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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다영 Dec 25. 2021

저는 회사원입니다


내 직업은 이십 년째 회사원이다.


스무 살에 엄마 친구의 소개로 다녔던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총 열 개의 회사를 거쳤다. 이직하는 중간중간 길거나 짧게 휴식기를 가졌지만 한 번에 반년 넘게 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평생 한 직장에 다니다 정년퇴직을 하던 부모 세대와 달리 내 또래들을 보면 보통 삼 년에서 사 년 정도를 주기로 회사를 옮기는 것 같다. 이마저도 요즘은 긴 축에 속한다. 이제는 종종 면접자가 되어 이력서를 볼 일이 있는데, 경력들을 보면 한 회사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추세다. 면접자의 시선으로 이력서를 보면 근무 기간이 너무 짧은 것도, 너무 긴 것도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너무 짧으면 끈기가 없어 보이고, 너무 길면 업무능력의 폭이 한정돼 보인다.


어느 회사를 가던 부지런히 또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남들보다 일도 덜 하고 근무 태도도 좋지 않지만 무탈하게 매달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동료의 눈에는 보이는데 관리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조직은 주로 전자들에 의해 굴러가지만, 후자들은 쉽게 내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치지 않고 더 오래 회사에 남는 건 후자 쪽일 때도 있다. 제 몫의 일을 성실히 하는 직원은 결국 상대적 박탈감과 부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놀고먹는 부류에 속해보려 애도 써보지만, 기질상 할 일을 뻔히 눈앞에 두고는 쉽게 놀아지지 않는다. 분하게도 나는 이 부류에 속한다.


내게는 모범생 기질이 있다. 할 일은 당연히 잘해야 하고 누가 시키지 않은 일도 필요하다면 잘하려고 애쓴다. 그래서인지 자라거나 살면서 잔소리를 듣는 일이 별로 없었다.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나는 미리 잘했다. 업무에 필요할 것 같으면 책을 사거나 인터넷을 뒤져 독학했고, 더 필요하다면 학원을 다녔다.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튼 하려고 했다. 나는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 그 몫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열 개의 회사를 다녔는데, 나처럼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게 직장 생활에서 이루고 싶은 유일한 꿈이다. 그보다 먼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꿈이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한 지는 일 년 반이 막 지났는데, 체감상 한 삼 년은 다닌 것 같다. 입사 이후 꾸준히 업무량이 늘어서 요즘은 자주 야근을 한다. 근무 시간 내내 일을 하는데 일이 끝나지 않는다. 산뜻하게 마무리하고 가벼운 기분으로 퇴근을 한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며칠째 일을 잠깐 끊어놓고 집에 갔다가 오는 기분이랄까. 어느 날 문득, 내가 거의 이십 년째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가 다르니 앉아있는 장소는 물론 달라졌지만, 내 눈앞의 모니터 속 문자들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같은 화면 앞에서 시력 보호안경을 쓰고, 손목 보호용 마우스에 손목 보호대를 끼워가며, 목과 어깨 통증 때문에 도수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나는 늙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내가 회사원으로 살 줄은 몰랐다. 이십 대 초반에는 결혼하면 회사에 안 다니게 되는 건 줄 알았다. 나는 아빠보다 엄마의 노동에 의해 길러졌으면서도 그때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서른이 넘으면 작가가 될 테니, 그때까지만 회사에 다니면 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오래 회사원으로 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회사원은 꽤 안정적이고 체력적으로도 그나마 버틸만한 일이다. 게다가 이십 년을 이 생활에 맞춰 살았으니, 몸도 마음도 길들여져 있어 매일이 수월하다.


내가 회사에 다니는 이유는 하나다. 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그거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묘안이 생기지 않는 한 나는 계속해서 회사원일 것이다.

사회성은커녕 사회 공포증이 있는 내가 회사원이라는 직업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건, 다니고 있는 회사에 목매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를 옮겨 다니다 보니, 직장 생활이 정말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다음에는 괜찮겠지 하는 기대가 없다는 게 슬프지만, 적어도 나는 다음에 더 괜찮아져 있다. 해 본 일이 늘었고, 할 수 있는 일도 늘었다. 그러니 꼭 이 회사가 아니어도 된다. 어차피 내가 회사원으로써 벌 수 있는 돈의 범위는 정해져 있다. 그 범위 안에서 다른 조건들과 조율해가며 다닐만한 직장을 구하면 된다.

직장을 바꿔도 직업은 여전히 회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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