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라는 이름의 혼란, 그리고 예정된 소명

by 김배우

열려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교육

평등은 언제부터 ‘품질을 포기하는 명분’이 되었을까.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으로 교육의 정의가 완성될 거라 믿었지만, 정작 우리가 외면한 건 ‘어떻게’ 배우고 ‘누가’ 곁에 있는가였다. 디지털 교과서를 나눠주며 교육의 문을 열었다 자부하지만, 그 앞에 선 아이들에겐 방향도, 감독도, 맥락도 없었다.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우리는 그 차이를 너무 오래 무시해왔다.

인문주의의 신화와 그 한계

인문주의는 인간을 중심에 두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 위에 문명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는 교육의 평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곧 공공성과 접근성 중심의 정책으로 기울었고,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뒤로 밀렸다. 교사는 점점 더 ‘감독자’가 아닌 ‘관리자’가 되었고, 학생은 스스로의 판단보다 시스템의 편의 속에 머물게 되었다.

칼뱅의 예정론과 오해된 통찰

칼뱅의 예정론은 오랫동안 기득권의 도구로만 읽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뉜다는 그 구절 앞에서,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장치만을 보았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엔, ‘어차피 선택받았다면, 지금의 삶을 소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내면의 부름이 있었다. 예정론은 나태를 부추기는 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문주의가 실패한 자리에, 책임과 절제, 그리고 내면의 긴장을 심어주었다.

세상은 인간의 가능성보다, 한계를 자각한 자들에 의해 진보했는지도 모른다. 그 한계는 인간을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차원의 존재감을 깨닫게 만든다.

다시 묻기, 다시 소명으로

지금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은 본래 선한가, 아니면 악함을 자각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 기술은 우리를 연결시켰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는 아이들을 지켜줄 눈은 점점 사라졌다. 기계는 감독이 되지 못하고, 평등은 더 이상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시,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가’를 묻는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 예정론은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다. 그건 세상의 가치가 흔들릴 때마다, 내 삶의 방향을 되짚게 하는 내면의 나침반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스템의 확장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깃든 소명감의 회복이다. 교회는 다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더 나은 인간이 아니라, 더 깨어 있는 영혼을 길러내는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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