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뇌과학>, 엘리에저 J. 스턴버그
먼저 확실하게 해 두고 시작할 것이 있다. 과학적,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영혼은 없다. 우리 몸의 99%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으로 되어 있다. 남은 1%의 85%는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으로 되어 있다. 분자 단위로 우리를 완전히 분해하면 분자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고분자 화합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데카르트도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 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는 우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안다. 잠이 들었을 때는 사라지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분명히 있다. 샤워기를 틀었을 때는 샤워물의 뜨거움을 느끼고, 세수를 할 때는 비누거품의 부드러움도 느낀다. 아침으로 준비한 계란 스크램블의 고소함과 우유 한 잔의 시원함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괴리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나는 존재할 수 없는데, 그저 고분자 화합물일 뿐인 내가 어떻게 스스로 ‘나’를, 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호주의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에 대한 문제를 둘로 나누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다.
차머스는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화학적 현상과 정보 처리 메커니즘을 쉬운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저 사과를 빨갛다고 느끼는가? 어제 먹었던 초콜릿의 맛을 우리는 어떻게 지금 다시 떠올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는 차머스가 보기엔 설명하기 쉬운 문제다. 차머스는 뇌과학이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떠한 감각을 경험하는 것, 그 경험한 감각을 기반으로 뇌 안의 전기신호들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차머스는 '어려운 문제'라고 규정한다. (엄밀히 말하면 감각질(qualia)과 의식은 다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이 문서에서는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므로 딱히 구분하지 않을 예정이다) 우리는 모두 의식을, 그러니까 '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사과를 보고 있고, 어제 초콜릿을 먹었으며, 언어를 사용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나'다. 나는 통합적 의미에서 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차머스는 우리 인류는 어째서 이러한 '나'가 존재하는지는 우리는 설명할 수 없고, 뇌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차머스에게는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이 간단한 구분만으로 차머스는 심리철학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이 책의 저자, 엘리에저 J. 스턴버그는 미국의 신경 의학자로, 어린 시절에는 차머스처럼 심리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가 되는 대신 신경 의학을 공부했다. 의사가 되었지만 스턴버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 가졌던 질문 근처를 맴돌고 있다. 그 질문은 우리가 위에서 했던 질문과 같다.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바로 데이비드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다. 스턴버그는 고도로 형이상학적 질문처럼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해 철학적이 아니라 과학적, 의학적으로 답하는 길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이 책, <무의식의 뇌과학>은 그 시도를 담고 있는 책이다.
뇌과학이 말하는 ‘나’의 존재 방식은 어떠할까? 우리는 과학으로 의식의 신비를 설명해 낼 수 있을까?
이제 시작해 보자. 늘 그렇지만 정말 쉽게 설명할 것이다.
먼저 오른쪽 눈을 감자. 그리고 초점을 위 십자(+)에 맞추자. 만약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초점을 유지한 채 스마트폰을 눈 가까이, 혹은 멀리 움직여 보자. 모니터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머리를 직접 앞 뒤로 움직여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왼쪽의 검은 원이 사라질 것이다.
같은 원리로, 이번엔 아래쪽 십자에 초점을 맞추고 스마트폰 혹은 머리를 움직여 보자. 어떤 지점에서 왼쪽의 단절된 선이 연결되어 보일 것이다.
우리의 눈, 즉 수정체의 어느 특정 위치엔 시신경이 모여 눈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다. 여기엔 추상체나 간상체가 분포되지 않아 상이 맺히지 않는다. 이 지점을 맹점(盲點, blind spot)이라고 한다. 맹점 때문에 시각 정보에는 결손이 생긴다. 방금 확인했듯, 검은 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맹점에 닿았으니 원이 사라지는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래 그림에서 선은 왜 연결되는가? 결손 된 정보가 있다면 결손 된 채 놓아두지 않고 왜 없었던 정보가 추가되는가?
이것이 우리의 뇌가 동작하는 방식이다. 뇌는 진실보다 내적 정합성을 더 선호한다. 뇌는 맹점 주변 시신경에서 온 신호를 이용하여 최대한 정합성이 확보된 상을 만들어낸다. 검은 원이 사라지는 것은 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주변에 아무런 그림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선이 연결된 것은 맹점 주변에 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 뇌는 눈이 본 것을 지각하지 않는다. 뇌는 눈이 제공한 것을 정보로, 스스로 지각을 생성해 낸다. 아래의 그림을 보자.
네커 큐브(necker cube)라고 불리는 이 도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왼쪽 아래로 돌출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오른쪽 아래로 돌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시각과 지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망막에 맺힌 이미지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두뇌의 해석에 따라 우리는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뇌는 이처럼, 시각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지각을 만들어낸다.
이제 뇌가 생각보다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동작한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스턴버그의 환자였던 여든일곱 살의 바일러씨는 황반변성을 앓아 시력을 잃었다. 그런데 바일러씨가 갑자기 시력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지난 6주 동안 바일러씨는 부엌에서 곰을 보기도 하고, 거실 카펫에서 자라난 풀을 뜯어먹는 소들도 보았다. 바일러씨의 침실과 거실 사이 벽을 뚫고 블루피시 떼가 지나다닌다고도 한다.
바일러씨는 정밀 검사에서 치매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바일러씨의 병명은 찰스 보닛 증후군이다.
찰스 보닛 증후군을 앓는 많은 환자들은 생생한 환각을 경험한다. 바일러씨가 보는 소와 블루피시는 실제 소와 블루피시보다도 더욱 실제 같다. 바로 위에서 우리는 맹점 영역에 닿아 결손 된 시각 정보를 뇌가 생성해 내는 것을 보았다. 찰스 보닛 증후군의 동작 원리도 같다. 바일러씨의 뇌는 맹점 영역뿐만이 아니라 시각 전체를 생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소와 블루피시를 보는 것은 바일러씨뿐만이 아니다. 이 환상은 우리에게도 나타난다. 당신의 카펫에도 소가 앉아 있고, 나의 거실 벽을 통과하는 블루피시도 있다. 우리가 그 소와 블루피시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고위시각중추에게 망막에 닿은 소와 블루피시의 형상이 없음을 망막과 초기 감각 경로상의 세포들이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포들이 손상되면 ‘그 형상이 없다’는 신호 또한 제거된다. 그 결과 찰스 보닛 증후군 환자들은 생생한 환각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매번 우리가 사물을 접할 때마다, 시각체계의 스무고개가 시작된다. 단편적인 증거들이 주어지면 고위중추가 묻는다. ‘흠, 이것은 동물인가요?’ 이어서 ‘포유동물인가요?’ ‘고양이인가요?’ 하고 묻는다. 그 후 고위시각중추는 부분적으로 가장 적합한 대답을 찾아내어 하위 시각 영역으로 보낸다. 이런 식으로 초기에 빈약했던 이미지가 채워 넣어지는 것이다.
가끔 지하철 맞은편에 앉는 남자가 헤어진 전 남친으로 보여 깜짝 놀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 다시 그 남자를 보면 머리모양과 입은 옷 스타일이 조금 닮았을 뿐, 전혀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안심하게 된다. 같은 증상이다. 당신의 감각 세포들이 ‘그 남자가 아니‘라는 신호를 뇌에게 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자리에서 전남친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찰스 보닛 증후군의 원리다.
과장되게 말하면 실은 우리는 언제나 환각을 겪고 있다. 우리가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감각적 입력에 수많은 환각 중 가장 적합한 환각을 뇌가 선택함으로써 만들어진다. 바일러씨의 경우는, 그것이 환상임을 확인해 주는 시각적 자극이 없기에 무제한적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간지럼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스스로를 아무리 간지럽혀도 간지럼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가 예고 없이 등 뒤에서 내 갈비뼈를 쿡 찌른다면 나는 깜짝 놀라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내가 나를 간지럼 태울 수 없는 이유는 뇌가 운동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곧 이러한 감각이 느껴질 거야’라는 예측 신호를 감각 피질에 보내 그 느낌을 미리 상쇄(감쇄) 시키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는데(놀랍게도 진짜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조이스틱을 로봇팔에 연결한다. 처음엔 피험자들이 조이스틱을 조작하는 즉시 로봇팔이 피험자를 간지럽혔다. 예상한 대로 피험자들은 간지럼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될수록 점점 피험자들의 조작과 로봇팔의 동작 사이에 차이가 생겼다. 그러자 피험자들은 점점 간지럼을 느꼈다. 감각 피질에 도착한 예측 신호와 실제 입력된 촉각 패턴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이것이 조현병 환자가 환청을 경험하는 원리라고 말한다.
혼잣말을 할 때가 있는가? 나는 과거 신입사원 시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부장님이 하루 종일 혼잣말을 하는 것이 참 듣기 싫었다. 부장님의 혼잣말은 업무적인 것부터 취미에 대한 것(대개는 골프에 대한 것),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것까지 이어졌다.
우리 부장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무심코 혼잣말을 한다. 뭔가 집에 놓고 나온 것을 깨달았을 때, “아 맞다!”라고 외치기도 하고, 책을 읽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오면 “말도 안 돼.”라고 말하기도 한다. 길을 찾다가 ”은행을 끼고 돌아가서 두 번째 골목에 편의점이... 아, 저기다. “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대개 이러한 혼잣말은 하고 싶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도해서 발화한 말이 아니다. 이런 혼잣말들은 대개는 그냥 나온다. 이러한 언어를 비발화성 언어(subvocal speech)라고 한다.
뇌는 뚜렷하게 구분된 언어 영역과 지시 사항을 언어 근육으로 전달하는 방대한 신경 경로를 이용해 머릿속의 사적 언어를 포함해 모든 언어를 처리한다. 이런 메커니즘에 언어 근육이 자극을 받아 수축될 때 생각은 비발화성 언어로 바뀐다. 하지만 보통은 이 자극은 매우 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들릴만한 크기의 소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 루이스 굴드는 조현병 환자가 겪는 환청이 이 비발화성 언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냈다. 루이스 굴드의 추측은 이러했다. 혹시 조현병 환자들이 겪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실은 단지 언어 근육이 무심코 중얼거리며 나오는 소리가 아닐까? 굴드는 실험을 진행했다.
마흔여섯 살의 리사는 망상형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잦은 환청에 시달리는 그녀는 러시아 정부의 스파이가 자신을 감시한다고 생각했다. 굴드는 그녀의 목 피부에 소형 마이크를 붙였다. 그녀가 비발화성 언어를 발화한다면 마이크를 통해 소리가 증폭될 것이다. 헤드폰을 켠 굴드는 깜짝 놀랐다. “비행기... 그래. 저 사람들이 누군지 알겠어. 그리고 그 여자도 그걸 잘 알아.”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속삭임: 그 여자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 그녀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 여자는 아주 현명해.
리사: 목소리가 다시 들려요.
속삭임: 그 여자도 알아. 그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야. 그 여자는 비행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리사: 그들은 내가 항공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하네요.
놀랍게도 굴드는 리사가 겪는 환청을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었다. 굴드의 예상대로 리사의 환청은 비발화성 언어였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위에서 우리도 혼잣말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도 리사와 마찬가지로 비발화성 언어를 발화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목소리를 타인의 목소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우리가 발화성 언어 혹은 비발화성 언어를 발화할 때, ‘곧 이러한 소리가 들릴 거야’라는 예측 신호를 감각 피질에 보내 그 소리를 미리 상쇄(감쇄) 시키기 때문이다. 간지럼의 원리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망상형 조현병 환자의 경우 바로 이 예측 신호가 발생하지 않는다. ‘곧 이러한 소리가 들릴 거야’라는 신호가 감각 피질에 도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현병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발화한 비발화성 언어를 생생하게 듣는다. 리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 소리는 분명히 있다. 다만 말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정합성 높은 해석은 무엇인가? 누군가 내 머릿속에 칩을 심었고, 그 칩을 통해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망상형 조현병 환자가 생생한 환청을 경험하는 동시에 그것을 망상화하는 원리다.
물론 우리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야’ 같은 혼잣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하지만 그 혼잣말이 왜 생생한 환청으로 들리는지는 이제 과학이 해설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예측 신호가 감각 피질에 도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조현병 환자는 스스로를 간지럼태울 수 있는가? 이 절을 시작할 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간지럽힐 수 없는 까닭은 예측 신호 때문이라고 했다. 예측 신호를 발생시키는 기능이 없는 조현병 환자는 그렇다면 스스로를 간지럽힐 수 있을까? 정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조현병 환자는 스스로를 간지럽힐 수 있다. 이 또한 실험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간단한 것부터 복잡한 것까지 여러 개의 사례들을 들고 있지만, 스턴버그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한결같다. 뇌는 사실이나 진실에 관심이 없으며, 단지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답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말이다.
뇌과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작화증(Confabulation)이다.
쉰다섯 살의 월터는 집 안을 걷다가 벽에 부딪히고, 커피잔을 잡는다며 꽃병을 쓰러뜨렸다. 누군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거기에 가족 중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가족들은 월터에게 시력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월터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의사: 월터씨,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월터: 아뇨, 저는 불편한 데가 없습니다.
의사: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나요?
월터: 아뇨, 끄떡없습니다.
의사: (펜을 보여주며) 이게 뭔지 말해보시겠어요?
월터: 선생님, 방이 너무 어둡잖아요, 이런 곳에서는 아무것도 안보이죠.
의사: (방은 햇빛으로 가득했지만 의사는 굳이 전등 스위치를 켰다) 좋습니다. 불을 켰습니다. 이제 이게 뭔지 보이시나요?
월터: 선생님, 저는 선생님과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월터의 진단명은 안톤 증후군이다. 이는 실명한 사람이 자신이 실명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희귀한 질환이다. 안톤 증후군 환자는 시각에 관련된 실수를 하면 대수롭지 않은 듯 변명을 한다. “안경을 안 써서 그래”, “햇빛이 눈에 부셔서 그래”와 같이 말이다. 중요한 것은 월터와 안톤 증후군 환자들은 말을 만들어 낸다는(작화증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다중 인격 장애를 겪는 분열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최면이 많이 쓰인다. (지면상 이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다중 인격 장애는 일종의 자기 최면이라는 것이 현대 신경 과학의 분석이다. 이 내용 역시 무척 흥미로운데, 궁금한 분들은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그런데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면 멀쩡한 사람도 작화증을 겪는다.
최면술사: (최면이 걸린 상태로) 당신은 ‘독일’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창문을 열고 싶어 질겁니다.
최면술사는 먼저 이렇게 암시를 하고 피험자를 원래대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리고 혼자서 5분 정도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문득 독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되면 피험자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연다.
피험자: 방에 먼지가 많고 좀 답답하네요. 창문을 열어도 되겠죠?
피험자는 최면술사의 암시 때문에 창문을 열어야 한다는 명령이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하는 의식은 작화증을 겪는다. 창문을 열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른 사례들도 많지만, 마지막 작화증 사례로는 뇌량 절단 환자에 대한 예를 들어야겠다.
좌뇌와 우뇌 사이에는 두 두뇌를 연결하는 뇌량(corpus callosum)이라고 부르는 신경세포 다발이 있다. 뇌전증은 한쪽 뇌에서 발생한 전기 폭풍이 다른 뇌로 건너가며 발생하기 때문에 뇌량을 절단해서 이 연결을 끊으면 뇌전증 환자에게는 기적 같은 발작 소멸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 뇌량 절제술을 받게 되면 분리뇌 증후군이라고 하는 기이한 부작용을 겪게 된다.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과 마이클 가자니가 같은 분리뇌 증후군 연구자들은 특수한 안경을 제작하여 뇌량 절단 환자를 연구한다. 이 안경을 사용하면 한쪽 뇌에만 특정한 단어나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 (좌뇌는 오른쪽 눈과, 우뇌는 왼쪽 눈과 연결되어 있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뇌량 절단 환자의 좌뇌에게 문장을 보여주면 환자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 언어 기능이 좌뇌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문장을 우뇌에게만 보여주면 환자는 그 문장을 읽을 수 없다.
또 다른 실험에서 가자니가는 분리된 환자의 우뇌에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환자는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가자니가는 환자를 잠시 제지하며 왜 일어나서 걸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 콜라를 가지러 가는 거예요.”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는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이 입력된 것을 모른다. 그래서 환자는 작화증 증상을 보인다. 나는 실험 중 일어나 걸었고, 평소에 콜라를 즐겨 마셨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합리적인 것은 무엇인가? 바로 콜라를 가지러 간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는 아니지만 뇌량 절단 환자의 작화증 증상에 관련된 실험은 다른 책에도 자주 등장한다. 라마찬드란 박사는 어떤 뇌량 절단 환자의 우뇌에게 ‘바나나’라는 글자를 보여줬다. 우뇌는 왼손을 담당하는데, 왼손 앞에 펜과 종이를 두자 환자는 자연스럽게 바나나를 그렸다. 그런데 ‘왜 바나나‘를 그렸냐고 묻자 환자는 작화증 증상을 보인다. ’왼손으로 그리기 쉬운 것이 바나나라서 그렸다‘고 말이다.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는 ’바나나‘라 입력된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작화증은 거짓말과는 다르다. 찰스 보닛 증후군 환자가 생생한 환각을 경험하는 것처럼, 조현병 환자가 생생한 환청을 경험하는 것처럼, 작화증을 경험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바일러씨의 소와 블루피시가 바일러씨에겐 진짜인 것처럼, 월터가 자신의 시력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처럼, 뇌량 절단 환자들은 콜라를 가지러 간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그리기 쉬운 것이 바나나라서 그렸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환자들의 뇌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왜 찰스 보닛 증후군 환자들은 생생한 환각을 만들어 내고, 안톤 증후군 환자들은 시각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 내고, 작화증 환자들은 그럴 듯 한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저자인 엘리에저 스턴버그는 그것이 바로 뇌의 동작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원제는 ‘뉴로로직(NeuroLogic, 신경논리)'인데, 스턴버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인간의 뇌는 진실보다 내적 정합성을 더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턴버그는 그 동작 방식에 ‘신경논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경논리는 이 내적 정합성을 지킬 수 있다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타인에게도, 당연히 우리 스스로에게도.
우리의 뇌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 뇌가 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다.
예상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 거대한 거짓말의 정체는 바로, 우리 안에 단일하고 통합된 ‘나(Self)’라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나’라는 주인이 앉아서,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보고 받고 팔다리에게 명령을 내리며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스턴버그와 신경과학자들의 연구가 가리키는 방향은 선명하고 명확하다. 뇌 속에 그런 주인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기관들이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끌벅적한 시장통에 가깝다. 나는 지금 세 시간째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동시에 팔목이 좀 아프고, 커피를 많이 마셔서 속이 쓰린데, 조만간 일어나서 화장실을 좀 가고 싶고, 콧등이 가렵다. 언제 꼬았는지 모르겠는데 왼 발을 오른 무릎 위에 앉아 두고 있어 좀 저리다. 사실 이 모든 감각들을 동시에,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느끼고 있다면 우리의 머릿속은 정말로 시장통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혼란스러운 아우성을 그대로 느끼지 않는다. 뇌가 모든 파편화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꿰매어, ‘나’라는 주인공이 겪는 일관된 이야기로 편집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롯이 이 글을 쓰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선 실험에서 콜라를 가지러 간다고 믿었던 환자처럼, 그리기 쉬워서 바나나를 그렸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환자처럼, 우리는 매 순간 뇌가 만들어내는 ‘나’라는 작화증 속에 살고 있다. 어제 와인을 마셨던 나, 도서관에 앉아 밀린 숙제처럼 독후감을 쓰고 있는 나, 내일 출근을 하면 팀 주간회의를 주재해야 하는 내가 동일한 존재라는 느낌. 이 연속성(Continuity)이야말로 뇌가 수행하는 정교한 신경논리의 최종 결과물이다. 나는 뇌의 거짓말 때문에 살아가게 된다. 잘 생각해 보라. 당신이 당신임을 모르게 된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이 책을 통해 스턴버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뇌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해서다. 진실보다는 정합성을, 팩트보다는 스토리를 선택하는 뇌의 그 집요하고 정교한 논리 덕분에 우리는 무질서한 신경 신호의 폭풍 속에서도 ‘나’라는 단단한 환상을 딛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서 과학적, 물리학적 관점에서는 영혼은 없다고 했다. 분자 단위로 우리를 완전히 분해하면 여전히 분자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저 고분자 화합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뇌는 이 고분자 화합물에 불과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을 모두 꿰어 ‘나’라는 통합적 이야기(Narrative)로 매 순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거짓말에 대해 오히려 경이로워해야 한다. 이 환상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단단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말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분자 단위로 분해할 수 있는 고분화 화합물이 아니다. 우리는 뇌가 만들어낸 장대하고 아름다운 픽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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