트는 이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때라고 판단하여 고심 끝에 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미 카를 로사 오페라 컴퍼니(Carl Rosa Opera Company)로부터 트롬본 수석 겸 리허설 코치직 제안을 받은 참이었다. 그는 가방을 싸들고 잉글랜드 북서부 지역의 랭커셔(Lancashire)로 발걸음을 옮겼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