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잡아 이천 번 쯤 될 것이다. 내가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간 횟수 말이다. 열일곱 고등학생이 스물이 되어 졸업할 때까지, 매일 아침과 밤의 주기적인 시각에, 나는 470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쳤다. 오전 일곱 시 삼십 분 쯤, 아직 덜 깬 도시의 텅 빈 광화문 광장을 지나고 나면 어느새 고등학교가 있는 서대문역에 도착해 있었다. 스물이 되어, 다른 도시에 머무느라 잠시 멀어졌던 그 버스는 스물하나가 되어 다시 애용하게 되었다. 신촌에 있는 대학 캠퍼스를 밟게 된 나는, 다시 매일 광화문을 만났다.
어느새 7년동안 지나친 그곳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하는 장소들 중 하나다. 나는 특히 그곳의 밤풍경을 좋아한다. 내려앉은 어둠을 비추는 도로의 불빛들과, 바쁘게 지나다니는 직장인과 학생들, 그들이 머무르다 곧 흩어지는 광장과, 그 모든 풍경을 조망하는 거대한 광화문이, 정말이지 서울스럽게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는 밤에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시티팝을 들으며 그곳을 산책하는 나를 상상했다. 그것은 매일 크고 작은 현실의 짐을 진 채로 한강의 이편과 저편을 왕복하는, 나의 작은 몽상이었다.
광화문을 좋아하는 커다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관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광화문 씨네큐브다. 광화문과 마찬가지로 이천 번은 스쳐 지나갔을 이 장소를 나는 습관처럼 찾았다. 저녁을 먹고 이곳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앞서 말한 밤풍경이 언제나 펼쳐져 있었다. 그러면 그날 하루가 퍽 괜찮게 느껴지곤 했다.
내가 광화문 씨네큐브를 좋아하는 이유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이곳의 상영시간표 때문이다.
씨네큐브는 스스로를 '예술영화관의 대표 브랜드'라고 소개한다. 주로 다양성 영화를 상영하는 이 영화관에서 나는 수많은 영화들을 접했다. 지금 떠오르는 작품들로는 <본 투 비 블루>와 <카페 소사이어티>, <플로리다 프로젝트>, 그리고 <러빙 빈센트>가 있다. 넷플릭스 제작 작품으로 전국 영화관에서 제한적으로 상영했던 <옥자> 또한 이곳에서 관람했다. 하나같이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다양한 영화들을 좋은 영화관에서 관람할 기회는 생각보다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상영되는 영화의 종류와 개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온갖 영화관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한복판에 살면서도, 나는 종종 제한된 선택지에서 비롯되는 결핍감을 느껴왔다.
그러나 전국의 멀티플렉스가 <어벤져스:엔드게임>을 독점적으로 상영하는 동안에도, 광화문 씨네큐브는 메인 포스터에 <미스 스티븐스>를 걸어두었다. 2019년 5월 30일 기준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상영하는 영화로는 <로제타>와 <미스 스티븐스>, <기생충>, <파리의 딜릴리>, <바르다가 말하는 아녜스> 등이 있다. 여기에는 90년대 재개봉작과 극장 최초 개봉되는 2016년작, 세자르 영화제에서 수상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포함되어 있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의 신작을 제외하고는 여타 영화관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라인업이다. 서울에서, 이 정도 규모의 영화관에서 이런 영화들을 상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벤져스>를 무척 즐겁게 보았지만 동시에 다르덴 형제의 1999년 작품이 무척 궁금한 관객이기도 하다. 적당히 대중적인 취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예술 영화에도 눈과 귀를 열어두고 있는 나같은 관객에게, 광화문 씨네큐브는 필연적으로 아지트와 같은 공간이 된다. 보고 싶지만 보기 힘든 영화가 생길 때마다 광화문 씨네큐브의 상영시간표를 검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공간이 지니는 고유한 분위기다.
470번 버스를 타고 종로3가와 광화문을 지나면 거대한 전시물이 등장한다. 20미터를 넘는 높이의 그는 손에 망치를 들고 있고, 팔을 느리게 움직이며 밤낮으로 망치질을 하고 있다.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면 대개는 늘 망치질을 하고 있어 언제 쉴까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다고 한다. 주말은 쉰단다.
'해머링 맨'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전시물 바로 뒤의 돌계단을 내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번 더 내려가면 내가 사랑하는 영화관이 등장한다. 커피와 와인을 함께 파는 카페와, 야채를 듬뿍 먹을 수 있는 뷔페를 지나친다. 쾌적한 내부에 들어서면 소박한 박스 오피스와 벽면에 게시된 거대한 크기의 영화 포스터들, 그리고 두 개의 상영관이 눈에 들어온다. 측면에는 개봉예정작의 포스터와 현재 진행중인 GV의 팜플렛들이 비치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관이 품은 고유의 무드를 참으로 좋아한다. 그저 순전히 좋아한다, 라고 설명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그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곳에서 시간은 어쩐지 느릿하게 흘러간다. 언제 방문하든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찬 적이 없었던 이 영화관이 지니는 하나의 매력은 바로 적당한 한적함이다. 너무 거대한 열기도, 웅성거림도, 분주함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다행히 이곳에 올때면 늘 대화가 끊이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옥자>를 보던 밤에는 장대비가 내렸다. '비가 그칠 때까지-'라는 막연한 조건을 세워두고 적당한 우울과 탄식이 섞인-우리를 그렇게 만든 영화였다-대화를 끝없이 나누던, 건물 지하에서의 시간들을 기억한다.
둘째, 이곳에 존재할 때 나는 주변의 사람들과 공통된 소속감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그 이유는 앞의 설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분명 개봉했으나 대다수 영화관의 상영시간표에서 지워졌던 영화들이 이곳에서는 현재 상영중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찾은 누군가가 나와 공통된 취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단정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상영관 입장을 기다리며 같은 공간을 공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헤아리며, 나는 가끔 상상한다. 이곳에 있는 누군가는 영화라는 매체에 지대한 애정을 품고 있겠지, 나와 비슷한 영화 취향을 지닌 사람도 있겠지, 상영관을 나선 뒤에도 방금 본 영화에 대해 몇 시간이고 떠드는 것을 순전히 즐거워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겠지, 하고. 유독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설렘과 기쁨의 감각 같은 것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특유의 여유로움과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안정감.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이곳을 잊지 않고, 꾸준히 찾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이.
이제 세 번째 이유를 말해보겠다. 세 번째 이유는 내가 이곳을 아지트로 삼은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다. 나는 이 영화관이 고수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씨네큐브는 영화 관람 에티켓으로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상영관 내 음식물 반입 제한
-상영관 입장시 생수만 반입 가능합니다. 타인에게 소음 또는 향으로 인해 영화관람을 방해할 수 있는 음식물의 반입을 제한합니다.
둘째, 정시 상영 시작 & 상영 시작 10분 후 입장 제한
-씨네큐브는 영화 상영 전 광고 없이 정시에 상영을 시작합니다.
셋째, 상영 종료 후 상영관 내 점등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한 영화 관람을 위하여 엔딩 크레딧이 끝난 후 상영관 내 점등됩니다.
광화문 씨네큐브 홈페이지
기존의 영화관의 질서를 완전히 역전하는 이곳의 규칙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영화에 대한 성실한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독특한 것은 세 번째 규칙일 것이다. 이곳에 처음 방문한 날의 가벼운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유지되는 암전과, 당연하게도 자리를 지키는 관객들 사이에서 영문을 모른 채 앉아 있던 그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또한 영화의 일부라는 이곳의 관점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영화관에서의 영화 관람은 언제나 일정한 차단을 전제한다. 암전된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타인에게 접속되지 못한 채 오롯이 그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상영관에서 타인에게 크게 말하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에티켓인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우리는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상영관을 나서기 시작한다. 일말의 쉴 틈도 없이,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에 '재접속'되는 것이다. 동반되는 피로감은 밖에 나서면 곧 휘발되기 마련이다.
씨네큐브는 이 차단을 일정 시간 연장함으로써 '영화 감상'이라는 행위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한다. 여전히 타인과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있지만, 영화 자체는 끝나 있는 이 시간동안 나는 오롯이 혼자서 영화를 곱씹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옆에 앉아 있는 너는 두 시간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하기도 하면서. 그 순간에 나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며 스크린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그려본다. 한없이 달리던 무니의 다음 날 아침을(<플로리다 프로젝트>), 너무도 어린 나이에 온갖 수고를 겪은 미자의 5년 후를(<옥자>), 우울한 블루로 점철된 쳇 베이커의 삶의 마지막 날을(<본 투비 블루>).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광화문 씨네큐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취향의 공간이다. 이곳이 위치한 장소도, 상영하는 영화도, 이곳의 고유한 분위기도, 이곳이 고수하는 지향점과 태도도, 모두 내 취향의 발끝을 넘어서지 않는다. 삶에는 불가항력적으로 애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 가끔 등장하는데, 내게 광화문 씨네큐브는 그런 곳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정신 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도시에서, 고유한 빛을 유지하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그리고 소망한다. 앞으로도 이 영화관이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기를. 샌프란시스코의 시티 라이트 서점이 그렇듯이, 몇십 년의 시간을 견디어내며 누군가의 소중한 아지트로서 그곳에 그대로 있기를. 자주 보러 올게, 꼭.
2019년 5월
봄과 여름 사이에서
몽상 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