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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2024)

식구, 집밥

by 김민주

고작 (2024)



언니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먹어.

응, 알겠어, 알겠어.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지난 저녁, 엄마한테서 대뜸 전화가 와서 받았다. 20분 통화하는 사이에 ‘내일 언니 생일이니까’라는 말을 일곱 번, 아니 여덟 번인가 듣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니와 살기 시작한 후로 처음으로 맞는 언니의 생일이었다. 엄마의 유난에 생일이 뭐 별건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잠들기 직전까지 언니의 생일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니와 같이 살게 된 지 이제 1년 쯤 되었다. 성인이 되면서 혼자 살던 언니가 나를 따라서 서울로 온 것이다. 처음에 언니는 서울에 오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나는 어렴풋이 언니가 이곳에 오는 걸 참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 관심은 없었다. 어렴풋이, 언니가 나 때문에 죽도록 오기 싫었던 서울에 온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크게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언니가 서울에 오기 두어달 전 쯤, 한밤중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연락을 자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연결음이 한참 이어졌지만, 받지 않았다. 두어 시간 동안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 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에서 언니가 밝은 목소리로 웬일이야? 라고 물었고, 나는 말없이 울었다. 당황한 언니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나는 울음에 떠밀린 목소리로 나의 근황을 전했다. 언니는 아마도 그날 잠에 들지 못하고 밤을 샌 것 같았다.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다시 연락이 와서는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언니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계절이 시작할 무렵에 언니가 이사를 왔다.

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내가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며 인사를 하고, 내가 늦게까지 학교에서 과제를 하다가 돌아오는 날이나 늦은 시간에 학교에 가는 일이 생기면 꼭 옷을 껴입고 따라나와서 산책을 하곤 했다. 안 데려다 줘도 돼, 라고 말하면 심심해서 산책하려고, 라며 잘 돌아다니지도 않는 사람이 그 늦은 시간에 기어코 따라나오곤 했다. 내가 미대 건물에 들어가는 모습을 서서 쳐다보고 있다가 혼자 컴컴한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 술을 마시고 친구랑 싸워서 엉엉 울며 집에 들어온 날, 언니는 그냥 조용히 내 옆에서 등을 두드려 줬다. 친구를 다시 보러 가야겠다고 말하니, 소리내서 우는 내 손을 꼭 잡아주곤 친구를 찾아 같이 밤길을 헤맸다. 언니는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나오고, 눈이 오면 내 몫의 핫초코를 한 잔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지 않으려고 했다. 언니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언니는 20kg 가까이 살이 빠져서 빼짝 말라가고 있었다. 늦은 밤, 간간이 건넛방에서 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언니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나는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사람인데, 언니는 우산을 하나 더 들고 어두운 길을 걸어나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겨울이 끝날 무렵에 술에 잔뜩 취한 언니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나 좀 데리러 와 줘, 집에 못 가겠어, 하곤 전화가 왔다. 그날 언니는 방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면서 울었다. 미안하다면서. 뭐가 미안하다고.



새하얀 밥 위에 김을 잘라 만든 작고 동그란 눈 두 개와 웃는 입을 붙인다. 아침에 급하게 마트에서 사온 소고기를 넣고 끓인 미역국과 언니가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상에 차린다. 언니의 숟가락, 언니의 젓가락. 물 한 컵씩. 그리고 언니 방으로 가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언니를 깨웠다. 언니, 밥 먹자.


부옇게 뜬 얼굴로 비몽사몽 내 방으로 와서는 멍하니 밥상 위를 보고 서 있는다. 언니, 오늘 생일이잖아. 엄마가 미역국 끓여주라고 그랬어. 내 말을 듣곤 양팔을 벌리면서 우와, 소리를 치더니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왠지 흥이 올라 나도 바닥에 앉아 팔을 흔들면서 언니의 몸짓을 따라했다. 우리가 언제나 같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흠, 흠, 하면서 대충 흘려 부르면서.



언니는 가끔 혼자 방에서 운다. 나는 술에 잔뜩 취해서 언니 품에 매달려서 울고. 언니는 우산없이 축축하게 젖은 채로 집에 돌아와서는, 우산을 들고 나를 마중 나온다. 시린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오다가, 내 생각이 났을 때가 되어서야 핫초코 한 잔에 손을 녹인다. 그런데 언니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니는 괴상한 춤을 잘 춘다. 작은 밥상을 보고 금새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언니는 혼자서 우는 게 싫어서 내가 우는 걸 보면 가만히 울게 두지를 않는다. 언니는 밥 위에 놓여진 김 조각 얼굴을 보고 낄낄 웃는다. 나는 고작 그런 걸 한다. 김 한 장을 작게 잘라서 언니가 좋아하는 얼굴 표정을 그리는 일. 언니가 도로에 서서 집에 가지 못 하겠다면서 엉엉 울 때에 언니를 질질 끌어 집에 데려오는 일. 언니가 괴상한 춤을 추기 시작하면 같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일. 우리는 고작 그런 걸 하면서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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