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된 바나나를 먹었던 그 사건에 대해
작년 봄, 서울 소재 리움 미술관에서 한 관람객이 전시 중인 작품을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현대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의 일부인 바나나를 관람객이 먹어 치운 것이다. 그 관람객은 내용물을 먹고 남은 껍질을 다시 테이프로 벽에 고정했다.
만약 이 작품이 평범한 작품이었다면 관람객은 작품 훼손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다. 오늘은 그 해프닝을 겪은 바로 이 바나나가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앞서 김치찌개의 이데아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이데아(이상향)를 거부한다. 이데아는 그저 담백한 이상향에 머무를 뿐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위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생각이다. 이데아에 가까운 것이 선한 것이고, 우수한 것이고, 반대로 이데아에서 먼 것이 악한 것이고, 열등한 것이 된다. 포스트모던은 바로 이 위계를 거부하기 위해 상정된 이데아를 파괴하려 한다.
그렇다면 미술에 있어서 상정된 이데아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이 바나나에 한해 설명하기 위해 구도를 단순히 해보면, 미술가-대상-작품-관람자의 구도가 있다. 화가는 정물이나 인물,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관람자에게 의해 향유된다. 포스트모던 미술이 보기에는 이 구도는 일종의 이데아다.
화가가 그린 그림을 미술관에서 감상하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것이 거부의 대상이라니, 이상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세계관은 모던에 속해 있는 것이다. 괜찮다. 우리는 대개 모던의 세계관을 살아간다. 모던이 많고 잦아야 포스트모던도 설 자리를 얻는다. 당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줄수록 포스트모던은 신이 난다.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미술가-대상-작품-관람자의 구도를 깨뜨리거나 비트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정물, 인물, 풍경 등 그 어떤 대상과도 닮지 않았다. 몬드리안의 작품은 선, 면, 색채와 같은 미술을 구성하는 순수한 형식 요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피카소로 잘 알려진 입체주의는 그림의 대상을 분석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는 획기적이지만 특정 대상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구상미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제 미술은 구상미술과 추상미술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나는 추상미술가중에서는 칸딘스키를 좋아하는데, 칸딘스키는 미술가 본인의 주관적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칸딘스키의 대상 역시 자연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상이 제거되어 있는 셈이다. 더 써보고 싶지만 분량상 줄여야 하니, 궁금한 분들은 찾아보기를 권한다.
예술가-대상의 구도를 비트는 다른 시도로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들 수 있다.
잭슨 폴록은 커다란 천을 바닥에 깔아 놓고 내키는 대로 페인트를 흩뿌린다. 결과물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결과물 역시 그 어떤 대상도 닮지 않았다. 잭슨 폴록은 화가의 행위 자체를 예술로 규정함으로써 미술의 이데아적 구도에 도전한 것이다.
폴록의 어떤 작품은 1800억 원에 거래가 되었다. 폴록은 오늘날에도 가장 비싼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다른 시도로는 작품-관람자의 구도를 깨뜨리는 방법이 있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예술가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관람객의 역할은 향유나 감상이었다. 그런데 요즘에 미술관에 가면 어디에 가서 서보라고 하기도 하고, 이걸 만져보라고 하기도 한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이 나타나는 설치 미술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작품을 경험하는 주체가 작품에 참여해 그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제 관람객은 단순히 관람객이 아니게 된다.
관람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단계를 넘어, 아예 작품 자체가 된 사례도 있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는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와 넬슨 제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그 시대 영웅들의 동상이 있다. 중앙에 넬슨 제독이 있고, 남서쪽 좌대에는 찰스 제임스 네이피어, 남동쪽 좌대엔 헨리 해블록, 북동쪽에는 조지 4세의 동상이 있다. 그런데 예산 부족으로 북동쪽 좌대는 160년째 비어있다.
1995년 영국 왕립예술협회가 런던 시의 인가를 받아 이 좌대에 매년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올리기로 했는데, 매년 이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던 중 2009년 전시를 맡은 조각가 안토니오 곰리는 관람객을 좌대에 올리기로 했다. 좌대 주변에 낙하 방지 그물을 설치하고, 크레인을 통해 관람객을 좌대 위로 올리는 것이다. 관람객은 한 시간 동안 예술가의 작품이 되는 경험을 한다. 곰리는 이 작품에 <One & Other>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밖에도 예술가 자체를 삭제하려는 자동 묘법적 태도 등 여러 가지 다른 재미있는 예를 들 수 있겠지만, 이미 글이 너무 길어져버린 관계로 이제 카텔란의 바나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카텔란의 바나나의 정확한 제목은 <코미디언>이다. 그런데 이 <코미디언>의 정체는 문서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일 싱싱한 바나나를 공업용 덕트 테이프로 미술관 전시실 벽면에 고정한다.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전시한 바나나는 카텔란의 <코미디언>이라는 이름표를 가질 수 있다. 카텔란은 이 문서를 세 장 만들었고, 문서들을 각각 12만 달러에 팔았다.
즉 <코미디언>은 거래되는 작품이 아니다. 작품 전시의 권리로서 거래되는 것이다. 바나나는 누구나 벽에 붙일 수 있지만 당신과 내가 붙인 바나나는 <코미디언>이 아니다. <코미디언>은 그것을 <코미디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만 인정된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어왔다면 이제 카탈란의 의도가 이해될 것이다. 그렇다. 카텔란은 미술가-대상-작품-관람자 구도에 '작품'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정말 기발한 방법이 아닌가? 카텔란은 포스트모던의 입장에서 모던의 이데아에 도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미디언>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코미디언>을 미술시장에 대한 조롱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조롱의 의도가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도 그 많은 공업 제품들 중에서 하필이면 변기를 골랐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해다. 거기에 담긴 것이 그저 조롱 뿐이었다면 리움 같은 큰 미술관이 <코미디언>을 전시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포스트모던은 모던을 조롱하지 않는다. 모던은 여전히 거대한 담론이고, 포스트모던은 지금도 도전자의 입장에서 모던을 극복하고자 할 뿐이다)
또, 당시 뉴스에서는 1억 원이 넘는 작품이 훼손됐다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1억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된 것은 <코미디언>의 전시권이다. 바나나가 아니다.
바나나 자체는 가치가 없으므로 그것이 관람객에서 먹혀 나간 후 껍질 상태로 존재해도 <코미디언>의 가치는 건재하다. 오히려 이 행위는 카텔란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시도이다.
여담인데 나는 이 전체 스토리에서 답답한 부분은, 서울대 미학과씩이나 다니고 있었던 이 대담한 친구가, 왜 바나나를 먹었냐는 질문에 "배고파서" 따위의 척수반사 수준 대답 밖에는 하지 못했다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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