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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1) 인식론의 문제

by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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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을 다 읽었다. 이 책, <형이상학 서설>은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하나인 <순수이성비판>에 대해 칸트가 스스로 쓴 쉬운 해설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간하고 대단히 실망했다고 한다. 본인은 세기의 역작이라고 생각했지만 학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기 때문이다. 너무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칸트의 본문을 완전히 오독한 비판 논문들이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그래서 칸트가 작정하고 스스로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를 쓰겠다 마음먹은 후 집필한 책이 바로 이 <형이상학 서설>이다. 다행히도 이 책의 효과 때문인지 <순수이성비판>은 학계에서 재평가를 받았고, 아시다시피 칸트의 주저이자 지금도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저술 중 한 권으로 꼽히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모두가 살면서 이 책의 제목쯤은 한두 번 접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이 책이 대체 무엇에 대한 책이며, 칸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는지 궁금했다면 아마 이 시리즈가 칸트로 향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나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고, 내가 읽은 것은 칸트에 대한 온갖 2차 저작들과 <형이상학 서설>과 <순수이성비판>의 서문뿐이고 <순수이성비판> 본문 전체를 다 읽은 것은 아니므로, 학문적으로 엄밀한 글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이 글은 나 스스로를 위한 정리이기도 하고, 내용을 잊을 미래의 나를 위해 남겨 놓은 노트이기도 하다. 한두 편으로는 끝나지 않는, 꽤 긴 글이 될 것이다. 칸트의 작업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우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있는 인식론과, 칸트의 문제의식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해 보자.




IMG_2239.jpeg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렸던 날


밤 새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기 위해 일어난 당신은 창 밖에 새하얀 눈에 파묻힌 세상을 바라본다. 눈이 야기할 번잡스러운 출근길에 대한 걱정은 잠시, 당신은 창문 앞에서 어린 시절부터 몇 번을 봐 왔어도 여전히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본다.


그때, 당신에 이어 당신의 배우자가 일어났다. 뭐 하냐고 묻는 배우자에게 당신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봐봐. 눈 왔어."


배우자가 다가오고, 그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본다. 둘은 눈으로 덮인 세상을 공유한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어느 날 아침의 얘기다. 혹은 겪지 않았어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장면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우선 이런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눈으로 덮인 세상을 왜 하얗게 보는가? 왜 눈은 당신에게 그렇게 보이는가? 수소 분자 두 개와 산소 분자 하나로 된 물 분자들이 냉각되면서 위치 에너지를 잃고 서로 결합하여 형성된 수분 집합을 당신은 왜 그러한 색으로 보는가?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면 성공이다. 그렇다면 더 신기한 질문을 해보자. 눈만 하얀 것이 아니다. 라떼의 거품도 하얗고, 백조와 북극곰, 백합과 재스민도 하얗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당신은 하얀 눈을 보고, 하얀 백합을 보았다. 당신이 본 것은 눈과 백합이다. 당신은 하얀색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에게는 '하얀색'의 개념이 있는가?


이번엔 더 이상한 질문을 해보자. 당신이 창문 앞에서 배우자를 불렀을 때, 당신이 보는 것을 배우자도 보았으리라고 믿는가? 당신에게 있는 이 하얀색의 개념이 당신의 배우자에게도 똑같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는가?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이러한 질문들을 하는 학문, 그러니까 '나는, 혹은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는가?'하고 묻고 답하는 학문을 인식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질문들이 전혀 어이없지 않다는 것을 당신도 곧 알게 될 것이다.




IMG_0076.jpeg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데카르트와 합리론자들은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을 우리는 갖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사과 한 개보다 사과 두 개가 더 많다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숫자 2에 5를 더하면 7이 된다는 명제는 우리가 굳이 매번 경험하지 않아도, 즉 이 명제를 만날 때마다 돌멩이 일곱 개를 가져다 합쳐보지 않아도 늘 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합리론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수학적 진리는 인간이 경험을 통해 획득한 관념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가상적인 관념에 속한 것도 아니다. 수학적 진리는 인간이 일체의 경험에 앞서 경험과 독립적으로,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관념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2 더하기 5가 어느 날 갑자기 11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기에 수학은 가능하다.


합리론자들을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성적인 앎, 수학적 앎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보장하는, 우리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을 본유관념(本有觀念)이라고 했다. 합리론에 의하면 우리는 자아, 신(神), 수학과 공리에 대한 것들에 대한 개념을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다.




IMG_0082.jpeg 데이비드 흄(왼쪽), 존 로크(오른쪽). 위키피디아 제공.


데이비드 흄, 존 로크와 같은 경험론자들은 본유관념의 존재를 믿는 것은 독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신에 대한 관념을 가르칠 수 있는가? 백치로 태어나 자란 어른에게 대수나 기하 같은 수학적 공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가? 만약 정말 우리 모두가 가지고 태어나는 본유관념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기나 백치도 본유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기와 백치는 본유관념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경험론자들은 자아, 신, 수학과 공리 같은 관념들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며 경험과 교육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에게는 본유관념은 물론, 경험에 앞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백지와 같고, 모든 관념과 인식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귀납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날 누군가가 바닷가의 돌이 해가 뜬 후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보자. 그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차가왔던 돌이 햇볕을 받아 따뜻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이 귀납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햇빛을 받으면 돌은 따뜻해진다'는 일반 명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지식이다.




그런데 귀납은 늘 결정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칠면조가 있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인간이 문을 열고 들어와 칠면조에게 먹이를 주었다. 해가 뜨면 돌이 따뜻해지듯, 칠면조는 문이 열리면 매일 먹이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계속 반복되었고, 칠면조는 귀납적으로 '문이 열리면 먹이가 온다'는 일반 명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문이 열리자 인간은 먹이를 주지 않고 칠면조의 목을 비틀어 죽여 버렸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귀납의 취약점을 드러낸 버트런드 러셀의 '러셀의 칠면조'다. 실은 우리 모두가 칠면조일 수 있다. 오늘 아침에도 해가 뜨면 돌이 따뜻해졌던 것은, 누군가 우리의 목을 비틀어 죽이는 크리스마스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경험으로 얻어낸 인식은 우연성과 개연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경험론의 결론에 우리도 닿을 수 있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연과학의 모든 명제는 지식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내일 아침 해가 떴을 때, 돌은 따뜻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경험론은 회의론으로 귀결된다.


바로 여기에서 칸트의 문제의식이 출발한다.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유관념으로 설명하면 인식론은 독단론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설명하면 인식론은 회의론에 덜미를 잡힌다.


그렇다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확실한 인식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합리적 독단론도, 경험적 회의론도 아닌 다른 길은 없는가?


이제 칸트가 등장할 시간이다. <순수이성비판>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어서 칸트가 자연과학을 구원해 가는 과정을 두 번째와 세 번째 꼭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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