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애니메이션을 보는 착각에 빠져드는 무언의 마임극
혜화역은 오늘도 생기가 넘친다.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거리공연과 연극 거리를 따라 길게 늘어진 관객들의 존재는 왠지 모를 예술의 기분을 물씬 전달한다. 덤으로 북적이는 인파는 그 분위기의 진폭을 더욱 강렬하게 뛰게 한다.
마임 공연이 펼쳐지는 곳 또한, 혜화역 근방에 있는 동숭무대 소극장이다. 하지만 어찌 목적지로 향할수록 평범한 아파트 단지의 풍경으로 인도한다. 일전까지 북적거리던 인파는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동네 분위기 속으로 걸어가게 된다.
겨우내 도착한 동숭무대 소극장은 예스러운 돌 장식으로 한껏 입구를 내밀고 있다. 으슴푸레한 조명과 조금 눅눅한 냄새를 풍기는 건물은 어린 시절 자주 놀던 아파트 상가에 들어간 기분이 들게 한다.
이런 옛 감성, 혹은 소박한 분위기는 소극장까지 이어진다. 기존에 접했던 화려한 연극 프런트와 달리 간이 책상 하나에 안내원 한 분이 입장을 돕고 있다. 다섯 명이 채 서 있기 힘든 작은 입구 탓에 안내원을 조급히 입장하길 손짓했다.
공연장 또한 굉장히 소박했다. 손을 뻗으면 배우가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좌석도 스무 개 남짓하다. 애초에 각자 지정석이 존재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앉는 제도가 이해되는 규모였다.
자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니 뭔가 휑한 기분이 든다. 무대장치 하나 없이 조명만 덩그러니 무대를 비추고 있다. 서사가 존재하는 마임이기에 무대 소품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텅 빈 무대에 배우가 오길 기다리며 비로소 ‘아 정말 마임을 보러 왔구나.’ 깨닫게 된다.
그렇게 잠시 넋을 놓고 무대를 바라보니,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우산을 쓴 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첫 공연 <여정>이 시작됐다. 빗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면서 우산을 쓴 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사내는 마치 진흙 속을 걸어가듯 힘겹게 꽃 한 송이가 피어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힘겹게 꽃에 다다르고 남자는 자신이 쓰고 있는 우산을 내려놓는다. 남자가 잠시 꽃을 만지려고 하자 급작스럽게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남자는 한순간에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천둥이 치고 빠르게 미로를 탈출하다가도 한순간에 쓰러진다. 이유는 알 수 없는 시련 가운데, 사내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갑자기 세수하고 옷을 벗고 너털거리는 웃음을 짓기도 한다. 그렇게 고난과 휴식의 연속 끝에 도착한 목적지. 사내는 꽃을 들고 웃음을 지으며 그의 긴 <여정>은 끝이 난다.
<지금, 여기 마임>의 첫 번째 공연 <여정>은 그 시작으로서 배치가 알맞았다. 고재경 마임이스트는 해당 공연을 주최한 마임공작소 판 대표이자, 배우로서 한국 마임을 대표하는 배우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한국 마임의 전통성과 전문성을 잘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임에 대한 지식에 유무를 떠나 그가 보여준 동작들은 “이게 진짜 마임이구나!”하는 감상을 자아내게 했다.
그렇게 고재경 마임이스트의 놀라운 마임 기술에 놀라면서도 그가 표현하는 동작의 의미와 소품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삶의 길에서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 앞에서 당당하고 싶은 한 사람의 이야기
안내문에 적힌 간략한 공연 설명을 읽고 함께 감상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사내가 들고 들어온 우산은 현재이고 꽃은 미래를 뜻한다고 해석했다. 마치 진흙탕을 건너듯 힘겹게 꽃을 향해 건너간 사내의 모습은 시간 속을 헤쳐나가는 모습으로 해석했고, 꽃이 젖지 않게 우산을 놓는 행위와 그 이후 폭풍이 치는 장면은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희망과 녹록지 않은 현실이 공존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끝내, 도달하지 못한 미래 앞에서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좀 더 여유로워진 후에야 비로소 꽃을 거머쥘 수 있는 사내의 모습은, “급하지 않게 돌아가도 돼.”하며 우리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그 마임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내포했는지, 해당 공연을 제대로 해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언어만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표현해낸 고재경 마임이스트에게 경의가 생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 마임에서 가장 즐겁고 인상 깊었던 배우는 역시 <마당을 쓸다가> <지구별 여행> 공연을 보여준 최정산 마임이스트였다. 그의 공연은 보는 즉시 이해가 되는 팬터마임의 성격을 띠었기에 그 어떤 공연보다 시각적으로 즐거웠고 마치 말이 없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기분을 자아냈다.
먼저, <마당을 쓸다가>는 마당에서 우연히 발견한 동전에서 시작해 땅굴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상황으로 나아가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내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 마당을 쓸 때 입으로 “쓱쓱”하는 소리는 낸다거나, 동전을 주울 때 “동전”, 삽질을 할 땐 “삽질”이라고 말하면서 해당 행위의 정확성을 부여한다. 이런 조그만 재미에서 사람들의 웃음이 터지고 더 몰입하게 된다.
해당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더 큰 보물을 얻기 위해 땅을 파는 장면이었다. 배우는 무형의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니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벽한 굴을 만들었을 땐, 조명 효과와 배우의 마임 연기만으로 마치 실제 구덩이에 있는 착시효과를 만들어 냈다. 분명 평면의 무대였지만, 입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분에 정말 소름이 돋았다.
최정산 마임이스트의 두 번째 공연 <지구별 여행>은 회색 쫄쫄이의 외계인이 익살스럽게 등장한다. ‘정말 외계인이 나타나면 저렇게 움직일까?’ 하는 동작으로 뒤뚱뒤뚱 무대를 활보한다.
외계인은 우주 전쟁을 펼치다가 ‘지구’라는 별에 불시착한다. 맥없이 지구로 떨어진 외계인은 잃어버린 장기를 쓸어 담기도 하며, 심장을 잃어버리고 고난을 겪기도 한다.
그런 외계인은 물에 빠진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준 외계인은 손을 꼭 잡아보기도 하고 꽉 안아보기도 한다. 이전까지는 무자비하게 동물을 죽이고 심장을 꺼내 보았지만, 사람이란 생명체에겐 유독 친절하다.
그렇게 사람에게 또 다른 생명력을 경험한 외계인은 다시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 마치 시골의 경운기에 시동을 걸듯 힘차게 우주선을 작동시키고 저 먼 하늘, 아니 우주로 떠나가며 극이 마무리된다.
그 무엇보다 많은 사람이 감탄했던 부분은 마지막에 외계인이 우주를 떠다니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어두운 암전 상태에서 불이 켜짐과 동시에 배우는 번쩍 뛰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그는 정말 무대를 떠다니는 장면을 연출했다.
2~3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조명에 최정산 마임이스트는 무대를 떠다녔다. 마치 레이어 장치에 몸이 달린 듯 공중에 떠 있는 진기한 광경에 관객들의 호응도 정도가 달라졌다. 너무 기발한 장면을 실제 목격하면 뒤통수가 얼얼하듯, 관객 모두 환호의 이성을 놓고 감탄사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해당 마임에는 부성애를 느낄 수 있는 연극이 두 개가 존재했다. 하나는 류성국 배우의 <사진>이라는 공연이었고 하나는 해당 연극의 마지막 연극이었던 유홍영 배우의 <2019 꿈에~>라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의 공통점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류성국 배우는 사진첩을 통해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다면, 유홍영 배우는 가장으로서 고단한 아버지의 하루를 담아낸다.
먼저, 류성국 배우의 <사진>은 한 아버지가 사진첩을 열어보는 부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느긋한 음악 소리와 함께 한 남자는 사진을 하나 꺼내보고 사진을 밀가루 반죽처럼 양손으로 길게 늘어트린다. 그러고는 넓어진 사진 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넣고 마치 사진 속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는 그렇다. 지인의 소개 혹은 맞선으로 만난 아내와 어색하게 스테이크를 썰던 장면, 그렇게 만난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 딸을 낳고 탯줄을 자르는 장면, 다 자란 딸을 사위에게 보내는 딸의 결혼식 장면, 황혼의 길에서 옛날을 회상하는 현재의 장면까지. 기승전결이 탄탄한 이야기를 내포한다.
해당 공연에서 놀랐던 점은 최정산 마임이스트와 비슷하게 착시효과가 벌어지는 진기한 경험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진첩과 그 속으로 빠져드는 연기가 마치 애니메이션 효과가 해당 연극에 펼쳐지는 환상을 보여준다. 분명 무형의 소품 연기를 보여주지만 내 눈에는 모든 소품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뇌의 속임수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한 광경에 넋을 놓고 감상했던 공연이다.
마지막 공연 <2019 꿈에~>는 위이잉~ 하는 차 소리와 함께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이잉~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그 앞을 한 아버지가 가로막는다. 사고가 날 뻔한 위험 한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상사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힘이 부친 듯 길바닥에서 잠을 청한다. 잠에 깬 아버지는 다시 출근을 준비하고 상사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억지웃음으로 살아간다. 그런 지옥 같은 낮이 지나면 어젯밤과 똑같은 회식이 반복된다. 또다시 상사를 위해 아부를 하고 위험한 도로에 뛰어들어 택시를 잡아 상사를 태워 보낸다.
해당 연극은 미디어에서 그리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것을 연기하는 유홍영 배우는 실제 나이와 맞는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억지로 표현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듯 가슴에 와 닿는 연기를 펼친다.
하지만, 그 묘사가 미디어를 통해 자주 소비된 소재인지 조금의 거부감도 존재했다. 더불어 그 전개의 틀도 예측 범위 내에서 이뤄진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다른 관객들은 어떨까 살펴보니, 주위의 많은 아버지 세대의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대별로 각자 공감대가 다르다는 점도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새롭지 못한 소재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피부로 다가오는 진솔한 경험담일 수 있다는 감상을 폭을 이해하게 된다.
보편의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절대 알 수 없는 분야가 존재한다. 마임의 영역도 나에겐 그랬다. 그저 텔레비전 예능에 출연한 연예인들의 개인기 정도로 얕은 지식으로 마임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분야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수십 년 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배우가 존재한다는 점도, 해당 공연을 통해 배우게 된다.
그렇게 마임 공연을 통해 즐거움을 얻다가도 문득, 삶에 대한 반성까지 나아가 본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몰두하며 표현해낼 무언가를 나는 가지고 있는가, 마임 장인들을 보며 내 삶을 뒤돌아본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다. 소박한 동숭무대 소극장을 벗어나, 다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혜화역 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원한 늦여름 바람을 맞고 거리 공연을 감상하며, 그렇게 마임 공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