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서문, 마르틴 하이데거
예전에 철학 전공 대학원생들이 모인 클럽하우스(지금은 인기가 시들한 대화형 SNS) 대화방에 청자로 들어간 적이 있다. 누군가 제일 어려운 철학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대학원생 중 한 명이 "잘 모르겠는데, 철학 그만두고 싶으면 하이데거를 파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가 된다. 정말 심오하고, 정말 어려운 책이었다.
예전에 소광희 교수님 책으로 잠깐 겉핥기를 해봤을 때를 제외하면, 올해 한 6개월 정도는 하이데거에 매달린 것 같다. <존재와 시간>에 도전하기 전에는 박찬국 교수님의 입문서와 해설서를 읽었다. 그래도 하이데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긴 모름의 시간이 지나갔다. 하루 걸러 하루씩 내 철학 코치인 B군과의 대화방에 하이데거가 올라왔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철학 소재인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기본 개념 자체가 잡히지를 않았다.
<존재와 시간> 서문을 다 읽고 이제 하이데거의 기본 아이디어는 잡은 상태 같은데, 돌아보면 내게 이렇게까지 하이데거가 어려웠던 것은 칸트 때문인 것 같다.
칸트는 정말 놀라운 철학자인데, 칸트의 인식론 구도를 이해한 다음엔 세상 모든 것을 칸트의 구도에 놓고 보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 해석이 된다. 10^(-33)cm 플랑크 공간 단위까지 작은 공간까지 내려가기 전엔 뉴턴 역학과 상대성 이론으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 감자 깎기의 사용법을 배운 아이는 모든 감자를 그 감자 깎기로만 깎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칸트의 구도에서 출발하면 결코 하이데거의 구도에 닿을 수 없다. 이게 하이데거가 어려운 이유다. 칸트의 구도에서 출발하면 하이데거에 닿을 수 없는데, 반대로 칸트를 아예 모르면 하이데거의 기획이 무엇인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하이데거의 아주 기초적인 철학소, 하이데거 사유의 핵심 소재인 존재에 대한 글이다. 하지만 이 글의 절반은 그래서 칸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먼저 광원이 있다. 태양이든 형광등이든 어딘가에서 발사된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온다. 광자는 파동이기도 한데, 이때 튕겨 나온 광자의 파장 길이는 대략 750nm 정도가 된다. 이어 이 광자는 망막에 닿고, 시각세포는 이 750nm 길이의 파장을 특정 전기 신호로 바꾼다.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 전기신호가 전달되면 뇌는 알아차린다. 아, 빨간색이로구나.
뇌는 눈도, 코도, 어떠한 감각기관도 갖고 있지 않다. 오로지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이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 짜잔, 눈앞에 빨간 사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빨간색’이 과정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광자의 파장 길이와 시각세포가 발생시킨 전기적 신호, 시신경이 이를 뇌에까지 운반하는 과정 그 어디에도 빨간색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빨간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체의 바깥쪽에 있는가, 내 안에 있는가?
합리적으로 후자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제 엄청난 질문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색깔로 드러나는 우리의 외부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빨간색이 내 안에 있는데, 외부의 세계가 바깥에 있을 수 있을까?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내면에 비친 세계이다. 진짜 세계가 아니다. 사과는 우리 인식의 원인이 아니다. 사과는 결과다.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 심상(心象), 즉 이미지인 것이다.
칸트는 기존 인식론이 가지고 있었던 당연한 것, 인식 대상의 위치를 인식 주체의 바깥에서 주체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외부 세계는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과정을 통해 해석되어 내부에 존재한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 나의 감각을 통해 내 안에 들어와 내 안에 구축된, 다채로운 색상과 수많은 사물들, 빛과 어둠과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이 세계. 내 안에 갇혀 있으면서 내 밖을 구성하는,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를 칸트는 현상계(現象界, phenomenon)라고 부른다.
자, 어떤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내 안에 갇혀 있는 세계라는 것이 이해가 됐는가?
지금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문장을 단지 문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진리는 원래 가르칠 수가 없다. 깨닫는 방식으로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 경우는 어느 지하철 역 앞에서 현상계가 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십 분을 훨씬 넘게 서 있었다.
이해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우리는 이제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사과 표면의 빨간색이 아니라, 사과 전체가 어떻게 나의 현상계로 들어오는지 살펴볼 것이다.
사과를 책상에 놓고 바라보자. 지금 사과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앞, 아마 1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다. 그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가로방향으로 약 65m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래서 왼쪽 눈과 오른쪽 눈으로는 다른 이미지가 들어온다. 즉 왼쪽 눈으로 들어온 이미지와 오른쪽 눈으로 들어온 이미지는 다르게 생겼다. 이 차이를 양안시차라고 한다.
또한 이것이 VR(가상현실, Virtual Reality)의 원리다. VR 콘텐츠는, 그게 게임이든 영상이든 제작 원리가 같다. 약 65mm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뷰포트를 설치하여 같은 영상을 공간상 65mm 떨어진 곳에서 각각 렌더링 한다. 그리고 왼쪽 영상을 왼쪽 눈으로, 오른쪽 영상을 오른쪽 눈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하면 2D 평면 모니터를 바라볼 때 경험할 수 없는 입체감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여담인데 나는 VR게임을 7년 동안이나 만들었다)
자,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 그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VR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았다. 우리에겐 눈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눈이 발생시키는 이미지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 차이는 외부에 있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놀라운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왼쪽 눈을 통과한 이미지는 나의 내부에 있다. 오른쪽 눈을 통과한 이미지 역시 나의 내부에 있다. 그렇다면 그 차이, 이 두 이미지의 차이 역시 우리의 내부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차이가 우리의 내부에 있다면 우리는 더욱 놀라운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간은 우리의 외부에 있지 않다. 공간은 우리의 내부에 있다. 우리가 바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사과의 빨간색을 만들어 낸 다음 원래 존재하는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현상계의 공간 구조 자체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현상계를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 다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해 내는 공간을 칸트는 우리 감각의 외적 직관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자, 칸트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가장 쉽고 빠르게 설명할 수 있는 칸트의 구도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온 세계를 우리 안에서 일으켜 세우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으킨 세계를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이 칸트의 구도에 대고 질문을 한번 해보자. 이 구도에서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칸트의 설명방식에 따르면 객관적 사물과 주관적 표상은 서로 구분되며, 우리의 인식은 객관적인 사물 자체의 인식이 아니라 주관적인 사물의 표상의 인식이다. 즉 우리는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객관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주관적 표상일 뿐인 것이다. 나는 사물이 나의 머릿속에 그려주는 표상만을 알며, 따라서 사물이 내게 어떻게 보이는지만을 알 뿐이지, 사물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칸트 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칸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비친 세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에는, 우리가 만들어낸 현상계에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존재는 우리의 바깥에,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곳에, 사물 그 자체에 있다. 즉 칸트의 구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존재를 발견해 낼 방법이 없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이 다채로운 세상 속에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자, 우리는 비로소 이 지점에 섰다. 바로 여기가 하이데거의 출발점이다. 하이데거가 이 질문을 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존재를 알 수 없는가? 하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하이데거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칸트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를 모르면 하이데거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이번엔 사과대신 이름도 모르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열대 과일을 당신의 앞에 가져다 놓아보자. 당신은 아직 이 과일이 무슨 맛인지, 어떤 질감인지 모른다. 쪼개보기 전엔 내부의 색상도 알 수 없다. 즉 당신 인식의 결과인 당신의 현상계엔 이 과일의 맛과, 과육의 질감과, 내부의 색상이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과일의 맛과, 과육의 질감과, 내부의 색상이 정말 이 세계에 없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있다. 그것들이 아직 당신의 감각 기관을 통해 당신의 현상계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은 인식된 세계를 살아가지만 인식된 세계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방금 존재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에게 도착해 있는 무엇.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의 인식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인식하여 살아가는 현상계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실제 세계 사이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만은 우리도 이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마침내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이라고 하는데, 하이데거는 먼저 오랜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이 질문 자체가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다고 말한다.
철학은 늘 개별 사물의 본질, 즉 이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매달려왔지만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그 존재함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이 있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생물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가능하고, 경제학은 경제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가능하며, 사회과학은 사회가 존재한다는 전제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 존재의 의미 자체에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에 대한 학문은 모든 학문의 선행 학문이 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서문에 이렇게 쓴다.
근본개념들은, 그 안에서 한 학문의 모든 주제적인 대상의 밑바탕에 놓인 사태영역이 선행적이며 모든 실증적인 탐구를 주도한다는 이해에 이르게 되는 그러한 규정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그에 상응하는 사태영역 자체를 선행적으로 철저히 탐구할 때에만 참되게 증명되고 근거제시될 수 있다. 그러한 근본개념들을 길어내는 선행적인 탐구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존재자를 그 존재의 근본구성틀에서 해석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탐구가 실증과학을 앞서 가야 한다.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존재론이야 말로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모든 학문 위에 선행하는 존재 자체의 의미를 묻는 사유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 중요한 질문을 우리가 그동안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오랜 철학의 전통이 이 질문을 소홀히 해왔음을 지적한다. 존재하는 어떤 개별(존재자)을 다루는 학문은 많았지만, 그 개별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 존재의 드러남과 의미에 대한 본격적 탐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하이데거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소인 존재자, 존재, 존재론에 대해서 간단하게만 살펴보자. (사실 이 세 철학소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한 바닥 글은 끝날 것이다.)
가장 쉬운 철학소는 존재자다. 존재자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다. 나, 당신, 당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 책상과 창문, 산과 바다, 지구와 우주는 모두 존재자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바람이나 어둠, 사랑과 미움, 예술적 감흥도 존재자다. '있다'와 '이다'로 묘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자다.
여기까지는 아주 쉽다. 이제 존재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제 조금 어려워진다.
존재는 영어로 being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있다'와 '이다'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한다. 하지만 라틴어계열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문장에서 am은 있다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I am a game developer." 이 문장에서 am은 이다의 의미로 쓰였다.
이후의 이해에서는 오해가 될 수 있겠지만, 첫 단계에서 존재에 대한 가장 쉬운 이해는, 어떤 존재자의 모든 있다와 모든 이다를 합쳐 놓은 것이다. 어리둥절할 텐데 괜찮다. 금방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을 칸트의 구도에서 다시 살펴보자.
당신의 현상계에 도착해 있는 사과는 물론 존재자다. 사과는 지금 당신의 눈앞에 분명히 있다. 그럼 이다로써 설명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사과는 어떠한가? 사과는 빨갛고(The apple is red.), 사과는 단단하며(The apple is hard.), 사과는 달콤하다. (The apple is sweet.) 이 말고도 수많은 존재 특성들을 사과는 가졌을 것이다.
그럼 방금 당신이 먹어본 적이 없었던 그 열대 과일로 돌아가자. 어떠한가? 존재자로서 그 정체불명의 열대 과일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열대 과일은 존재자로서 당신 앞에 있다. 그런데 당신의 현상계에, 그 열대 과일의 색상과 모양 외에, 나머지 존재 특성들이 있는가? 그 과일의 맛은 어떠한가? 과육의 색상은 어떠한가?
이제 감이 왔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론을 통해 존재에 닿을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인식을 통해 존재자에는 닿을 수 있다. (엄밀하게는 당연히 모든 존재자에게 닿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은 블랙홀을 경험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나는 존재를 존재 사실과 존재 특성 전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어떤 존재자의 모든 존재 특성에는 닿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식을 통해서는 결코 어떤 존재자의 존재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방금 존재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거기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존재 특성. 그리고 우리는 칸트의 인식론만을 가지고는 존재에 닿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넘어야 할 산이 몇 개 더 남았다. 그중 하나는 다음의 철학소이다. 바로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존재와 다르다. 존재가 그저 이다와 있다라면, 존재론은 그것의, 그러니까 존재의 의미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존재론이다. 하이데거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등한시되었다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대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눈앞에 사과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와 당신, 바람과 저녁, 태양계와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우리는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질문의 대답에 닿을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 질문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존재자는, 그 질문을 떠올린 그 존재자 자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 라자>에 등장하는 드래곤들은 자주 권태를 느낀다. 그들은 거의 영원을 사는 존재다. 그들은 권태를 느끼므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렇게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했기에 그들은 여전히 권태를 느낀다. 이영도가 직접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그 세계에 드래곤 철학자가 있어서, 이 질문에 실제로 대답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름 대로의 논리 체계가 있는 학문을 세울 수 있었다면 그 학문의 이름은 영원생존론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들과는 달리 영원을 살 수 없는 우리는 영원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렇게 묻지도 않는다. 그 질문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지금 이렇게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이 질문, 즉 존재란 무엇인가? 이 존재 물음을 떠올린 것은 지구상에서는 인간뿐이다. 산과 바위는 물론, 다람쥐나 곰, 침팬지나 돌고래도 이러한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오직 우리 인간들 만의 질문이다. 그렇다면 그 질문과, 그 질문의 대답은 우리 인간에게만 유의미한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론의 질문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시작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인간이 무엇이길래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문제 삼는가?
하이데거는 존재론을 연구하는 시작점으로서의 인간, 유일하게 존재를 문제 삼고,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존재자인 인간을, 존재의 이유를 탐색하기 위한 첫 분석 대상인 우리 자신을 현-존재(現-存在, Dasein)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대체 존재의 의미가 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안하지만 이 한 바닥 글 안에서 구할 수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존재와 시간>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없겠지만 짧게) 대답하면, "존재란 경악의 감정 속에서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 앞에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기획,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현재에서 끊임없이 새로 구성해 나가는, 실존의 운동이다."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을 풀어쓰기 위해서는 방금 쓴 것과 같은 분량의 글이 몇 편 더 필요하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해 보도록 하겠다. 존재론, 즉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정말 길고, 멀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이 글에서 하이데거의 정말 어려운 아포리즘 하나를 이해해보려고 하겠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서문 제5절에 이렇게 쓴다.
현존재는 분명 존재적으로 가까운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바로 각기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먼 것이다.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줄여서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먼 것이다."라고 말하여지는 이 아포리즘은 아름다운 것은 물론, 하이데거 철학의 정수가 담긴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이해해 보는 것으로 이 긴 독후감을 마치도록 해보자.
우리는 위에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배웠다. 존재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존재적이라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존재적인 것은 바로 존재자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존재자 중에 현존재(우리)에게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것은 바로 우리다. 우리로부터 가장 가까운 존재자는 바로 우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보다도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 보다도 우리에게 가깝다. 우리보다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자는 없다. 이것이 바로 존재적으로 가장 가깝다는 말의 의미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먼 것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방금 그 의미를 알았다. 존재는 그저 존재자를 가리키지만, 존재의 의미는 "존재란 경악의 감정 속에서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 앞에서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기획,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현재에서 끊임없이 새로 구성해 나가는, 실존의 운동이다."인 것이다. 이것은 존재와도, 존재자와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존재의 의미는 정말 멀리에 있다. 존재론의 대답, 이 질문의 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정말 먼 길을, <존재와 시간> 전체의 내용을 따라가고 나서야 가능하다. 존재의 의미는, 그러니까 존재론적인 것은 우리에게서 정말 멀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우리)은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멀리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아포리즘의 의미다.
긴 독후감이 끝났다. 사실 기본 철학소의 분석과 현존재가 존재론 탐색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 외에도 현존재의 존재적-존재론적 우위, 현존재 분석을 통해 하이데거가 정말로 닿으려고 했던(그리고 끝내 닿지 못했던) 궁극적 목표인 존재 일반, 인식론을 방법론으로 채택할 수 없기에 선택했던 전략으로서의 현상학적 해석학 정도에 대한 해설 까지는 써야 서문에 대한 요약은 될 것이지만, 어림도 없었다. (사실 어림도 없을 줄은 독후감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이미 알았다)
그래도 하이데거의 문제의식 정도는 소개했다고 생각한다. 칸트와 인식론이 존재에 닿을 수 없음에 대한 설명, 존재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한 분리된 철학소로서의 존재자, 존재, 존재론. 그리고 마지막 유명한 하이데거의 아포리즘을 다뤘다. 하이데거에 대한 괜찮은 시작점 정도는 되지 않을지, 하고 이 길기만 하고 알맹이 없고 재미없는 글에 대해 변명하려고 한다.
<존재와 시간> 서문은 이기상 교수님의 번역서로 70페이지 분량이다. 나는 이 분량을 읽는 데 30시간 정도를 썼다. (사실 그저 취미로 독서모임을 시작한 것뿐인데, 어쩌다가 하이데거의 1차 저작까지 읽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취미 독서인일 뿐인데, 이제 보니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
일단 서문까지 읽은 것으로 독후감을 하나 썼으니 <존재와 시간>은 당분간 봉인하려고 한다. 읽는 것 자체는 가능한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선 읽다 만 박찬국 교수님의 해설서 <존재와 시간 읽기>를 읽고, 몇 년 후 다시 돌아오기로 한다.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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