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다영 Aug 03. 2022

사직서 대신 휴가원


  출근하면 제일 먼저 그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살핀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할 일이 많을수록 뇌의 한 부분이 지그시 조여지고 목덜미에 힘이 들어간다. 다른 부서에서 서류를 넘겨받아야 하거나 확인이 필요한 일이 섞여 있으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벌써 이십 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버겁다. 종일 뻐근한 눈으로 모니터와 서류를 번갈아 보다 보면 어떤 날은 몇 시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틈도 없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의 순위에서 물을 받아오거나 화장실에 가는 일은 번번이 뒤로 미뤄진다. 그럴 때 누가 말이라도 걸면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누군가 내 자리로 걸어오는 게 느껴질 때부터 짜증이 난다. 상사나 동료가 묻는 말에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로 짧고 퉁명스럽게 답한다. 그 때문에 상대가 민망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면서도 끝내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제발 나에게 말 걸지 말라는 심정을 가득 담아 표정과 목소리를 지어낸다. 마치 상대가 내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냉랭하게 대한다.

  이런 내가 나도 불편하다. 나의 어떤 모나고 못된 마음이 나를 이렇게 행동하게 하는 걸까. 왜 이렇게 형편없고 심술 맞게 사람을 대하는 걸까.

  회사에 있으면 자주 기분이 나빠진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나를 찾는 것 같고, 내게 일을 시키거나 부탁하거나, 기다려달라고 한 사람들은 자꾸만 자리를 비운다. 어쩐지 일하는 사람만 계속 일하는 것 같고, 그게 나인 것 같아서 억울하다. 내 눈에는 보이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그 일을 나도 못 본 척하려 애쓰지만, 결국 그 일은 언젠가 해야 할 일로 남아 나를 괴롭힌다. 시간 내 모든 일을 처리하는 내가 기계처럼 느껴질 때면 ‘그래, 나는 기계야. 그러니까 나한테 인간성은 기대하지 마.’하고 앙심을 품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 내 인간성이 훼손되는 기분이다. 그런 마음이 너무 꽉 들어차서 넘칠 것 같으면 너무 늦기 전에 휴가를 낸다.


  이십 년 전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연차는커녕 월차 휴가도 없는 회사가 많았다. 그때는 토요일에도 오후 서너 시까지는 근무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일을 많이 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여가 활동을 하거나 여행을 계획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공휴일을 제외하면 여름휴가가 일 년 중에 주어지는 유일한 휴가였다. 그조차 이틀, 길어야 사흘이 전부였다. 짧고 소중한 며칠을 알차게 즐기고 오면 몸도 마음도 더 지치곤 했다. 그렇게 인생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면서도 그때는 그게 이상한 줄 몰랐다. 다들 너무도 성실하고 착실하게 자신의 시간과 체력을 회사의 발전을 위해 바치곤 했다. 내 몸이 아픈 것보다 당장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일을 더 걱정했다.

  토요일 근무가 격주로 바뀌고, 차츰 주 5일 근무가 확대되던 무렵부터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근로자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었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같은 임금을 주면서 인력을 전만큼 쓸 수 없다는 사실이 꽤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말을 낀 월요일이나 금요일에는 휴가를 쓰지 못하게 하는 사장들이 더러 있었다. 월요일이야 보통 처리해야 할 일이 몰리니 그럴 수 있다지만, 별다른 이유도 없이 금요일에 휴가를 쓰지 못하게 하는 사장들은 지금 생각해도 참 옹졸하기 짝이 없다. 그런 시기를 지나 이제는 회사도 직원도 연차 휴가를 근로자의 마땅한 권리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직도 연차 휴가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하는 회사가 많지만, 내 경우에 그런 회사에는 입사를 지원하지 않는다. 회사를 선택할 때 자유로운 연차 사용은 내게 아주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이다.

  고정된 자세로 반복되는 노동을 견디다 보면 하루하루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말리고 등이 굽고 손목이 욱신거린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할까, 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당장에라도 사직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은 일을 그만둘 준비도, 그럴듯한 대책도 없으므로 진정하고 휴가원을 작성한다.


  이따금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주말을 끼고 연차 휴가를 쓰면 지방에 다녀온다. 남편과 짧게 여행을 하거나, 혼자서 지방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조금 길게 휴가를 내고 가까운 해외로 나가기도 한다. 더 자주 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주어진 휴가 일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썼다가는 연말쯤에 숨통이 막힐지도 모른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한 소중한 연차를 반으로 쪼개서 알뜰하게 사용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 시간 중 점심시간 한 시간을 빼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일한다. 보통은 그 시간을 반으로 나눠 오후 2시를 기점으로 오전과 오후 반차를 가른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아주 큰 장점은 오후 반차를 쓰면 12시에 퇴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규에도 기본적인 연차 규정만 있을 뿐, 반차 규정은 따로 없고 인수인계를 받을 때도 이런 사항은 전달받지 못했다. 다만 분위기랄까, 보이고 들리는 상황이 그렇기에 그런 줄로 알게 된 일 중 하나다. 12시가 되면 사람들은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반차 휴가를 낸 사람들에게 잘 들어가라고,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한다. 그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오전 반차를 쓰지 않는다. 모두가 큰 비밀 하나를 함께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갑자기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이의를 제기한다면 아마도 회사 안의 공기와 사람들의 낯빛이 전체적으로 톤 다운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그런 칙칙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기분 좋게 오후 반차를 쓴다.


  반차 휴가를 낸 날에는 주로 전시를 보러 간다. 최근에는 서초동의 갤러리 ‘도잉아트’에서 열린 이지은 작가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작가가 전해주는 휴양지의 나른하고 푸른 바다를 오래오래 들여다보는 동안, 그림 속 고요하고 여유롭고 느긋한 기운에 굳어있던 내 몸과 마음이 천천히 이완되는 것을 기분 좋게 느꼈다. 평일 오후에 미술관이나 전시장 안을 거닐며 작품을 관람하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시간이 몰랑몰랑해지는 것 같다. 한산한 거리에서 넉넉한 오후의 볕을 받고 있으면 공기마저 한층 부드럽게 느껴진다. 매일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짜증 날 일도 화날 일도 별로 없을 것만 같다. 당장 확인해야 할 서류도, 보내야 할 메일도 없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압박감도 부당함도 억울함도 느껴지지 않고 자유스러움만이 남는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은 상태에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핏 모두가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 자유를 매일 느끼며 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자기 시간을 오롯이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행복을 느낄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회사에 다니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돈을 버는 목적은 아마도 이런 오후를 더 자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A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