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과학은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만 존재했다
주말이 가는 것이 아쉬워 마나님과 단골 술집에서 한 잔을 더 하기로 했다. 문득 마나님이 내가 낮에 읽던 책 얘기를 해달라고 한다. 나는 요즘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읽고 있다.
마나님: 낮에 읽던 책, 읽으며 막 감탄하던데 어떤 내용이야?
나: <말과 사물>?
마나님: 응.
나: 전체 내용을 한 줄로 줄이긴 어려운데... 오늘 내가 읽은 부분만 한 줄로 줄이면 이런 내용이야. "어떤 시대의 과학은 명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마나님: 역시 어렵네. 명명하는 것?
나: 철학은 늘 그렇지만 읽어내긴 어려운데, 읽고 나서 깨달으면 당연한 개념인 경우가 많아. 이 것도 그래. 예컨대 이런 거야. 우리는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걸 알아. 그런데 최초로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측정을 해 본 결과일까?
마나님: 온도계가 없을 때 얘긴가? 어라? 아니지, 온도계가 없으면 측정이 안 되겠는데. 측정을 하려면 먼저 온도계를 만들어야 하는 건가?
나: 그렇겠지?
마나님: 그런데 온도계를 어떻게 만들지? 여기가 100도라고 눈금을 어떻게 긋지? 아직 그 누구도 물이 끓는 온도를 측정해보지 않았잖아. 그렇네, 100도는 측정된 온도가 아니겠구나!
나: 그렇지. 물이 끓는 것을 관찰해서 그 측정된 온도가 100도라는 걸 확인한 게 아니겠지. 처음부터 물이 끓는 온도를 100도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한 거야. 온도 체계는 과학이 아니라 그저 자연 현상에 붙인 이름에 불과해.
마나님: 명명하는 것이구나!
나: 이런 과학은 수도 없이 많아. 예를 들어 린네의 분류체계에서 고양이과와 개과의 차이점은 앞발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 하는 것뿐이야. 보고 관찰한 후 아하 앞발을 잘 쓰네? 그럼 너는 고양이과.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과학이라고 굳게 믿는다는 거지. 마찬가지로 외떡잎식물, 쌍떡잎식물 같은 식물의 분류도 외형을 보고 붙인, 그저 이름에 불과해. 현대에는 RNA 같은 유전과 진화 정보를 이용한 분자 생물학이 분류의 기준을 제시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그저 눈으로 보고 명명한 것 만으로 그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거지.
마나님: 아하...
나: 이런 과학을 푸코는 '스스로 명명한 이름의 감옥에 갇힌 자폐적 과학'이라고 비웃어.
마나님: 와, 이거 뭔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있네. 학부 때 전공 공부를 하며 치민 생각이 있었는데... (마나님은 석사학위를 가진 심리학도이자 현역 상담사다)
나: 어떤 건데?
마나님: 예를 들어 이상심리 공부를 할 때 이상행동(abnormal behavior) 특성을 분류하는 과정에 관찰과 검사를 통해서 이 팩터(factor), 이 팩터가 몇 점이면 어떤 진단을 하고, 어떻게 분류하고, 이런 것들이 있었거든.
나: DSM 진단 체계 같은 거?
마나님: 나는 공부할 때는 일단 시험을 봐야 하니까 막 외우면서도 정말 이런 점수로 정상 비정상 진단이 가능하다고? 통계가 과학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나: (웃는다)
마나님: 푸코가 딱 그 얘기를 하고 있네. 그 통계값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정말 과학이 맞냐고. 나는 상담 실무를 25년째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질문의 답을 잘 모르겠거든. 이 검사지로 정말 저 아이의 정상과 비정상을 진단해도 되는 걸까? 마음속에 늘 두려움이 있어.
나: 푸코는 늘 이렇게 묻지. "정상이 뭐죠?" (잔을 든다)
(잔을 부딪힌다)
마나님: 그럼 내가 공부한 건 대체 뭐지? 내가 공부한 건 그저 이름들의 덩어리였던 걸까?
나: (잠자코 크래커 한 조각을 집어든다)
마나님: 나 정말 푸코 읽어봐야겠네. 지난번에 오빠가 추천한 책이 <광기의 역사>였었지?
나: 응, 정확히 <광기의 역사 읽기>야. 미셸 푸코가 쓴 <광기의 역사>의 얇은 해설서인데 꼭 한번 읽어봐. 허경 교수님 번역 솜씨가 정말 훌륭해. 그 책을 읽고 나면 오히려 심리학의 바깥에서 심리학을 관조하는 훨씬 넓은 시야를 갖게 될 거야.
마나님: (핸드폰을 꺼내 알라딘 앱을 실행시킨다)
나: (드디어 푸코 영업에 성공했으니 모른 척하며 씩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