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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적 글 쓰기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by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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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독서모임 [보탬] 일곱 번째 시즌 마지막 책은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였다. 모임 기간 업무가 너무나 바빠서 독후감을 쓰지 못했는데, 시즌이 끝난 지도 2주일이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앉아 후기를 쓴다.


사실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자르고 어디를 포기해야 분량을 맞출 수 있을지 기획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실은 키건의 소설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던의 기획부터 얘기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한 바닥 글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욕심을 좀 줄여 포스트모던에 대한 문서는 따로 링크로 대신하기로 하고, 이 글은 카텔란의 바나나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IMG_0087.jpeg 카텔란의 <코미디언>


'벽에 붙은 바나나'로 알려진 현대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제목은 <코미디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바나나를 벽에 붙이는 것 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현대 미술은 참 난해하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철학사조적으로는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의 도래과정과 특징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른 글들을 링크해 두겠다. 카텔란의 <코미디언>과 (이 글의 소재인)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포스트모던의 정신은 이데아를 거부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이상향)에 대해서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이데아를 왜 거부한다는 것일까? 포스트모던은 이데아가 그저 담백한 이상향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위계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이데아에 가까운 것이 선한 것이고, 우수한 것이고, 반대로 이데아에서 먼 것이 악한 것이고, 열등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이성애와 동성애는 동등한가? 포스트모던 이전의 시대엔 이성애가 정상이고, 동성애는 비정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는 우열이 있었다. 이러한 우열의 구도는 수많은 것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 정상인과 장애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그리고 순혈 아리안과 유대인(아시다시피 이것이 나치의 구도다)...


포스트모던은 어느 쪽이 우수한가? 혹은 동등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정신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들은 지금껏 이데아라고 여겨져 왔던 예술의 형식이나 구도에 저항하는 것이다. 카텔란의 <코미디언>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그렇다면 미술에 있어서 상정된 이데아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이 바나나에 한해 설명하기 위해 구도를 단순히 해보면, 미술가-대상-작품-관람자의 구도가 있다. 화가는 정물이나 인물,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관람자에게 의해 향유된다. 포스트모던 미술이 보기에는 이 구도는 일종의 이데아다.


요즘 미술관에 가보면 무엇을 만져보라고, 어디에 가서 서 보라고 한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이 나타나는 설치 미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품을 경험하는 주체가 작품에 참여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이 포스트모던의 것들이다. 이제 관람자는 더 이상 단순히 관람자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 관람자 자신이 예술가의 작품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링크로 대신하겠다)


화가가 그린 그림을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것이 거부의 대상이라니, 이상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세계관은 모던에 속해 있는 것이다. 괜찮다. 우리는 대개 모던의 세계관을 살아간다. 모던이 많고 잦아야 포스트모던도 설 자리를 얻는다. 당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줄수록 포스트모던은 신이 난다.




그럼 이제 바나나에 대한 얘기를 하자. 벽에 붙은 카텔란의 바나나, 이 <코미디언>의 정체는 실은 문서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일 싱싱한 바나나를 공업용 덕트 테이프로 미술관 전시실 벽면에 고정한다.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시한 바나나는 카텔란의 <코미디언>이라는 이름표를 가질 수 있다. 카텔란은 이 문서를 세 장 만들었고, 문서들을 각각 12만 달러에 팔았다.


즉 <코미디언>은 거래되는 작품이 아니다. 작품 전시의 권리로서 거래되는 것이다. 바나나는 누구나 벽에 붙일 수 있지만 당신과 내가 붙인 바나나는 <코미디언>이 아니다. <코미디언>은 그것을 <코미디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만 인정된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왔다면 이제 카탈란의 의도가 이해될 것이다. 카텔란은 미술가-대상-작품-관람자 구도에서 아예 '작품'을 제거해 보고자 한 것이다. 정말 기발한 방법이 아닌가? 카텔란은 이데아적 미술의 구도를 깨뜨림으로써 모던 미술의 이데아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미디언>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61SYgMSl9vL._AC_SL1500_.jpg <맡겨진 소녀>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미 분량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이쯤에서는 이 독후감의 소재인 <맡겨진 소녀>로 돌아가야 하겠다.


아일랜드의 어느 시골 마을, 가난한 집에서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란 소녀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는 여름 방학 동안 먼 친척집에 맡겨진다. 킨셀라 부부는 사랑으로 소녀를 받아들인다.


소녀는 부부를 따라 물을 길어오고, 얼음을 얼리고,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햇감자를 캐고, 코울슬로와 빵을 만든다. 구스베리 잼을 만들고, 빨래를 개고, 양파를 졸여 소스를 만들고, 계단을 쓸고, 꽃밭에서 잡초를 뽑는다. 매일 농장 입구에 있는 우체통까지 뛰어갔다 오는 것도 소녀의 몫이다.


물긷기.jpg 매일 근처의 샘에 가서 물을 길어 오는 것도 소녀의 일이다.


그렇게 평범하면 평범하다는 일상이 흘러가고, 방학이 끝나 소녀는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소녀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성장한 것 같다.


<맡겨진 소녀>의 이야기는 매우 짧다.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중편 정도의 분량이지만 작가인 키건은 '이 소설은 중편의 호흡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긴 단편 소설로 불러달라'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동의한다. <맡겨진 소녀>는 중편의 호흡을 가지고 있지 않다. 플롯이 급격하게 변화를 겪거나,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 해결되거나, 이야기가 또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여름, 소녀가 임시로 기거하는 어느 아일랜드 시골 농장의 평범한 일상들이 짧은 분량 속에서 담담하게 그려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짧은 이야기는 읽고 나면 길어진다. 생각할 것들이 생긴다. 게다가 모두에게 다르게 읽힌다. 이 신기한 소설은 왜 그러할까?


우리는 모임 날 모여 [내가 읽어낸 이야기 나누기] 꼭지를 진행했다. 나는 내가 직접 얘기하지 않고, 키건의 전략을 멤버들이 어렴풋이 짐작해 주기를 바랐다.




소녀는 실은 가족들 사이를 겉돌고 있다. 소녀는 언니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다. 키건은 소녀의 학교 생활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학교에서도 우수한 학생은 아닐 것 같다. 소녀는 학교를 다닐 정도의 나이지만, 야뇨증을 갖고 있다.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밤에 이불에 오줌을 싼다.


킨셀라 아주머니댁에 도착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이불에 오줌을 쌌다. 이불뿐만이 아니었다. 소녀는 매트리스가 흠뻑 젖을 정도로 오줌을 쌌다.


하지만 독서 모임 당일,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어떤 멤버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럴 수 있다. 키건은 이 장면을 정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줌' 같은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소녀는 미안함에 창밖을 내다보고 있고(아마도 집에서 오줌을 싼 날도 그랬을 것이다) 킨셀라 아주머니는 습한 곳에서 소녀를 재웠다면서 미안하다며 매트리스를 씻는다. 개가 와서 매트리스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대는 장면에 와서야 누군가는 소녀가 오줌을 쌌다는 것을, 그리고 킨셀라 아주머니가 소녀를 감싸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키건이 글을 쓰는 방식이다. 키건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독자는 키건의 소설을 읽으면서 행간들 사이의 공백을 읽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일은 무엇인지 추리하고 상상하고, 키건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에서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제 눈치가 빠른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방식이다. 셰익스피어 이후 모던의 세계관에서 모든 소설들은 작가가 줄거리를 만들고, 독자가 그 줄거리를 쓰인 대로 획득하는 방식으로 성립했다. 얼마나 명료하게, 얼마나 풍부하게 전달하느냐가 관건이었을 뿐, 쓰기의 이데아는 줄거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현대 미술이 미술가-대상-작품-관람자의 구도를 비트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소설가들은 작가-이야기 작성-이야기 습득-독자의 구도를 비튼다. 키건은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어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글쓰기를 선택하지 않는다.




한 없이 다정한 것 같은 킨셀라 부부이지만, 그들에게도 그늘이 있다. 그들의 아들은 예전에 개와 함께 놀러 나갔다가 거름 구덩이에 빠져 죽었다. 이 비극에 대한 얘기를 소녀는 킨셀라 부부가 아니라 장례식을 따라갔다가 만난 수다스러운 이웃 아주머니에게 듣는다. 소녀는 비로소 자기가 지난주 미사에 입고 갔던 체크무니 셔츠와 길어서 접어 입었던 바지가 죽은 소년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날, 딸에게 별 관심이 없는 아버지는 소녀의 짐도 내려주지 않고 차를 타고 가버렸다. 따뜻한 물에 소녀를 씻긴 킨셀라 아주머니가 죽은 아들의 옷을 입힌 것은 별 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한동안 킨셀라 아주머니는 계속 아들의 옷을 입힌다.


image (8).png 소녀는 한동안 킨셀라 부부의 죽은 아들 옷을 입고 지낸다.


소녀에게 새 옷을 사주자는 제안을 한 것은 킨셀라 아저씨다. 킨셀라 아저씨는 어느새 자신의 아내가 소녀에게 죽은 아이를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챈 것이다. 새 옷을 사주자는 아저씨에게 아줌마는 지금 옷도 충분히 깨끗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무슨 말인지 알잖아, 에드나." 아저씨의 말에 아주머니는 잠시 자리를 비운다. 아줌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소녀도 눈치챈다.


이 이야기 역시 직접 말하여지지 않는 이야기다. 처음엔 순수한 친절함으로 소녀를 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킨셀라 아주머니는 어느새 소녀를 자신의 죽은 아이와 겹쳐 보고 있었던 것이다.




킨셀라 부부에게 죽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킨셀라 아저씨는 구두를 길들인다는 핑계로 소녀를 데리고 근처 바닷가에 간다. 멀리 고기잡이 배 불빛들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아저씨는 소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이 말은 소녀에게 아주 중요한 조언이 된다. 집으로 돌아온 날, 뭔가 분위기가 바뀐 소녀를 보며 엄마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소녀는 말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소녀는 스스로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지금이야말로 입을 다물기 딱 좋은 순간이라고 말이다.


마치 소녀의 성장을, 그러니까 부모에게 의존적이지 않은 주체로 소녀가 성장한 것을 묘사하기 위해 이 장면이 준비된 것처럼 보인다. 소녀는 킨셀라 아저씨의 말을 "모든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받아들인 것처럼 키건은 묘사한다. 하지만 이 앞 이야기와 비추어 보면 우리는 다른 것을 읽을 수 있다.


킨셀라 부부의 아이는 혼자 사냥개와 함께 거름구덩이에 갔다가 빠져 죽었다. 킨셀라 부부는 아마도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를 가장한 비난들을 받았을 것이다. 아이고, 아이가 혼자서 거길 왜 갔대? 왜 혼자 보낸 거예요?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었다면, 지켜보기라도 했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안 일어났을 텐데 말이야. 어휴, 정말 안타깝네요. 어유, 이걸 어째.


킨셀라 아저씨는 이런 비난들, 킨셀라 부부를 향한 위로를 가장한 비난들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이가 죽은 것이 그들이 아니라 개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총을 들고 밭에 나가 늙은 사냥개를 쏘려고 했다. 하지만 킨셀라 아저씨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개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말처럼,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아이가 죽은 일, 그 일은 그저 일어난 것일 뿐이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편지가 도착한다. 소녀의 동생이 무사히 태어났고, 이제 방학이 끝나가니까 소녀를 돌려보내 달라는 내용의 편지다.


그날 소녀는 샘으로 혼자 물을 뜨러 갔고, 그만 샘에 빠지고 만다. 물에 흠뻑 젖은 소녀는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는다. 덕분에 소녀는 예정보다 며칠 늦게 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물에 빠지는 장면을 키건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요즘 들어 수위가 훨씬 높아졌다. 여기 온 첫날에는 다섯 번째 단까지 내려갔었는데, 지금은 첫 번째 단에 서 있는데도 높이 올라온 수면이 보인다. 내가 서 있는 계단의 바로 아랫단 끝에서 넘실거린다. 나는 가만히 숨을 쉰다. 돌아오는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으려고 일부러 힘차게 숨을 쉰다. 그런 다음 아주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양동이를 들고 몸을 숙여서 물에 띄웠다가, 삼키게 했다가, 가라앉힌다. 하지만 양동이를 들어 올리려고 남은 한 손을 마저 뻗었을 때 내 손과 똑같은 손이 물에서 불쑥 나오는 듯하더니 나를 물속으로 끌어당긴다.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이 장면을 두고 [보탬] 멤버 중 한 명은, 물속으로 소녀를 끌어당긴 건 소녀 자신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한다. 즉 소녀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혹은 돌아가는 날을 늦추려고 일부러 물에 빠진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이건 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행간인데, 매우 신빙성이 있다. 이 사건 직전에 이러한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편지가 도착한 직후의 장면이다.


"속상해하지 말고." 아주머니가 말한다. "자, 이리 오렴."

아주머니가 책에 실린 스웨터들을 보여주면서 뭐가 제일 좋은지 묻지만 도안이 전부 흐릿해지더니 하나가 되어버린다. 나는 아무거나 하나를, 쉬워 보이는 파란색 도안을 가리킨다.

"와, 여기서 제일 어려운 걸 골랐구나." 아주머니가 말한다. "이번 주에 시작해야겠다. 까딱하다가는 다 떴을 때 네가 너무 자라 있어서 입지도 못하겠어."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소녀는 쉬워 보이는 도안을 골랐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이 가장 어려운 도안이었다. 이 장면에서 이미 소녀가 킨셀라 부부를 떠나기 싫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고자 쉬워 보인다는 핑계로 자신을 속이고, 실제로는 가장 어려운 도안을 고른 것이다.


이 장면을 고려하면 양동이가 무거워 소녀가 샘에 빠진 것이 아니라, 소녀 스스로 샘에 빠진 것일 수 있다는 심증이 굳어지는 것이다. 키건은 이렇게, 읽은 사람들 각자에게 다른 이야기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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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 긴 독후감을 마치려고 한다. 키건은 이 짧은 이야기를 열린 결말로 끝냈다.


내가 마침내 눈을 뜨고 아저씨의 어깨너머를 보자 아빠가 보인다. 손에 지팡이를 들고 흔들림 없이 굳세게 다가온다. (중략)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이 두 번의 "아빠"는 정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다가오는 아빠에게 한 경고일 수도 있고, 나를 데려가달라는 뜻으로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른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모임 당일 이 이야기의 뒷얘기를 예측해 보는 꼭지를 진행했다. 키건은 의도적으로 이 두 번의 "아빠"에 대한 해석으로 뒷 이야기가 굉장히 달라질 수 있는, 열린 결말 형식 엔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 [보탬] 모임에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지만, 나의 해석은 이렇다.


킨셀라 아저씨는 문쪽으로 돌아서 있고,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를 볼 수 없다. 아빠는 (사용하려는 의도는 없겠지만) 무기로서 지팡이를 들고 있다. 다가오는 아빠를 볼 수 있는 것은 소녀뿐이다. 그래서 킨셀라 아저씨에게 소녀는 정보를 준다. 경고를 하는 것이다. "아빠."(가 다가와요)


그런데 막상 불러보고 나니 마치 자기가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정말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그 순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녀는 한번 더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아빠"의 의미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이후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녀는 이 순간 마음속으로 자신의 진짜 아빠를 정했다. 소녀는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다. 소녀는 야뇨증을 극복했고, 대답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진짜 엄마와 진짜 아빠가 생겼다. 돌아갈 진짜 집과 자기 방도 생겼다.


소녀는 학교를 열심히 다닐 것이다. 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급우들도 눈치를 챌 것이다. 학기를 모두 마친 소녀는, 겨울 방학에 다시 바닷가에 있는 킨셀라 부부의 농장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방학 때 그랬던 것처럼 물을 길어오고, 얼음을 얼리고,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햇감자를 캐고, 코울슬로와 빵을 만들 것이다. 구스베리 잼을 만들고, 빨래를 개고, 양파를 졸여 소스를 만들고, 계단을 쓸고, 꽃밭에서 잡초를 뽑을 것이다.



01.38847817.1.jpg 클레어 키건 (1968~ )


너무 긴 독후감이었어서 이걸 다 따라 읽으신 분이 있을까 싶다. 이제 키건의 기획에 대해 조금 설명하고 이 긴 글을 마치겠다.


키건의 기본적인 전략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드러난 이야기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더 큰 감동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가능할까? 왜 우리는 전달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더 큰 감동을 느끼는 것일까? 이것은 실은 시(詩)가 감동을 전달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쓴다. 마음이 호수인가? 마음과 호수는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떤 기분, 정확히는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 호수가 가진 어떤 속성, 그러니까 고요함, 잔잔함, 맑음, 그윽함, 고상함 등을 가진 시인의 마음을 상상하고 그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상상하여 어딘가에 닿음으로써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게이머들끼리 하는 농담으로, 세상에서 가장 그래픽이 좋은 게임은 텍스트로 되어 있는 게임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래픽이 아예 삭제된 게임 속의 세상은, 내가 상상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상으로 닿은 세계는 눈앞에 있는 세계보다 멋지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눈앞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상상으로 닿은 세계에서는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nethack.png 텍스트로 되어 있는 게임을 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상상으로 메워야 한다.


마찬가지다. 키건이 직접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원리를 갖고 있다. 이야기를 직접 전달하는 모던적 글쓰기의 한계를 포스트모던적 기법으로 극복해 보려는 것이 키건의 기획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키건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클레어 키건이야 말로 셰익스피어의 시대를 완전히 끝낸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키건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또 다른 기획으로 글을 쓰는 포스트모던 소설가가 더 있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한강 작가다. 이 분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언젠가 다른 글에서 해보도록 하겠다.


정말 길었다. 포스트모던이 동작하는 방식을 최대한 쉽고 짧게 써 보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글은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다.


키건이 숨겨 놓은 행간은 이 밖에도 훨씬 많이 있다. 이 책은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 다르게 읽힐 것이다. 몇 년 후, 문득 이 책이 생각나면 한번 더 읽어 보시기를. 포스트모던에 대한 글들을 몇 개 링크하고 이 긴 글을 마친다.




https://brunch.co.kr/@iyooha/85

https://brunch.co.kr/@iyooha/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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