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한 올

무엇이 흰머리가 되었나

by 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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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적 없던 흰머리를 발견했다. 남의 흰머리를 뽑아준 기억은 있어도, 내 머리통에서 자라난 흰머리를 본 기억은 없다. 그렇다. 나의 첫 흰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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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초대형 상상쟁이인 나는 이 흰머리에 무엇이 담겼을까, 무엇이 머릿속에 있다가 흰머리로 자라났을까, 그런 되도 않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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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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떽. 초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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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만에 찾은 병원. 나는 그간 술을 자주 마셔서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되었음을 실토하고, ADHD 약은 개복치라는 사실을 배우고 왔다.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잘 못 자거나, 리듬이 깨지거나, 춥거나, 덥거나, 이 뒤는 웃느라고 잘 못 들었는데, 아무튼 그런 것에 영향을 잘 받아서 약효가 잘 안 받곤 한다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약효가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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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써서... 잘... 해보겠습니다... 라고 자신없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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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냐 하셔서, 초반에 힘들었던 기억을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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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생활에 변화가 좀 있었는데요.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이번 주부터 쉬고 있었어요. 근데 그만두기 전에 막연한 불안감이 좀 있었는지, 기분이 좀 쳐지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회복이라는 주제로 글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저를 좀 건드린 것 같아요. 두 개가 맞물려서 좀 괴로웠던 게 아닐까, 제 추측이에요. 아무튼 그 후로 작업도 좀 천천히 하고, 그러면서 다시 기분이 올라오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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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정확하게 잘 보신 것 같아요. ADHD는 자신감을 가질 때 잘 살아요. 쭈굴쭈굴, 나는 안돼, 나는 못해, 하고 있으면 기분이 계속 쳐지고 빨려 들어가요. 자신감을 가지고 잘 할 수 있어, 좋아, 좋아하면 더 잘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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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좀 스스로에게 의심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다가도 한 번씩 이거 너무 과도한 거 아닌가? 이거 조증에서 보이는 과도한 자신감, 이런 거 아닌가? 나 괜찮나?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이런 불안감이 올라와요. 계속 의심하게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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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인지 아닌지는 제가 봐 드릴테니까, 자신감만 가지세요. 괜찮아요. 그래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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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인지 아닌지는 선생님이 봐주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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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웃으면서 진료를 받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울면서 달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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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자신감만 가져도 되는구나. 자신감만 들어도 되면, 다른 건 좀 내려놔도 되겠다. 퍽 무거웠던 걸 선생님이 들고 갔다. 감격스러워서 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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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의 흰머리에는 자신감을 심어 놓기로 했다. 검은 머리들 사이에서 흰머리가 쭈글쭈글 눈치 보느라 괴로웠을텐데도, 혼자 하얗게 나온 걸 보니 자신감이 들어있는 게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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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흰머리는 그냥 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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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맘이야. 자신감이 모여서 흰머리로 자라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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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뭔 소리야. 흰머리 뽑아 줄게, 나이 들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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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내 자신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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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면 어때. 흰머리가 되자고 다짐의 말을 남겨 놓으려다가, 그냥 김민주로 잘 살자고 해보련다. 나는 흰머리는 아니고, 김민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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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흰머리와 어떤 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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