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이 이항대립 구도에 저항하는 법
이 글은 읽는 사람이 포스트모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다는 전제로 쓰이고 있으므로, 이 글로 이 시리즈(혹은 이 브런치북)를 처음 접한 분이 있다면 스크롤을 내려 아래에 링크된 다른 글들을 먼저 읽고 오시기를 바란다. 이 글은 포스트모던 꼭지의 마지막 회로, 심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김치찌개를 놓고 모던한 태도와 포스트모던한 태도를 구분해 보았고, 카텔란의 바나나가 왜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얘기했으며, 포스트모던이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알아보았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야기 소비 형태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포스트모던의 방법론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그것은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고 한다.
아니 레이 아스카 얘기를 한다더니 느닷없이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데 여보시오 글쟁이 양반 이거 낚시요? 싶었을 것이다. 낚시 맞다. 양해해 주기 바란다. 이런 재미없는 글이 이 정도 떡밥도 없이 모객이 되겠는가.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떡밥은 회수될 것이다. 또한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레이냐, 아스카냐?' 하는 질문이 매우 모던한 질문임을 알게 될 것이고, 포스트모던의 입장에서는 이 오래된 떡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유의 대상을 둘로 나누는 것을 이원론(二元論)이라고 한다. 우리는 세상을 아주 쉽게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영혼과 육체 같은 것들로 말이다.
이러한 이원적 도식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유와 철학들을 만들어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원론적 도식은 나-세계의 도식이다. 어떤가. 멋지지 않은가? 우주를 나와, 내 바깥의 우주로 나누어놓고 나면 이 구도는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나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가? 내가 없어도 이 우주는 있는가? 내가 내 외부에 있는 햄버거를 먹었으면, 그 햄버거는 나에게 속하는가, 우주에게 속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정말 끝도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모두 인식론으로, 존재론으로 발전한 서양철학의 실제 질문들이다.
최신의 철학이(구체적으로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철학이) 문제 삼는 이원론적 구도는 인간-기술의 구도이다. 생각해 보라. 인간은 기술을 소유하는가? 인간은 기술의 진정한 주인인가?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뱃속에 들어간 햄버거와 합일하는 인간처럼, 이제 스마트폰까지 포함해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이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이제 기술이 인간의 주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매우 재미있는 생각이지만 이 이야기는 오늘의 주제는 아니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만 이원론적 구도는 이렇게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
이렇게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이 이원론적 구도를 처음 상정한 사람은 아시다시피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우리 앞에 놓인 현상세계를 구분하며 이원론의 원조가 되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은 이 이데아를 격렬하게 거부한다. 이 재밌는 이원론, 혹은 이데아를 포스트모던이 거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포스트모던이 이데아를 문제 삼는 까닭은 이데아가 반드시 위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데아를 상정하는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변화하며 불완전한 열등한 세계가 된다. 마찬가지다. 신-인간, 이성-비이성 같은 것은 물론 남자-여자, 서양-동양, 백인-유색인, 정상인-장애인처럼, 대립하는 이항(二項)은 반드시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정상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생각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대립하는 이항의 구도를 부수고 해체하려 한다. 이것을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고 한다.
'탈구축'은 영어로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이고, 프랑스어로는 데콩스르뤽시옹(déconstruction)으로, 데리다의 용어다. 탈구축이란 사물을 이항대립, 즉 두 개념의 대립에 의해서 파악하여 좋고 나쁨을 말하려는 것을 일단 '유보'하는 태도다. 다시 말하면 이항대립적 판단 요청을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이원론이 그동안 소외된 것들에게 저질러온 폭력을 드러내겠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전략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나은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나은가?' 이런 질문이 있다고 하자. 이 질문에 곧바로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 혹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하고 대답하는 것은 모던한 태도다. 포스트모던은 이 대답에 즉시 대답하는 것을 유보한다. 대답을 유보하고 나서 질문을 바라보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어째서 성소수자로 태어나는 선택지는 없는가?'하고 말이다.
남자-여자의 구도를 지지하는 태도는 성소수자가 없다는 태도다. 실제로 존재하는 성소수자에게 눈을 감고, 그들을 소외시키는 구도다. 이원론이 소외된 것들에 폭력을 저지르는 방식은 이러하다. 포스트모던은 이 지점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떡밥을 회수할 시간이다. (무슨 얘기를 할지 아마 대충 예상은 되었을 것인데)
레이냐 아스카냐? 포스트모던은 이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대답을 유보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왜 미사토나 리츠코, 마야는 안되는가? 하고 말이다. 이렇게 물으면 레이와 아스카 답은 둘 중 하나뿐이라는 질문의 구조, 즉 질문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 질문은 불완전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가?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는 개념, 포스트모던의 방법론이 이제 이해되는가? 이해된다면 이제 이 질문의 정답을 말해주겠다. 정답은 물론 아스카다.
이제 포스트모던 꼭지가 끝났다. 여러 편에 걸쳐 포스트모던에 대해 얘기했다.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다. (재미있었다면 라이킷 좀 해주세요 제발요) 나는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충분한 지식을 쌓은 것도 아니니 내가 쓰는 글에는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고려해 주시면 좋겠다.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철학자이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철학자는 미셸 푸코다. (얼마나 좋아하면 현재 재직 중인 회사 개발팀 이름을 팀 푸코(Team Foucault)라고 지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라면 모름지기 이항대립을 탈구축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미셸 푸코가 거부한 이항대립 구도는 무엇일까?
푸코가 거부한 대립하는 이항은 다름 아닌 정상-비정상의 구도이다. 당신은 정상 체중인가? 당신은 정상 혈당, 정상 혈압을 가졌는가? 이제 이 질문들의 배후와, 이 질문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파헤쳐볼 시간이다. 푸코 꼭지는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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