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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문제'에 대한 다른 관점

<느끼고 아는 존재>, 안토니오 다마지오

by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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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니체의 단편 에세이 <도덕 외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을 읽고 있다. 연휴에 마저 읽으려고 찾아보니 아뿔싸 회사에 놓고 온 모양이다. 밀린 독후감을 쓰라는 계시인가. (누가 빌려준 것도 아닌데 나는 늘 글빚에 쫓긴다) 장난스럽게 이 얘기를 페북에 올렸더니 내 재미없는 글의 드문 독자이신 어느 분이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 독후감을 써달라고 하신다.


이 책을 한 줄로 줄이면 "의식은 설명할 수 있으며, 의식은 감각-신체-인지 전체 과정의 결과로 출현한다"라는 것이다. 즉 다마지오에게 의식은 존재가 아니라 결과다. 물론 이 이야기도 놀라운 이야기지만, 그것만 알고 덮기엔 아쉬운 책이다. 사실은 심리철학사 전체의 맥락을 놓고 봐야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마지오가 데이비드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를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으로 반박하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차머스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조금 길 수 있지만 아마 흥미로운 글이 될 것이다.



IMG_0169.JPEG 차머스는 한참 유명해지던 시절 이렇게 머리를 길렀었다. 그래서 대니얼 데닛은 그에게 '록스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호주의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차머스는 의식에 대한 문제를 둘로 나누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다.


차머스는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적 화학적 현상과 정보 처리 메커니즘을 쉬운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저 사과를 빨갛다고 느끼는가? 어제 먹었던 초콜릿의 맛을 우리는 어떻게 지금 다시 떠올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는 차머스가 보기엔 설명하기 쉬운 문제다. 차머스는 뇌과학이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떠한 감각을 경험하는 것, 그 경험한 감각을 기반으로 뇌 안의 전기신호들이 '나'라는 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차머스는 '어려운 문제'라고 규정한다. (엄밀히 말하면 감각질(qualia)과 의식은 다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이 문서에서는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므로 딱히 구분하지 않을 예정이다) 우리는 모두 의식을, 그러니까 '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사과를 보고 있고, 어제 초콜릿을 먹었으며, 언어를 사용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나'다. 나는 통합적 의미에서 나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차머스는 우리 인류는 어째서 이러한 '나'가 존재하는지는 우리는 설명할 수 없고, 뇌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차머스에게는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 이 간단한 구분만으로 차머스는 심리철학계의 슈퍼스타가 됐다.



IMG_0171.JPEG 대니얼 데닛 (1942~2024), By Dmitry Rozhkov, 위키피디아 제공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가장 유명한 반박은 아마도 대니얼 데닛의 반박일 것이다.


대니얼 데닛은 '어려운 문제'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 데닛은 영혼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느끼는 의식, 혹은 자아의 본질로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주체, 그러니까 '나'는 없다고 말한다. 내가 없는데 나의 정체를 규정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수 있는가? 데닛에게 어려운 문제는 그러니까 '화성인은 무엇인가?'와 비슷한 질문이다. 화성인이 없는데 화성인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까지 읽고 내가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분을 위해 설명을 조금 더 하면) 데닛의 기본 아이디어는 이러하다. 데닛 역시 빨간색을 보고, 초콜릿의 맛을 기억해 내고,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의 뇌과학적 메커니즘은 있다고 말한다. 데닛이 없다고 말하는 '나'는 통합적인 '나', 그러니까 데카르트로부터 유래한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몸속에 내가 있어서, 감각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핸드폰 액정에 표시된 이 글이 눈을 통해 들어오고, 귀에 착용한 에어팟에서 음악이 귀로 들어오며, 지하철 에어컨의 서늘함은 피부를 통해서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감각의 뒤편에서 이 감각들을 관조하고 있는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데카르트적 극장모델이라고 한다. 데닛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데카르트 극장모델의 자아다.


데닛은 매 순간 경험하는 경험의 총합이 서사가 되어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내가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데닛은 이러한 자아를 내러티브 자아(narrative self)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은 변치 않는 영혼이나 실질적 주체가 살아가는 실존적 무엇이 아니라, 기억과 경험과 욕망과 우리의 행동들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사건들이 해석되고 통합되어 만들어지는 일종의 자기 서사물(self-narrative)인 것이다.


하지만 데닛은 그러니 내가 없다는 것을 어서 깨달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데닛은 자아는 매우 훌륭한 허구(useful fiction)이라고 말한다. 나는 사실 없지만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유용하다.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인생의 목표를 세우며, 무언가를 선택을 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건 바로 이 내러티브 자아 때문이다. 이 허구는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니 아직도 어이가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세상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유용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시간이 그렇다. 최신 양자역학의 논의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고 믿으면 유용한 것이 많다. 시간을 가정하면 친구와 만나 맥주잔을 기울일 약속을 정할 수 있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할 수 있으며, 아이의 생일날 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허구를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허구에 '나'도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IMG_0172.PNG 안토니오 다마지오 By Fronteiras do Pensamento, 위키피디아 제공


내가 허구인 이상,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는 대니얼 데닛에게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자, 이제 다마지오의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나는 수면 내시경을 받을 때 내 의식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해서 의식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을 것인데, 우리는 이처럼 마취제가 우리의 의식에 작용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즉 마취 상태란 약제에 의해 의식이 사라져 기술적으로 잠든 상태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식물에 마취제를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 박테리아에게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 식물과 박테리아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마취제가 의식에 작용한다면 식물과 박테리아에겐 마취제가 효과가 없어야 한다.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과학자들이다. 19세기말, 프랑스 생물학자 클로드 베르나르가 실제로 이 실험을 진행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기대와 달리 마취제가 주입된 식물과 박테리아는 생명 활동을 중지하고 일종의 동면상태가 되었다. 식물과 박테리아가 마치 잠이 든 것처럼, 의식이 없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마지오는 이렇게 단언한다. 마취제는 근본적으로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취제는 의식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작용한다.


의식과 마찬가지로 식물에게 신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식물도 감각 능력은 가지고 있다. 박테리아도 마찬가지다. 박테리아나 식물의 세포막은 온도, 산성도, 미세한 찌르기나 밀치기를 감지할 수 있으며, 이런 자극들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 자극들을 회피하는 반응을 보인다.


다마지오의 주장은 이렇다. 근본적으로 의식은 감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감각 자체가 의식은 아니지만 감각이 차단되면 의식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다마지오가 설명하는 의식은 통합적이다. 다마지오는 뇌 안에 존재하는 뉴런들만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다. 즉 차머스가 가정하는 '어려운 문제'는 '어려운 문제'를 구성하는 것들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뇌 만으로는 의식이 생성될 수 없다. 의식 형성 과정에서 뇌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뇌는 유기체의 (뇌를 제외한) 신경 조직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은 물론, 몸 본체의 비신경조직들로부터의 입력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다마지오의 주장이다.


즉 다마지오에게 의식이란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대니얼 데닛에게는 '없는'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는, 다마지오에게는 '잘못된 문제'가 된다.




<느끼고 아는 존재>는 이렇게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놓고,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차머스와 그 질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닛 사이에서, 의식을 감각-신체-인지 통합으로 설명하는 세 번째 길을 제시하는 책이다. 다마지오에게 의식은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다.


심리철학으로 한정한다면 나 자신은 전통적인 환원적 물리주의자로, 데닛의 내러티브 자아 모델에 완전히 설득된 사람이다. 하지만 다마지오의 책도 재미있게 읽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마지오의 다른 책들도 살펴볼 생각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심리철학에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보다는 이안 라벤스크로프트의 입문서를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데닛의 책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심리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는 전제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혹시 위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보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에 더 솔깃하셨을 분이 있다면 다른 책의 링크도 하나 더 남긴다.




https://blog.naver.com/iyooha/222710563301

https://blog.naver.com/iyooha/22295342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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