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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팝스타 A의 수발든 썰 풉니다


프리랜서라. 이름만 들으면 퍽 여유로운 직업 같다. 그러나 실상 누군가 내게 돈을 지불하고 고용하지 않는 이상 그저 백수라 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매일을 견디는 것은 흡사 수행의 지경이고, 대답 없는 시간을 맥 놓고 기다리기엔 무섭게 쓸려나가는 통장 잔고를 감당하기 어렵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최저 시급의 알바를 지원해도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는데 그때 친한 친구를 통해 단기 알바 자리를 소개받았다. 한국에 내한하는 해외 스타들의 통역이자 가이드 같은 역할인데 단순히 통역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족이 되어야 하는 업무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뭐라도 해서 돈을 버는 게 중요했기에 이 업무에 대해 알아보기도 전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게 내 발등을 찧는 일이 될 줄이야.


담당자와 통화를 해보니 지정된 기간 동안 근무하는 단기알바로서 고정 금액을 받는 시스템이고 근무 시간의 경우에는 정확히 정해진 시간이 없지만, 일이 빨리 끝나면 조기 퇴근을 하는 시스템이라고 전달받았다. 운이 좋으면 일도 빨리 끝난다니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 했다. 담당자를 직접 만나지도, 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구두 협의된 상태에서 업무는 시작되었다.


근무 첫날부터 나는 여의도에 있는 한 5성급 호텔로 불려 갔다. 나의 업무는 통역보다도 팝스타의 수발을 드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내한을 이틀 앞둔 팝스타가 요구한 그 수많은 물품들을 직접 사러 가야 했는데, 물품 리스트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고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모두 한 군데에서 구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여의도 A 꽃집에 가서 그녀를 환영할 꽃바구니를 픽업하고, 유기농 베리, 스위트 칠리 나쵸, 불닭 소스, 충전기 등 온갖 잡다한 물품 수십 개를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그녀의 방에 세팅까지 마쳐놓아야 하는 것 내 미션이었다. 그 넓은 여의도를 2만 보 가까이 발로 뛰어다녀도 유기농 미니 당근 같은 것은 이 나라를 털어도 도통 구할 길이 없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체품이라도 채워 놓아야 했다.


여의도에 있는 대형 쇼핑몰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디든 가야 했다. 그녀가 특별히 요구한 디카페인 녹차의 경우는 연희동에 있는 특정 티룸에서만 파는 것이라 그걸 사러 여의도에서 또 연희동 까지 직접 가야 했으니까. 아무리 건장한 성인 남자라 해도 자가용도 없이 저 많은 물품을 전부 직접 들어서 옮기는 것 자체가 팔이 떨어나갈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만 애써 이를 악물었다.


오로지 발품을 팔아서 수십 가지의 물품을 홀로 구매하고 나니 이미 늦은 오후였는데 숨을 돌리기는커녕 바로 인천공항에 가야 했다. 인천공항에 가서 팝스타 B 씨와 그녀의 일행들을 공항에서 맞이하고 픽업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시간이 아닌 이상 이동에 필요한 교통비는 사비로 충당해야 해서 연희동에서 버스를 타고 급히 홍대로 가서 공항 철도를 타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팝스타의 경우 입국 수속 때부터 그를 담당하는 경호원들이 수속 및 경호를 담당하고, 출국장에 나오면 그때부터 내가 팝스타 일행을 인계받는 시스템인데 그래서 내부 경호원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팝스타 일행이 언제 도착해서 수속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바깥에서는 출국장에서 팝스타와 그녀의 일행들을 경호할 경호원들과 소통을 해야 했고 동시에 이 일행들을 호텔로 데리고 갈 기사님들과 소통을 해야 하는 골이 빠지는 일이었다.


아무튼 별 탈 없이 팝스타 B 일행을 호텔까지 인계할 수 있었고, 다음 날은 팝스타 A가 묵을 VIP룸을 꾸미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와중에도 팝스타 A가 추가적으로 요청한 물품들을 사느라 발에 불이 나게 온 동네를 쑤시고 다녀야 했고, 해외 스탭 누군가가 아프다고 해서 내과를 데려다주고 병원 통역까지 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 종일 VIP룸을 꾸미고 필요한 물품을 사대느라 하루가 지났고 이때까지도 나는 밥 먹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하루에 2만 보씩을 걸으며 스스로를 축내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 이틀을 보낸 다음 날에는 바로 그 팝스타 A를 공항에서 픽업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여의도 호텔에 가니 팝스타 A를 담당하는 미국인 경호원이 나를 기다린다. 경호원과 함께 인천 공항에 가서 팝스타 A와 그의 일행을 기다리는데 미국인 경호원의 말투나 눈빛에서 나를 하대하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불쾌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팝스타 A 일행을 호텔로 데려갈 기사가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오인한 경호원은 공항 한복판에서 쌍욕을 하며 분노하질 않나 쓸데없는 사소한 일에도 사사건건 본인의 명령대로 좌지우지하려 들어 업무가 갑절은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무대 뒤에서 중국인을 흉내 낸다며 희화하는 성대모사를 하고, 차량 기사님들의 얼굴을 동의도 없이 찍고 깔깔대는 등의 무례한 행동들이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니 분이 치밀었다.


일행들을 호텔에 무사히 모셔다 놓아도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팝스타의 매니저쯤 되는 여자가 갑자기 내게 네일아트에 필요한 리스트 십여 가지를 보내더니 당장 두 시간 안에 수십 개의 품목을 구해오라는 것이다. 또다시 발품을 팔아 서울 시내에 있는 네일아트 재료상을 죄다 뒤져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 주니 탈진하기 직전이었지만 몇 시간 후 바로 수도권 모처의 촬영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촬영장에서 지난 며칠간 내게 일을 지시했던 팀장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어떻냐고 여자가 내게 물었다. 애초에 내가 안내받은 업무 내용과 실제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달랐고, 일이 마치 일찍 끝날 것처럼 얘기했던 것과 달리 업무 시간도 너무 길다고 대답했다.


"ㅇㅇ님~ 어차피~ 포괄임금제에 묶이셨어요^^"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팀장이 말한다. 포괄임금제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더라. 애초에 정해진 금액을 받고 일하기로 했으면 시간제한 없이 고용주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합법이라는 것. 순간 전에 일하던 스타트업에서 만났던 디자인 팀장이 어디가 됐건 포괄임금제로 돈 주는 회사는 가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돈을 벌겠다는 급한 마음에 나는 포괄임금제의 덫에 걸린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스타의 내한에 누군가는 족히 최소 몇 억을 지불했겠지만, 그녀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자들은 알량한 금액에 포괄임금제라는 족쇄까지 묶여 실질적으로 최저 시급도 안 되는 금액을 받으며 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대학에서 노동학을 부전공하면서 수많은 노동자의 애환과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 배웠지만, 정작 내가 딛고 있는 사회에서 슈퍼을 노동자가 되어보니 텍스트로 배웠던 세상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허탈한 현실에 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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