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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Sep 14. 2024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영어와 수학이 아니다

사진: Unsplash의Eugene Nelmin


내가 청소년이었던 시절에 청소년 성장소설이라는 장르가 유행했었던 적이 있었다. 요즘처럼 퀘스트를 받아 클리어하거나 성좌들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는 건 아니고, 사춘기 시절 소년소녀들이, 그 시절 누구나 겪어야 하는 외모에 대한 고민, 학업과 성취에 대한 불안, 어려운 교우관계를 겪으며, 때로 갈등하고 때로 좌절하거나 절망하기도 하지만, 결국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나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행복은 선착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작품이 있었고, 나는 <지금 우리는 사랑하고 싶다>라는 작품을 좋아해 여러 번 읽었다. 


학교는 정말 많은 소재를 제공하는 장소다. 선생님과 학생, 우등생과 열등생, 일진과 왕따...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청소년 성장드라마에 반드시 등장하는 단골 소재는 학교 그 자체다. 많은 작품들이 학교를 감옥에, 그리고 학생들을 거기에 수용된 죄수에 비유하곤 한다. 


학생 때, 볕 좋은 날 선생님의 나른한 목소리를 듣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 좋은 날 어딘가 떠나보고 싶다'며 딴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선생님께로 눈을 돌린 기억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감옥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면, 그 순간 당신에게 학교는 감옥이었다. 


재미있는 비유라고 생각했는가? 일단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아래에 연결되는 이야기들도 재미있어할 것이다. 학교가 감옥이라는 것은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다. 학교는 정확히 감옥이다. 아니, 실은 세상이 감옥이라는 것을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아래 중세 시절의 처벌에 대한 단락은 이전에 썼던 당신이 MBTI를 불편해하는 이유에서 가져왔으니 그 글을 이미 읽은 분들은 아래 절 전체를 넘어가셔도 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은 존재 자체로 존엄하며, 신분, 빈부, 성별, 인종,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하여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는 생각을 인도주의(人道主義)라고 하는데, 인도주의는 서양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5백 년 정도 전,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처음 등장했다. 


16세기 전까지 인간은 존엄하지 않았다. 존엄은 신이 나 천사, 종교인, 혹은 왕이나 귀족처럼 존엄할 이유가 있는 대상과 혈통, 그리고 계급에 주어졌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었고, 인간은 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정받고, 신에게 늘 구원을 갈구해야 하는 작은 존재였다.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 시대의 처벌 행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형벌은 신체형이었다. 신체를 자르거나 때리거나 태우는 형벌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잔인한 형벌들의 목적은 피지배계층에 형벌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공포감을 심는 것이었다. 군주의 권위가 형벌의 형태로 피지배계급에게 가해지는 것이었다. 


1757년에 프랑스 루이 15세에 대한 암살 시도범에 대한 공개 처형이 있었는데, 형벌 집행인들은 먼저 범인의 손을 황산에 담가 녹였고, 그 후엔 몸의 곳곳에 말뚝을 박았다. 마지막으로 두 팔과 두 다리를 각각 말에 묶은 후,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몸을 네 조각으로 찢었다. 몸이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으니 아마 찢어진 조각은 넷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잔인한 처형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이 존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종교개혁, 계몽주의의 도래를 통해 인간은 이전보다 높은 지위를 얻었고, 인도주의 등장 이후엔 이러한 잔인한 신체형은 사라지게 되었다. 죄를 저지른 사람도 인간에 속하게 되었기에, 이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없는 수준의 잔인함은 죄인에게도 휘두를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신체가 형벌의 대상이 아니게 되자 이제 정신에 고통을 가하는 형벌이 탄생한다. 감옥이 등장한 것이다. 




신체형이 형벌의 중심이었던 중세의 지배계급은 군주와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인도주의 시대의 지배계급은 계몽주의와 함께 새롭게 부상했던 부르주아였다. 권력에 대한 인민의 절대복종을 원했던 절대 군주들과는 달리, 새로운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안전을 소망했다. 


그래서 처벌의 목적이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처벌은 절대군주의 권위와 권력을 과시하고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벌 이후 죄인의 범죄 가능성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집행되었다. 즉 근대 이후 처벌의 목적은 훈육과 교정에 있게 되었다. 


목적이 바뀜에 따라 처벌 행위의 그 의미도 바뀌었다. 근대 이전 처벌이란 '군주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에 대한 권력의 보복'이었지만, 근대 이후 처벌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힘에 대한 대가를 치름'이 되었다. 처벌은 규율이 되었고, 곧 도덕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범죄자는 이제 군주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 불충한 자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시민사회의 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규율은 일반화되었고, 처벌 또한 일반화되었다. 규율과 처벌은 흔해졌다. 예전에는 군주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중죄를 지어야 처벌을 받았지만, 현대인들은 도로에 담배꽁초만 버려도 처벌을 받는다. 규율이 잦아진 만큼 처벌도 간소화됐다. 예전 처벌의 최소 단위는 커다란 몽둥이로 곤장을 얻어맞는 것이었는데, 요즘 처벌의 최소단위는 5만 원쯤 하는 것 같다. 담배꽁초를 무단투기했을 때 내야 하는 과태료가 그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무단투기를 신고했을 때 나오는 포상금도 있다는 것이다. (5천 원 정도 한다) 즉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감시를 당하는 것은 물론, 감시를 하는 것에도 익숙해져 왔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감시하기에 이 규율사회는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규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에 살게 되었다. 규율이 너무 많고 잦기에 우리는 규율이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렇게 규율은 구조로서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배웠을까? 짐작했겠지만, 그렇다. 우리는 학교에서 바로 이 규율권력에 복종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학습한다.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던 시절, 아마도 당신은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 이 과목들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학교의 본질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학교의 본질은 학업인 만큼, 학업에 충실했는지 시험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험을 봤으면 성적표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성적표가 있으니 석차가 있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뜯어 생각해 보면 당신이 당연했다고 믿어온 것들 중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말 학습이 학교의 본질이었을까? 당신은 여전히 타원에 접하는 직선의 함수를 구할 수 있는가? 염산과 수산화나트륨이 반응하여 물과 나트륨이온이 되는 화학식은 당신의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됐는가? 


학업에 충실하기 위해 정말 시험은 꼭 있어야만 하는가? 나는 미셸 푸코를 읽고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미셸 푸코에 대한 시험을 한 번도 치른 적이 없다. 잘 생각해 보면 학업과 시험은 필연관계는 아니다. 시험은 어떤 목적을 위해 치러진다. 


마찬가지로 시험을 보면 꼭 석차가 있어야 하는가? 성적표에 나의 점수와 지난 시험과 비교한 상대평가 정도만 있으면 안 되는가? 석차가 없으면 안 되는가? 


안된다. 석차는 꼭 필요했다. 시험의 목적 자체가 석차였기 때문이다. 학업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줄 세워지기 위해 시험을 치러온 것이다. 


우리는 실은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기 위해 교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운 것은, 사회엔 절대복종해야 하는 권위(선생님)가 있고, 거부할 수 없는 규칙(교칙)이 있으며, 세상(사회)은 내가 배우는 것이지 바꾸는 것이 아니고, 지배계급(선생님, 출제자)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우리, 학생들)끼리 경쟁해야 하며, 그 경쟁 결과(성적)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피지배에 익숙해지기 위해 학교 교육을 받는다. 우리는 뭔가 숭고한 것을 배우기 위해, 국어 영어 수학 수업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규율권력에 복종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거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앞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신체형이 감옥형으로 바뀜에 따라 처벌의 목적도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르주아 시대의 목적은 교화였다고 했다.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부르주아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학교를 통해 훌륭하게 교화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우리는 학교의 구조와 감옥의 구조가 같고, 학교가 감옥이라는 것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라 논리적 기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을 한번 더 해보자. 학교가 감옥이라면, 출소는 졸업일까?  


그렇지 않다. 규율권력에 대한 복종은 졸업 후에도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된다. 사회의 규율권력은 학교의 규율권력보다 더 강력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규율에 의해 권력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되며, 그 규율을 더 잘 지키고 우리 자신을 더 잘 도구화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교화한다. 


우리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누구보다 먼저 승진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전 시간은 세금을 내기 위해 일하고, 오후 시간엔 회사의 오너를 위해 일하며, 늦은 저녁 퇴근해서 TV 앞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허허 웃다 잠이 든다. 현대인은 규율권력에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복종한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거기에 있는 구조로서 우리를 지배하는 규율권력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다.   


현대 사회 전체의 구조는 실은 이미 감옥과 같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를 두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산다"고 하는데, 나는 "세상에 감옥이 있는 이유는 세상이 감옥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어느 푸코 연구자의 말을 더 좋아한다. 




세상이 감옥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이다음 얘기가 궁금한 사람이 있는가? 세상이 감옥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어서야만 감옥을 벗어날 수 있다면 자살이라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규율권력이 작동할 수 없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라도 가서 살아야 할까? 


이에 대해 나는 감옥을 거부하는 카뮈적 반항과, 감옥을 초월하는 니체적 초인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카뮈에 대한 글을 쓴 적은 없고, 니체에 대한 글을 하나 링크하겠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면, 당신이 규율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휘둘러보는 경험을 하는 MBTI에 대한 글도 하나 링크한다. 둘 다 같은 브런치북에 있는 글이다. 




https://brunch.co.kr/@iyooha/81


https://brunch.co.kr/@iyooha/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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