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겨울, 무심코 포털 메인에 올라와있던 이미지를 하나 클릭했다가 '웹툰'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제 9년 남짓이 흘렀다. 잠에 들기 전 새롭게 뜨는 웹툰을 보는 것은, 독서나 영화 감상과 비슷한 맥락의 취미가 아니라, 일상이나 습관 정도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그 9년 동안 엄청난 양의 웹툰을 소비하면서도 '인생 웹툰'을 하나 꼽아보라고 하면 늘 망설이곤 했는데, 추천할 만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명작들은 차고 넘쳤지만 내 인생에 단 하나를 꼽으라 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쓸 수 있는 이유도 결국 나의 '인생작'을 만났기 때문이고, 그걸 소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생 웹툰이 아닌 이미 꽤 이야기가 쌓인 것이었고, 심지어 작가의 전작인 옴니버스 개그물을 꽤 좋아했던 차에 기대를 품고 1화를 보았다가 별로여서 그만둔 것이었다. 한 번 하차한 웹툰을 다시 보는 것은 10년차에 달하는 '웹툰 짬밥'이 허락치 않았는데, 친구의 추천을 받아 어쩌다가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루 만에 모두 읽은 건 물론이고 유료결제까지 해서 몇 주 더 빨리 보기까지, 그것도 모자라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기까지 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놓칠 뻔 했던 나의 '인생 웹툰'을 만난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여러분도 부디 놓치지 말아달라고, 간략하게나마 소개해본다. 네이버 웹툰 랑또 작가의 <가담항설 - 길 위의 노래>를!
[※주의, 이 글은 네이버 웹툰 <가담항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성장의 무게
<가담항설>은 주인공 '복아'가 돌에 대고 소원을 비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돌이 인간 '한설'의 형상으로 변하게 되고, 이후 이들은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동료들과 함께 궁으로 향하며 역경을 돌파해간다. 요약하자면 '소년만화의 정석' 쯤에 해당하는 줄거리가 이어진다.
이러한 만화의 주 테마는 주인공의 '성장'이다. 늘 중학생 정도 나이인 어린 주인공은 다른 인물들의 도움을 딛거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몇 차례에 걸쳐 성장하는 동시에, 악인을 무찌르고, 용서하고, 때때로 동료가 되기도 하며 보통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면 된다'는 교훈에서 비롯된 희망찬 대사를 읊으며 앞으로 전진한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우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라인만 따라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러한 만화의 단점은 그만큼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클리셰의 향연이라는 것, 그래서 보통 캐릭터의 매력도가 만화 전체를 담판짓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총천연색의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독자의 취향을 사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단순한 설정과 깊이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웹툰 <가담항설>은 주인공들의 성장은 지극히 신중하고 무겁다. 이들의 성장은,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이 으레 동료가 위험해 처했을 때 구하고자 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목표로 각성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성장'은 웹툰에 등장하는 설정 중 하나인 '각인사'의 성장으로, '각인사'는 자신의 염원과 신념이 가장 강할 때 비로소 각인을 새길 수 있게 된다.
널 살려낼 거야. 반드시 널 살려내고야 말 거야.
모두들 네가 금방 죽을 거라 말했지만, 너는 2년이 넘게 살아있잖아.
모두들 내가 의술을 익히지 못할 거라했지만,
나는 모든 책을 닳아 없어질 만큼 읽어냈어.
나는 곧 각인을 새길 수 있을 거야.
각인을 새겨서 널 살려낼 거야. 할 수 있어.
나는 곧 -
그리고 염원과 신념은 절대 희망의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염원이 가장 강할 때는 이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온몸으로 느낀 직후이다. 까막눈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2년 동안 글을 깨우치고 의술을 공부했지만, 아들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절망한 후에야 비로소 각인을 새길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메인 주인공 격인 복아가 각인을 새길 수 있게 될 때까지도 비슷한 과정이 반복된다. 복아는 노비 출신인 자신의 불행에 체념하며 살아오던 인물로, 주인인 명영의 가르침으로 그의 신념을 따르게 되지만 늘 스스로의 운명을 비관하곤 했다.
나는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불행해질 수밖에 없게 태어났으니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불행을 가졌으니까.
이 사람은 왜 날 데려가는 걸까? 어르신은 날 왜 데려왔을까?
어차피 난 반드시 불행해질 텐데... (...) 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거야.
한설: 복아야,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나 지금...
앞이 안 보여서 잘 모르겠어.
명영: 별들은 작고 멀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 자리에 존재해.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지.
복아: 별은 하늘에 있고 제 발은 땅에 있어요.
눈앞은 어둡고 길은 너무 험해요.
명영: 걱정마, 복아야.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이 네 길을 밝힐 테니.
넌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어. 네가 안다는 걸 모를 뿐이지.
(...)
날 믿지, 복아야? 나도 널 믿어.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줄 거라는걸.
복아는 죽음 앞에서 천출인 자신의 불행을 가장 크게 절감하게 된다. 얼굴의 절반이 날아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오롯이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한설에게 '훌륭한 세상'은커녕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스스로를 확인하고서야, 누군가에게 '훌륭한 세상이 되어주고 싶다'는 염원과 신념을 가지며 각인을 새기게 된다.
이처럼 이들의 성장에는 개인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이 앞선다. 그들에게 한 단계의 성장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고, 화려한 기술과 액션신으로만 채워질 가벼운 것도, 딛고 일어서 완벽하게 극복한 것도 아니다. 성장을 통해 강해진 모습에는 멋있게 '레벨 업'한 것이라기보다, 삶의 두루마리 중 얼룩진 한 칸을 구겨내서 겨우 나머지를 살려내는 처절함이 보인다.
2, 태생의 무게
그리고 성장은, 상황을 타개하지도, 극복하지도 않는다. 불행한 태생과 과거는 현재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처럼 남는다. '삶의 두루마리 중 얼룩진 한 칸'은, 절취선대로 찢기지 못하고 몇 갈래로 짓이겨져 걸레짝이 되어서도 다음 칸에 따라붙는다.
'태생'의 문제는 선역이고 악역이고를 막론하고 (선역인지 악역인지조차 모호한 인물들이긴 하다) 모든 주인공에게 부여된다. 궁으로 떠나는 메인 주인공 4명 한설, 복아, 홍화, 정기는 각각 돌(...)/노비 출신/사당패 출신/백정 출신으로 계급의 최하층에 해당한다. 복아를 여행길에 나서게 한 장본인인 양반 '도련님' 명영조차도 여성의 몸으로 과거를 보고자 하는 인물로, 태생의 한계를 짊어지고 있다.
복아: 저는 이렇게 태어나 교활하고 영악하고 끈질기지만,
도련님은 지혜롭고 영리하고 끈기 있죠.
도련님은 글을 배워 출세할 수 있겠지만,
저는 글을 배워서 뭘 할 수 있나요?
도련님은 과거에 급제하고 출세하시면,
모든 걸 노력으로 이루어낸 거라고 생각하며 사세요.
아마 궁에 들어가면 전부 비슷한 사람들 뿐일 테니
앞으로도 영영 그 생각 변함 없이!
근데 그거 알아요? 어차피 도련님은 과거조차 볼 수 없어요.
도련님은 누가 봐도 여자고, 더 이상 키는 크지 않을 테니까.
노력하는 거 좋죠. 안 하는 거보다야 당연히.
근데 전 -
노력의 평가가,
기회가,
결과가,
공평한 거냐고 묻는 거예요.
(...)
명영: 복아야, 이거 놔! 놔, 복아야!
나... 과거 시험 봐야 해.
알잖아, 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도 알아, 네가 날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그러니까 제발, 너의 헌신이, 나의 노력이,
우리의 지난 모든 날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마...
(...)
복아야...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태생적 한계'는 이들의 여행길의 직, 간접적 원인이 된다. 노비임을 절망하던 복아와, 여성임을 절망하던 명영은 힘을 합쳐 과거를 보기로 한다. 명영은 과거를 본다는 이유로 길을 떠나고, 복아는 명영과 함께 그를 대신하여 과거를 보러가다 명령으로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홍화는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 그 어머니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게 되자, 정기는 같은 백정인 동생 태하와 눈 먼 낭자의 도망을 돕다가 그들이 죽게 되자 복수의 길을 나선다.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태생이 충돌하면서 그들은 절망하고, 그 절망은 성장의 끈이 되든 되지 않든 짐처럼 따라붙는다. 대차게 궁으로 향하며 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서는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게 대화할 때 누가 이들을 천하게 여길까 싶을 정도로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이 높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복아가 늘 자신의 불행에 체념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그들의 어깨에는 늘 태생의 운명이 짊어지워 있다. 유쾌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최하층에 해당하는 그들이 궁으로 향하는 길은 사실 무척이나 근본 없고 무모하다.
이들과 대치되는 역, 혹은 앞으로 대치할 것처럼 보이는 역에 해당하는 백매(갑희)/갑연/암주도 각각 기생 출신/기생 오라비 (실제로 암주가 갑연을 처음 보았을 때 기생오래비같이 생겼다고 하자 자신은 한양 최고 기생의 오라비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기도 한다) 출신/서자 출신으로, 각각 황제 신룡의 연인/막대한 부를 갖게 되는 그 오라비/그의 심복으로 부와 권력을 얻게 되지만 태생적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떨치지 못한다.
암주의 경우 장사의 힘과 의술사로서의 능력까지 갖추었지만 서자이기 때문에 어렸을 적 얼굴을 난도질 당했으며, 집안으로부터 배척당했다. 그의 집안이 역모로 몰살당할 때 적자의 어머니가 자신을 아들인 척 내세워 아들을 살리려고 하자 그는 분노하며 닥쳐오는 군과 적자를 모두 죽이고, 이후 갑연을 만나게 된다.
갑연: 그렇게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있는 건 짐승도 할 수 있어.
사람이면 사람답게 살아야지. 난, 네가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를 물은 거야.
(...)
나는 네게 네가 가장 원하는 걸 줄 생각이야.
(...)
인간의 약점은 곧 욕망이지.
네 얼굴의 상처는 마음의 약점이자, 벗어날 수 없는 너의 태생적 욕망인걸.
만약 네가 날 위해 살아준다면 그 대가로 나는-
널 진심으로 소중히 대해줄 거야.
아주 귀하고, 특별하게.
(...)
아무리 특출난 능력이 있어도 쓸 데가 없으면 오히려 더 큰 고통이란 걸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내가 널 사람답게 살게 해 줄게.
암주는 몰락한 가문의 서자 출신이지만 양반의 알량한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갑연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는데, 이는 갑연이 유일하게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고귀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암주는 갑연 아래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의술사나 장사로서의 능력을 펼치는데, '불공평하지만 어떡하겠어, 태어날 때 잘 태어나지 그랬어'라는 등 태생에서 우위를 점하는 식의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즉 그는 태생의 한계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또다른 한계를 정하고 스스로를 상위에 올려놓으며, 태생의 무게를 여전히 짊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누이 백매(갑희)가 최고의 기생에서 왕의 연인, 나아가 신룡의 연인이 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된 갑연 또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궁에서 백매(갑희)가 가져온 닭죽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삼키고, 동생의 독기 어린 말에 여유롭게 응수하기까지 하지만, 뒤돌아서서는 헛구역질을 하며 모두 토한다. 권력에 앉은 후에도 그들에게는 과거가 따라다닌다.
백매(갑희): 오랜만에 남매가 단둘이 오붓하게 식사나 해요.
제가 오라버니를 드리려고
특별히 궁에서 요리를 가져왔답니다.
갑연: 닭죽?
백매(갑희): 좋아하잖아. 고작 닭 세 마리에 동생을 기생집에 팔아넘길 만큼.
갑연: 그때 일은 두고두고 후회 중이야.
너라면 훨씬 더 비싸게 팔았어도 팔렸을 텐데.
백매(갑희): 넌 정말 평생 내 피와 살을 빨아먹고 사는구나.
(과거 회상)
갑연: 흰쌀에 고기가 먹고 싶어요. 그러면 병이 나을 것 같은데..
너무 맛있어요. 정말 너무 맛있어요.
(...) 근데 갑희는요? 갑희도 먹고 싶을 텐데. 갑희는 지금 어디 있어요?
이 고기...
어디서 났어요..!
웹툰은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에, 복아와 한설 일행의 여정의 실제 원인은 무엇일지, 암주와 갑연 등등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러나 왕실(백매를 제외한)의 인물들 외에 스토리의 주축을 이끄는 모든 등장인물은, 선악과 무관하게 비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경험하고, 그 무게를 견디며 살아간다. (아마도 대치될 예정인 두 일행이 비슷한 동기로 어떻게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지, 그 차이에는 무엇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지가 기대된다!)
그리고 특유의 드라마틱한 연출, 날카로운 대사와 함께 이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들이 사회가 규정하는 자신의 한계에 부닥치며 절규할 때마다 비슷한 울분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누구나 살면서 은연중에 느껴 오던 수많은 부당함들, 이에 순응하고 적응해야만 했던 순간의 감정들이 모호하게나마 샘솟는다. 그렇게 이들이 악착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읽어나가며, 이들을 한 이야기 속의 입체적 인물, 쯤이 아니라, 고뇌하고, 절망하고, 치졸해지고, 비겁해지는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3, 인간의 무게
그리고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태생적 한계나 부당함을 느낄 리 없는 최고 권력자, (심지어 '인간'도 아닌) '신룡'이다. 신룡은 본디 왕실의 요청으로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100년의 기도로 사람이 되었고, 1000년의 기도로 불로불사가 되는 듯 했으나, 1000년에서 하루 모자라게 깨어나 '불로'에 그치고 만다. 그는 사군자가 인간으로 화한 춘매, 하난, 추국, 동죽과 함께 날씨를 주관하며 백성을 돌보았으나, 왕실의 반란과 연인 춘매의 죽음으로 폭군으로 변한다.
춘매, 하난, 추국, 동죽은 인(仁), 의(義), 지(智), 예(禮)를 상징하며 각각 신룡의 다정, 양심, 이성, (동죽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음) 을 담당한다. 춘매의 죽음으로 인해 신룡은 다정을 상실하고, 나머지 사군자들은 어떠한 긍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된다. '다정'을 상실한 그는 자신이 한 때 너그러이 보살피던 인간에 실망해 폭정을 일삼으며, 춘매와 똑 닮은 백매(갑희)를 만족시키는 것과, 불사의 몸을 갖기 위해 춘매를 되살리는 것에 열중한다. 그는 춘매를 되살림으로써 불사의 몸을 얻어 진정한 '신'이 되고자 하며, 자신을 배신한 인간을 공포와 절망에 몰아넣고자 한다.
공정한 기회보다 공평한 불행을 바라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 본연의 성품이 저열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지옥에나 걸맞은 것이라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완벽한 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들에게
지켜지지 않는 원칙과 명확하지 않은 규칙으로
어둠 속에서 눈을 멀게 하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않는 처절한 처벌로
한 걸음도 섣불리 내딛지 못하게 하며
불공정한 기회와 불공평한 결과로
포기와 체념에 익숙해지게 하겠다.
그런 세상이 '삶'이 되고 그 삶에서 얻은 경험이
자식에게 '삶이 준 교훈'이란 이름으로 대물림되며
그것을 익혀 자란 모두가
그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순응하지 않는 자를 배척하게 만들어
모두가 자발적으로 틀 안을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통제의 굴레를 만들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춘매를 되살려
나의 불사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완벽한 절망을 안겨주고
스스로를 끝없는 어둠 속에 가두게 하겠다.
그러나 신룡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신룡이 인간에게 배신당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들에 의해 구축된 삶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현실 그 자체였다. 신룡을 신에 가깝게 만들 춘매의 부활은 사군자와 인, 의, 예, 지를 완성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인간'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목에 해당한다. 인간을 혐오하여 절망에 몰아넣으려는 신룡이야말로, 자신을 배신했던 인간들의 행적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룡은, 인간에게 배신당해 분노하고 벌을 내리고자 하지만 인간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네 가지 덕목의 유무에 의존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가담항설>은 이처럼, 복아, 명영, 갑연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상을 통해 인간이 마주하는 한계와 절망, 고통을 끄집어내고, 이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를 가장 인간다운 신룡에 둠으로써, 한 인간이 인생에서 걷는 모든 길을 주제삼고 있다.
Outro. 길 위의 노래
정기 씨. 아까 제가 꽃을 버려서 슬펐나요?
그건 신발이 진창에 빠졌을 때만큼 슬펐나요. 아니면 가까운 이가 아팠을 때만큼 슬펐나요.
어떤 슬픔은 어렴풋한 슬픔이고 어떤 슬픔은 처절한 슬픔이죠. 소소한 슬픔도, 아련한 슬픔도, 잊혀가는 슬픔도, 문득 기억이 떠올라 때때로 가슴이 아파지는 슬픔까지, 같은 슬픔조차도 사실은 전부 달라요.
책을 읽고 풍부한 단어를 알게 된다는 건,
슬픔의 저 끝에서부터,기쁨의 저 끝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의 결을 하나하나 구분해내는 거예요.
정확히 그만큼의 감정을 정확히 그만큼의 단어로 집어내서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들여다보는 거죠.
내가 얼마큼 슬픈지, 내가 얼마큼 기쁜지.
내가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불행한지.
자신의 마음이 자신을 위한 목적을 결정하도록.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정확히 전달하도록.
위의 인용은 글자를 떼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정기에게 홍화가 왜 글과 배움이 필요한지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가담항설-길 위의 노래>의 설정은 '글'과 '말'의 힘을 강조한다. 각인사는 글자에 염원을 담고, 인물 간의 대화에는 시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어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은 시에 가락을 붙여 부르는 명창이다. 그리고 웹툰의 큰 부분을 이끄는 '한설의 존재'의 이유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임금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걷는 길은 말로, 글로 옮겨 제 3자에게 전해질 때 힘을 얻는다. 각인사가 절망을 쌓아 올려 성장해 염원을 새기는 것이 그렇고, 태생의 한계에 부닥치곤 하던 복아 일행이 한설과 함께 궁으로 향하는 길이 그렇다.
나아가, 그들이 걷는 길을 그리는 작가의 만화가 그렇다. 한설이 임금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고하러 가는 것처럼, 작가도 <가담항설>을 통해 매주 목요일 독자에게 이들을 통해 인간이 걷는 길을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즉 <가담항설-길 위의 노래>라는 제목은, 웹툰의 기초가 되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웹툰 자체를 둘둘 묶어 하나의 두루마리로 만들어, 독자에게 건네기 전 작가가 라벨지에 써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아, 이건 <가담항설>이라는 제목의 떠돌이 두루마리인데, 이런 게 바로 '가담항설'이라는 겁니다.' 같은 느낌으로.
그러니까 작가는 <가담항설>이라는 '가담항설' 두루마리를 감질나게 건네주고 있는 중인 거고, 어쩌면 우리는 길 위의 행인이 되어 이를 전해 듣는 중인 거고, 내가 여러분에게 <가담항설>을 소개하듯 이 ‘가담항설’을 입에서 입으로, 글자에서 글자로 전해 옮기는 중인 걸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절망, 추악함을. 희망. 처절함을. 그러다가 다시, 또, 그리고 또 다시. 그렇게 모든 길을. 수천 갈래로 나뉜 삶의 길목마다 나아가게 해 주는, 힘 있게 기록된 노랫말을 말이다.
[ +),여담과 변명.
1. 내 '인생 웹툰'을 영업해보려고 쓴 글인데, 어쩌다 보니 '인생(인간)에 대한 웹툰'이라는 애매한 결론만 남는다. 매 화마다 차마 이 글에 엮지 못하고 놓쳐버린 가슴을 찌르는 명대사와 연출이 넘쳐나니까 제발 봐 주시길!
2. 주제가 웹툰인 만큼 이미지를 첨부해 보다가 웹툰을 통째로 가져오지 않는 이상 성에 차지도 않고, 드문드문 장면들을 가져오는 것이 정주행할 때의 감정을 헤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면 한 두 개만 보는 거랑은 느낌이 매우 다르니 궁금하다면 제발 봐 주시길! ]
대사 및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웹툰 <가담항설>
마지막 일러스트 출처 - 랑또 블로그 <천재 국민 만화가 랑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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