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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Aug 31. 2024

<수성의 마녀>는 건담이 아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야기 소비 형태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최신판 <수성의 마녀> ⓒ SUNRISE


얼마 전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의 최신판,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가 개봉했다. 멤버들하고 티타임에 커피를 사러 가면서 내가 물었다. 


나: 수성의 마녀는 어느 시대야? 


아트디렉터 L군: (빵 터짐) 아니, 수성의 마녀가 어느 시대냐고 묻는 시점에서 이미 틀린 거 아닌가요?


나: 왜? 


아트디렉터 L군: 그거 우주세기만 인정하겠다는 태도잖아요. 


나: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웃음) 그럼 당연하지, 우주세기가 아닌 건 건담이 아냐. 피규어 판매용 카탈로그 비디오지. 


아트디렉터 L군: (반박하고 싶지만 상대가 상사니 그저 쓴웃음을 짓는다) 


농담은 설명하면 재미없지만, 건담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도 있을 수 있어 조금만 설명해 보겠다. <기동전사 건담>은 15개 이상의 본편과 여러 외전들로 되어 있는 일종의 유니버스형 이야기 뭉치다. 그중엔 ‘우주세기’라는 설정으로 묶인 고전 건담 시리즈가 있고, 그 설정과 관련이 없는, 예컨대 평행우주형 배경 스토리를 가진 다른 작품도 있다. 그리고 나는 우주세기를 배경으로 한 고전적 건담 시리즈만 건담으로 인정하겠다고 말했고, 그것이 건담 시리즈 전체의 팬인 아트디렉터 L군의 무엇을 건드린 것이다. 


그런데 이 것은 왜 나와 L군 사이에서 웃음, 혹은 대화거리가 됐을까? 우리는 방금 무엇을 소비했을까? 우리는 건담의 스토리나 캐릭터, 메카닉을 소비하지 않았다. 심지어 배경 스토리나 설정을 소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방금 무엇인가를 소비했다.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며,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태도가 다르다는 걸 확인했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대체 우리가 소비한 것은 무엇일까? 




앞선 글, 포스트모던, 혹은 보편에 대한 거부에서 포스트모던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고, 다른 글에서는 전시된 카텔란의 바나나를 관람객이 먹은 사건을 들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독특한 이야기 소비 방식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단 이 글은 독자가 포스트모던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안다는 전제를 가지고 쓰이고 있으므로, 앞선 글들을 읽지 않은 분은 먼저 읽고 오시기를 바란다. 


앞선 글들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적 태도는 근대의 이데아 혹은 어떤 거대담론적 구도를 거부하고, 구도를 비틀거나 새로운 구도를 제안하는 태도라고 이야기했다. 지금껏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져 온 중심의 구도를 해체, 전복하고, 중심 혹은 정상을 상정하지 않은 개별, 혹은 다원적인 무엇들을 모두 긍정하는 태도가 포스트모던적 태도다. 그래서 작가-작품-관람자 구도에서 작품을 삭제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는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소비하는 형태에 대해 포스트모던은 어떻게 접근할까? 포스트모던은 늘 이데아를 거부하므로, 우리는 거부해야 하는 그 이야기의 이데아에 대해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모던 시대의 표준 이야기 소비 모형은 '작가가 제공하는 이야기를 독자가 소비하는' 모형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연애, 세르반테스가 제공하는 <돈키호테>의 모험, 도스토예프스키가 쓰는 <죄와 벌>의 윤리적 질문, 괴테가 말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낭만까지, 그 이야기들은 모두 작가로부터 제공되어 독자에게 읽혀왔다. 


작가가 이야기를 쓰면, 독자는 그 이야기를 읽는다. 작가가 슬픈 이야기를 쓰면 독자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슬퍼하고, 작가가 신나는 이야기를 쓰면 독자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신나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 이야기의 공급과 소비 방식은 이와는 좀 다르다. 


움베르트 에코는 <장미의 이름> 서문에서 이 책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 배경을 밝힌다. 자신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책의 원전을 우연히 입수했고, 자신은 그저 이 책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에코의 순수 창작물이다. 그런데 작가가 작품 속에서 자신이 작가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작가의 의도를 따르자면, <장미의 이름>엔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있지만 정작 이야기를 제공하는 작가가 없는 것이다. 작가-이야기-독자의 구도에서 작가가 사라졌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확실한 것은 ‘이 두 명의 남자가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뿐이다. 이 둘의 대화는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밥을 먹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빵이 싫다는 식의 대화가 이어지다, 결국 고도는 등장하지 않고 작품이 끝난다. 즉 이 이야기엔 사건도, 인물도 없다. 작가와 독자는 있으나 전달 대상인 이야기가 빠져 있는 것이다. 작가-이야기-독자의 구도에서 이야기가 사라졌다. 





고전, 모던, 포스트모던 각 시대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갈등 구조를 간명하게 그려낸 그랜트 스나이더의 이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맨 아래쪽을 보면 MAN vs. AUTHOR라는 항목이 있다. 어떤 포스트모던 소설에서는 작가가 직접 작품 안에 등장하거나, 심지어 등장인물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나'가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나'는 주인공이거나 화자이다. <드래곤 라자>의 '나'는 극 중 주인공인 후치 네드발이고, 셜록 홈즈 시리즈의 '나'는 셜록 홈즈는 아니지만 관찰자인 왓슨 박사이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나'는 밀란 쿤데라다. 작중 인물이 아니다. 작가가 직접 작품 안에서 작중 등장인물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어디에서 모티프를 얻었는지 설명한다. 심지어 독자들과 함께 등장인물의 이름을 짓거나, 자신이 쓰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사과를 하기도 한다. 


이 소설 3부에서 나는 옷을 다 입고 있는 토마시 곁에서 반나체에 중산모자를 쓰고 서 있었던 사비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감춘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거울 속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동안, 사비나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크게 흥분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생각도 희미해져서 토마시를 양탄자 위에 쓰러뜨린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4절에서




<ELDEN RING>은 전 세계에서 2,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 반다이남코


소설과 같은 전통적 매체뿐만이 아니다. 게임에서도 여러 새로운 시도가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게임 스토리텔링 기법은 소설이나 영화 등의 다른 매체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가 있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컷씬이나 텍스트의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전달된다. <Last of Us>나 <Uncharted>, <Call of Duty: Modern Warfare> 시리즈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일본의 프롬소프트웨어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포스트모던하다. 


<ELDEN RING>은 외부로 드러나는 서사 외에 세계에 대한 아주 정교한 세부 설정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 <ELDEN RING>의 이야기는 아이템에 쓰인 설명, 쪽지나 편지, 등장인물들의 알아듣기 어려운, 적은 수의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플레이어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ELDEN RING>은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하고도 이 게임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대개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야기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유튜브를 켜봐야 한다. <ELDEN RING>의 스토리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서 게임 유튜버들은 영상 컨텐츠를 만들기 위해 <ELDEN RING> 세계 곳곳을 꼼꼼히 뒤져가며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찾아낸 이야기를 엮고, 비어있는 부분은 추리를 하거나 비약을 해가며 전체를 짜 맞춘다. 이러한 컨텐츠는 매우 인기 있다. 당장 유튜브에 'ELDEN RING story'라고 쳐보면 수천 개의 영상이 등장한다. 


이야기를 작가가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를 독자들이 '찾아내는' 방식. 이 구도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의 방식과는 매우 다르며, 포스트모던에 속하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이미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그러니 이제 떡밥이었던 <수성의 마녀>에 대한 얘기를 하자. 


혹시 어떤 컨텐츠를 소비하는 동호회에 가본 적이 있는가? 소설이나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덕후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했었다. 그런데 덕후들의 모임에 가면 덕질의 대상인 작품, 그 본편의 내용 자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적다. (왜냐하면 이미 모두가 본편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덕후들에게 본편의 내용은 시시하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본편을 넘어서는 것, 혹은 본편이 있게 하는 것들이다. 이야기 배후에 있는 것들, 감추어진 이야기나 설정들, 작가나 제작자, 작품의 뒷얘기나 비화에 대한 것들 말이다. 덕후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적극적인 소비의 대상이 되며, 누가 더 많이,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가 경쟁 목표이자 우열의 지표가 된다. 


위에서 나는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소비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와 L군이 소비한 것은, <기동전사 건담>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사이의 구조, 혹은 그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즉 여러 편인 <기동전사 건담>이 서로 연결되고 연쇄된 그 구조와, 우주세기를 유일한 건담이라 주장하는 우주세기 원리주의자 그룹과 건담 전체를 모두 묶어 팬인 어떤 그룹 사이의 오래된 밈을 소비한 것이다. 


이러한 소비의 방식을 나는 '메타소비'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이야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들을 소비하는 것 말이다. 이러한 메타소비의 형태는 팬덤이 2차 창작물을 만들어 그들 스스로 소비하도록 하기도 하고, 심지어 2차 창작물 시장에서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의 2차 창작물을 만드는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는데, 이미 글이 너무 길어진 관계로 이다음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써보도록 하겠다. 


포스트모던 꼭지가 끝나간다. 마지막 글은 포스트모던의 방법론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위에 언급했었던, 포스트모던에 대한 다른 글들을 아래에 링크로 남긴다. 모두 같은 브런치북에 있는 글이다. 




https://brunch.co.kr/@iyooha/83


https://brunch.co.kr/@iyooha/85


https://brunch.co.kr/@iyooha/89


https://brunch.co.kr/@iyooha/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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