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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Aug 26. 2024

포스트모던, 혹은 보편에 대한 거부

이 단어에 열등감을 느꼈던 시절의 나를 위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손가락 가는 대로 소설을 쓰던 시절, 막연히 순수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두려움이나 동경,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상징적인 단어가 있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서점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책들을 꺼내보았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문학을 한다고 혹은 예술을 한다고 해서 포스트모던에 대해, 혹은 그 구체적 의미에 대해 예술인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 수십 년 전의 나처럼 이 어려운 단어에 대해 막연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분이 있다면, 오늘 그 문제가 해결이 될 것이다. 내가 아주 쉽게 설명해 보겠다. 




포스트모던은 영어로 post-modern이다. 번역해 보면 모던 그 이후라는 뜻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던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모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모던(modern)은 번역하면 근대(近代)다. 중세의 다음 시대이면서, 현대의 이전시대가 근대다. 서양 역사에서 근대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16세기를 르네상스 시대, 17-18세기를 고전주의 시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를 근대로 구분하는 미셸 푸코의 방식을 가장 좋아하고, 다른 글에서는 이렇게 구분을 하곤 하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 시대들을 모두 퉁쳐서 데카르트로부터 근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구분하는 방식을 선택하겠다. (그 편이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더 쉽기 때문이다)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철학자보다는 수학자로서의 업적이 더 와닿을 것이다. 여러분이 수학시간에 배운 X-Y 좌표계는 데카르트가 만들었다.


17세기의 가장 중요한 저작 두 권을 꼽으라면 데카르트의 <성찰>과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들 수 있다. <성찰>은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그러니까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나를 학문적으로 상술한 책이고,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아주 작은 물질 입자부터 거대한 천체까지,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만유인력의 법칙이 이 책에서 처음 소개된다. 


수학으로 세계를 기술한다는 뉴턴의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그 시대에 그리 쉽게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과학을 진리에 가장 가까운 학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신의 존재, 영원불멸, 인간의 자유 같은 것들이 형이상학의 주된 관심사이던 그 시절에 과학의 입지는 좁았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과학은 제대로 된 학문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과학에 반대하는 철학에 맞서 과학을 당당히 학문의 반열에 올리기 위해 쓰인 책이 그 유명한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흄의 논리를 칸트가 논파해 나가는 이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지만, 이 글의 범위는 아니니 다음번에 써보기로 하겠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근대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1641년에 출간되었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초판을 완성한 것은 1781년이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에 터졌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말을 탄 절대정신'이라며 추켜세웠다. (이전까지 '절대' 같은 단어는 인간의 정신 앞에 붙을 수 없었다. '절대'는 신과 왕을 위한 것이었다) 


중세를 상징하는 것이 신과 기독교라면 근대를 상징하는 것은 이성과 합리성이다. 과학주의는 우주를 수학으로 해석할 수 있었고, 산업 혁명은 영주의 권위를 몰락시켰고, 부르주아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탄생을 앞당겼다. 대혁명으로 계몽주의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유럽 전역에서는 혁명이 유행처럼 불었다. 모든 진보는 이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대, 그러니까 산업혁명으로 부를 이룬 부르주아가 계급으로서 등장하고, 신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앉았으며, 과학이 새로운 시대의 담론이 되어갔던 시대를 모던(근대)이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을 해낸 이성에 대해, 그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이성이 우주와 세계의 비밀을, 감춰진 진리를 모조리 찾아내 알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이성의 시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막을 내린다. 




히틀러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라인란트 점령 후 3주 뒤 열린 총선에서 독일 국민 98.8%가 히틀러와 나치를 지지했다. 유럽은 잿더미가 됐고 600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었다. 죽은 것은 유대인뿐만이 아니었다.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도 학살되었다. 이 모든 참극은 이성과 합리의 이름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었다. 


직접 전쟁을 경험한 독일,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의 사상가들은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그러한 세계관에 강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반성과 속죄와 인간성의 회복을 어떻게 이뤄야 할지 고민을 해야 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힐 것이라 기대한 이성은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가? 이렇게 모던이 끝장난 그 자리에서 포스트모던이 시작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근대에 대한 부정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근대에 대한 부정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부정하는 것일까?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1924~1998)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이란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라고 말한다. 거대담론은 어떤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지식을 정당화하는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 대개 이러한 체계는 단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중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대담론은 신이고, 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대담론은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이성이다. 


리오타르는 근대의 기획, 그러니까 이성을 꼭짓점으로 하여 진리라는 보편을 획득하려던 시도들(예를 들면 칸트와 헤겔의 시도들)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이성과 완전성을 믿었던 모더니즘의 기획이 결과적으로 초래한 것은 산업화된 기술을 통한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이었다. 포스트모던은 보편과 보편자를 거부하고 개별과 개별자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도 쉬운 얘기는 아니다. 보편을 거부하고 개별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앞서 김치찌개의 이데아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대표적인 보편은 이데아다. 이데아를 상정하는 순간 모든 것은 이데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어떤 개별자는 이데아에 가깝고, 어떤 개별자는 이데아에서 멀다. 이데아에 가까운 것이 더 우수한 것이 되는 것이 보편의 세계관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과 한 상자를 바닥에 쏟아보자. 어떤 사과가 가장 '사과다운'가? 빨갛고, 둥글고, 흠집이 없고, 매끈한 사과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던한 것이라면, 이 사과는 다른 사과들보다 둥글고, 이 사과는 다른 사과들보다 덜 익었으며, 이 사과는 다른 사과엔 없는 흠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이 포스트모던의 관점이다. 각각의 사과는 개별자로서 의미가 있다. 


여성, 소수자, 다원성과 다양성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지지, 탈권위적, 탈중심적이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 탈형식적이고자 하는 예술적 태도 등이 포스트모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이 한 바닥 글 안에서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포스트모던을 찍먹 해보고자 한다면 아래에 추가로 링크한 글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면, 포스트모던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는 실은 모던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라. 포스트모던을 정의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던을 어딘가에 고정시킨다는 것이 아닌가? 포스트모던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포스트모던의 이데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실은 그 이데아로부터 담론을 생산해 내는 행위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있지만, 이 문서의 범위는 아니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모던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대에는 여전히 모던이 남아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 같은 사회문제는 당연히 근대적 거대담론의 산물이다.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민주주의의 가치도 마찬가지고, 경애하는 수령 동지를 연호하며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북녘 동포들의 그 행위는 매우 거대담론적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본주의, 혹은 돈이라는 거대담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 같은 브런치북에 포함된 재미있는 글을 링크하니 본문이 재미있었다면 일독을 권한다. 


또,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예술은 어떤 형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글도 추가로 링크하겠다. 이 글도 같은 브런치북 안에 있다.  




https://brunch.co.kr/@iyooha/81


https://brunch.co.kr/@iyooh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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