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다 읽었다. 이 책은 어린이 책 편집자였던 작가가 독서교실을 열어 어린이들을 독서 지도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엮은 에세이다.
내가 가끔 책을 읽고 쓰곤 하는 독후감을 읽으셨던 분이라면 쉽게 내 평소의 읽기와는 좀 다른 방향의 책이라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이다. 나는 대개 철학과 과학, 우주론, 정신분석, 혹은 멀리 가봐야 예술이나 문학 관련된 책을 읽는다. 에세이는 내 읽기에서는 좀 낯선 것이다.
이 책은 #트레바리 클럽 [바깥의 사유]에 놀러가기를 하기 위해 읽었다. [바깥의 사유]는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의 전/현직 멤버 세 분이 운영하는 클럽이다. 이를테면 [보탬]과는 자매 관계 정도 되는 클럽이다.
클럽의 이름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바깥의 사유]는 주류 담론에서 밀려나 바깥으로 소외된 사유들을 주로 다루는 클럽이다. 페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장애와 몸 담론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번 ‘어린이’라는 소재도 비슷한 맥락에서 선택되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린이는 주류 담론에서 멀다. 어른들에게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밝게 자라야 할‘, ’열심히 뛰놀고 공부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늘 바깥 담론들 보다는 주류 담론을 읽고, 우리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정상철학과 정상과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재미없는 남자-어른인 나는, 이번에도 재미없는 독후감을 쓸 것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관계 맺음을 대-상으로 하여, 라캉의 상상계를 설명하는 글이 될 것이다.
“언제는요, 피구 할 때 제가 제일 마지막에 남았거든요. 그때 한 이십 번쯤 피했을걸요? 애들이 막 저만 남으니까 저희 팀 애들은 응원하고요, 다른 팀 애들은 화난 것처럼 던졌는데 제가 받았거든요.“
아람이가 피구를 하다 스무 번이나 넘게 상대 팀이 던진 공을 피하고, 공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받아내기도 했다. 아람이의 영웅담은 잠시 눈에서 공을 놓친 사이 비겁하게 등 뒤에서 날아온 공에 발 뒤꿈치를 맞으며 끝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작가는 묻는다. 정말 아람이가 공을 스무 번 넘게 피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작가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어느 어린이나 피구를 하며 ‘날아오는 공을’ ‘몇 번이나 피한’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어린이 특유의 허세와 부풀리기에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며 웃는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이미 내 독후감의 제목은 정해졌었다) 정신분석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아람이의 이야기에서 조금 다른 것을 읽을 수 있다.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어린이와 어른은 살아가는 세계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이 서로 다르다. 어린이의 세계는 상상계에서, 어른의 세계는 상징계에서 출발한다.
지금 당장은 무슨 말인지 조금 의아할 것이다. 상상계와 상징계라니.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끝까지 따라오면 라캉 정신분석의 날카로운 일면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기가 맨 처음 태어났을 때, 아기의 감각은 온전하지 않다.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성인처럼 동작하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기의 시력은, 성인 기준으로는 실명에 가까운 초보적인 수준이다.
이때 아기는 자신과 세계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기에게는 자신이 곧 세상이다. 아기의 세상에는 배고픔, 따뜻함, 졸림, 축축함, 짜증 같은 감정과 감각의 소용돌이만이 있다. 아기는 상상한다. 아 이게 세상이로구나. 세상은 나구나. 내가 느끼는 것으로 가득하구나. 그런데 배가 고프구나. 배가 고프다. 아아 배가 고프다(운다). 아, 뭔가 따뜻한 것이 들어온다. 배가 고픈 감정이 줄어드는구나. 그렇구나. 내가 뭔가를 느끼면 문제는 해결되는구나.
아기는 울어서 자신의 요구를 엄마에게 전달한다. 엄마는 늘 아기의 요구를 적절하게 해결해 준다. 배가 고파서 우는 것 같으면 젖을 주고, 응가를 해서 기저귀가 축축해졌으면 기저귀를 갈아준다. 하지만 아기는 알지 못한다. 아기는 자신과 엄마를 구분하지도 못한다. 아기는 그저 욕구를 느끼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상상 외에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기는 오로지 자신의 상상만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The Imaginary)다.
갓 태어난 아기의 세계는 상상계로부터 출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완전히 상상계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아기는 언제까지 상상계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아기는 훈육의 과정을 통해 사회화될 것이다. 그 과정이 바로 상징계(The Symbolic)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훈육의 과정을 거친다. 대개는 엄마와 아빠를 통해서다. 아이는 엄마가 건네는 천, 인형, 공 같은 것들을 만지고 살펴보며 0세 훈육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은 12개월쯤 일어난다.
아기는 12개월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욕구가 거부되는 것을 경험한다. 엄마가 따뜻한 젖 대신 차가운 숟가락을 자신의 입에 집어넣는 것이다. 아기는 젖을 달라며 숟가락을 거부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엄마 젖처럼 꿀꺽꿀꺽 삼킬 수도 없는 것을 나의 본능과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어야 한다. 엄마의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18개월이 되면 배변훈련이 시작된다. 배변욕을 느끼지도 않는데 엄마는 아기를 자꾸 변기에 앉힌다. 아기는 욕구가 거부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의 본능을 통제하는 외부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상징계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세계. 당신이 지켜야 하는 법률이 있고, 당신이 지켜야 하는 출근 시간이 있고, 당신이 지켜야 하는 도덕과 규범과 예의와 매너가 있는 세계. 당신의 상상에서 출발해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당신의 외부에서 출발하여 당신이 오직 배우고, 또한 배운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세계.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다. 상징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렇게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의 규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사회화된 세계를 왜 상징계라고 부르는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을 텐데, 정말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이 독후감 보다 긴 글을 더 써야 하기 때문에 다른 문서를 댓글에 링크로 제공하겠다)
“용돈을 탈진했어요.”
예지는 좋아하는 피규어를 사기 위해 모아 왔던 용돈을 모두 썼다는 말을 이렇게 한다. 아마 최근에 ‘탕진하다’라는 표현을 배웠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언어는 상징계에 속하는 것으로(우리는 상상으로 언어를 만들어낼 수 없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예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사회화되고 있음을, 상징계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화를 마쳤음을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보면, 어린이는 그 중간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린이는 상징계로 상상계를 메워가는 중이지만, 아직 어린이에겐 상상계가 상당 부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완두콩이는 어디로도 도망갈 데가 없다는 이유로 제일 지진을 무서워하고, 도토리는 도중에 끼일까 봐 걱정되어 지하철 개찰구를 무서워한다. 땅콩이는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고, 녹두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한다. 처음엔 별로 무서운 게 없다고 말하던 율무도 결국 피에로가 무섭다고 한다. 이렇게 공포의 대상이 모두 다른 것도 어린이들의 특징이다.
상징계는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겹치는 경향이 있다. 나도 당신도 출근을 할 것이고, 그 이유는 나도 당신도 월급날 급여를 받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상상계는 상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완전히 개인화되어 있다. 어린이들 각자가 느끼는 다양한 공포는 상상계가 동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 이제 독후감 서두에 썼던 말, 어린이의 세계는 상상계에서 출발하고 어른의 세계는 상징계에서 출발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우리에겐 상상계가 남아 있지 않은 걸까? 우리는 완전히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에서만 살아가게 된 걸까?
그렇지 않다. 상상계는 우리가 세상을 배우고 사회화 과정을 겪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늘 상상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김대리가 옆 부서 최대리에게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자신은 썸을 타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나는 김대리에게 최대리는 누구한테나 친절하니까 그런 오해를 가끔 사는 것 같다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런 일도 상상계가 동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김대리는 최대리와 자신이 썸을 타고 있다고 상상했다. 하지만 최대리의 상상 속에서는 아니었다. 최대리의 상상으로는 그 둘은 철저히 업무 때문에 협업하는 사이였을 뿐이었다. 또한 김대리는 그와 나를 자신의 실패한 연애담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상상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담배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잡담이나 나누는 별로 친분 없는 동료로 그 와의 관계를 상상하고 있었다. 라캉학파 정신분석학자인 브루스 핑크는 이러한 관계를 '상상적 관계'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TV에 나온 어린이가 자신을 “OO초등학교 O학년 O반 OOO”이라고 소개하는 장면 같은 걸 보면 마음이 조금 아프다. 현대의 어린이들은 너무 빨리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에 진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어린이들은 상징계 안의 좌표를 부여받고, 자신이 허락된 그 좌표에서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오와 열을 맞추어 서야 한다.
이 책이 내게 내내 따뜻하게 읽혔던 까닭은, (김소영 작가가 라캉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내 어린이들의 상상계를 긍정해 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상상계를 미숙한 것이나 모자란 것,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스무 번 넘도록 피구 공을 피한 아람이의 얘기로 말이다. 아람이가 한 말은 허세나 부풀림이었을까?
사실 허세와 부풀림 같은 단어는 상징계에 속한 단어다. 허세와 부풀림은 고정해야 하는 사실(몇 회나 공을 피했는가)이 있고, 그 고정된 사실과 발화(parole)된 숫자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서 존재한다.
어린이의 세계는 불완전하다. 어린이의 세계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뒤섞여 있다. 아람이는 원 안에 혼자 남아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로 정신없이 공을 피하고 있었다. 아람이의 상상계에서 아람이는 스무 번 넘게 공을 피하고 있었을 수 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한다면 아람이는 자신이 경험했던 세계를 사실대로 기술했을 뿐이다. 그것을 허세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상계를 상징계의 언어로 재단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작가도 이 지점을 눈치채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이 특유의 허세나 부풀림엔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쓰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이의 상상계를 상징계로 재단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이런 말들에서 (이제 어른이 되어 작가와 우리에게 희박해진) 상상계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무시할 수 없다‘고 쓴 그 매력의 정체다.
다른 모임에 놀러가기 위해 독후감을 쓴 적이 별로 없어서 난이도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어떻게 어떻게 쉽게 써진 것 같다. 혹시 이 글을 [바깥] 멤버가 읽는다면, 라캉에 대한 쉬운 소개글이 되었기를 바란다.
끝으로 사족을 하나 더 달면, 라캉이 말하는, 우리를 구성하는 세계가 하나 더 있다. 라캉의 삼계(三界)를 구성하는 마지막 세계는 실재계(The Real)이다. 관련된 글을 링크하며 긴 독후감을 마친다.
https://brunch.co.kr/@iyooha/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