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 일행은 블랙홀 근처에 있는 밀러 행성에 착륙한다.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이다. 그 행성에서 쿠퍼 일행은 예기치 않았던 사고를 만나고, 위기일발의 순간 쿠퍼는 밀러 행성을 간신히 탈출하여 모선에 착륙선을 도킹시킨다. 일행을 맞이한 동료는 “왜 이렇게 늦었느냐”라고 묻는다. 비로소 쿠퍼는 동료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것을 알아차린다. 그 사이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과학이나 우주론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도 블랙홀에 대해서는 흥미로워한다. 아마 대개는 이러한 시간 왜곡 효과와, 사람은커녕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떤 구멍으로 블랙홀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블랙홀과, 카를로 로벨리와 양자중력이론이 설명하는 화이트홀 가설에 대해 써보려 한다.
블랙홀의 존재는 수학적으로 예측되었다. 1916년, 독일 물리학자 칼 슈바르츠실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의 엄밀해를 유도하다 매우 이상한 천체가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엄청나게 큰 질량을 가진 별이 매우 작은 크기로 압축되면 시간과 공간을 크게 왜곡하는 기묘한 천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 천체가 바로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구멍이 아니다. 별과, 그 주변의 왜곡된 시공간이다)
아인슈타인은 처음엔 이 천체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론이 탄생시킨 이론적 천체지만, 아인슈타인은 시공을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왜곡하는 물체가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 사후에도 블랙홀은 이론적 천체로만 남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예측과는 달리 1950년대 이후 천문학 관측 기술이 발달하자 천문학자들은 블랙홀의 존재에 대한 직간접적 증거들을 이론 물리학자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0년대, 천문학자들이 백조자리 X-1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블랙홀은 정말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물리적으로 인류가 블랙홀을, 정확히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실제로 관측한 것은 칼 슈바르츠실트 이후 100여 년이 지난 2019년이다. 우리는 놀라운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들은 수 킬로미터 크기의 블랙홀부터, 태양계 전체만큼이나 큰 블랙홀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블랙홀은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소재가 아니다. 이미 수많은 블랙홀이 우주에서 발견되었다. 우리 은하의 중심에는 블랙홀이 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듯, 태양은 블랙홀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블랙홀이 정상과학에 오르자 물리학자들은 또 다른 논의를 시작했다. 블랙홀이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기만 한다면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이 위배된다. 블랙홀이 뭔가를 삼킨다면 뭔가를 토해내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단순한 생각이 화이트홀의 최초 아이디어다.
내가 소년 잡지에서 화이트홀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것은 중학생 때, 그러니까 1980년대였다. 기억으로는 화이트홀은 블랙홀과 일대 일로 짝꿍을 이루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웜홀로 연결되어 있는데, 블랙홀로 들어간 것은 웜홀을 통해 우주 공간 어딘가, 다른 장소에 있는 화이트홀을 통해 나오게 된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하지만 화이트홀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이후 급속하게 사라져 간다. 스티븐 호킹이 블랙홀이 열을 방출하고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이를 호킹복사라 한다) 블랙홀에 뭔가가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블랙홀 자체에서 뭔가가 나올 수 있다면 물리학은 더 이상 화이트홀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 블랙홀이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은 무한정 계속될 것이고, 그래서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블랙홀은 자연스럽게 마지막엔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것이 현대 과학자들이 정상과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블랙홀의 죽음이다. (무한정이라는 단어를 굵게 표시한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러나 카를로 로벨리와 일단의 양자중력이론가들은 사라진 화이트홀 가설을 다시 논의 테이블 위에 올린다. 양자중력이론이 옳다면, 화이트홀은 다른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양자 중력 이론의 가장 중요한 가설은 공간과 시간이 입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시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문장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입자? 입자라니. 나는 당장 손을 뻗어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손을 휘저을 수 있는데, 이 공간이 입자로 되어 있는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이상한가? 괜찮다. 원래 양자역학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일단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다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학문적 엄밀함은 다소 포기하기로 하겠다.
풍선을 생각해 보자. 바람을 넣은 풍선을 손에 들고, 양손으로 풍선을 압축해 보자. 처음에는 말랑말랑했던 풍선은 어느 순간부터는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떤 임계점을 넘으면 펑하고 터져버린다. 상상할 수 있는가?
풍선을 압축하면 풍선 내부의 공간이 줄어든다. 공간이 줄어들면 풍선 내부에 있었던 공기 분자들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가까워진 공기 분자들은 서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증가한 공기 분자의 운동 에너지를 풍선 껍질이 견딜 수 없게 되면 풍선은 터져버린다.
중요한 것을 알았다. 공간이 압축되면 내부 입자의 에너지는 증가한다. 자, 이 사실을 양자역학 수준의 논의, 그러니까 미시세계로 가져가보자.
어떤 공간을 상상해 보자. 대충 택배 상자 하나 정도의 공간이라고 치자. 거기에 입자를 하나 가져다 놓자. 그리고 상상으로 상자를 압축해 보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상자가 작아짐에 따라 입자의 에너지는 점점 증가할 것이다. 거시세계를 벗어나 분자나 원자 크기까지 택배 상자를 줄이면 입자는 상자의 내부 표면에 격렬하게 부딪히게 될 것이고, 풍선 속 공기 분자들처럼 계속해서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무한에 가깝게 택배상자를 압축하면 입자의 에너지 역시 무한정 증가할 것이다.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얻게 되면 입자는 어떻게 되는가?
에너지는 질량과 같다.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가졌다는 것은 곧 무한에 가까운 질량을 가졌다는 것이다. (질량과 에너지가 상호 교환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공식이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E=mc^2 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질량을 가진 것은 무엇이 되는가?
그렇다. 블랙홀이 된다.
이제 블랙홀이 된 입자는 택배상자와, 그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공간은 더 이상 공간으로 관측되지 않는다.
이 논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간단한 사고실험의 결과는 우주에는 어떤 크기 이하로는 공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최소 크기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플랑크 공간이라고 한다.
위에서 블랙홀은 블랙홀이 된 별과, 그 별이 왜곡시킨 공간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블랙홀 속의 별은 호킹 복사로 에너지를 계속 방출한다. 동시에 점점 더 압착되어 끊임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무한정 별이 작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위 단락에서 무한정이라는 단어를 굵게 표시한 이유가 이것이다)
블랙홀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순간을 만난다. 블랙홀을 구성하는 모든 입자가 플랑크 공간 크기에 도달하면 블랙홀은 이제 최대로 작아진 것이다. 블랙홀은 증발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으니 압착은 중단된다. 로벨리는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블랙홀, 그러니까 구성 입자가 모두 플랑크 크기의 공간이 되어버린 상태의 별을 플랑크 별이라고 부른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더 이상 별이 압축될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압축되고, 시간은 사라지며, 곡률이 무한대에 가까워져 공간이 극단적으로 왜곡되는 순간, 일종의 특이점(Singularity)의 순간, 별의 모든 구성 요소가 거시적 속성을 모두 잃고 양자적 속성만을 갖게 되는 순간, 로벨리는 별 전체가 양자처럼 움직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한 궤도에서 다음 궤도로 전자가 도약하듯, 별 전체가 도약하는 것이다.
쇠로 만들 구슬을 여러 개 가져와서 벽을 향해 던져보자. 거시 세계에서는 구슬들은 당연히 벽에 충돌한 후 다시 퉁겨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양자 세계에서는 몇 개의 구슬이 벽을 통과해 벽 반대편에 나타난다. 도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양자 터널 효과라고 한다. 양자 상태가 된 별은 양자 터널 효과를 얻는다. 도약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별 전체가 도약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디로 도약한다는 것일까? 로벨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도약의 주체가 별을 구성하는 입자가 아니다. 로벨리는 시공 자체가 도약한다고 말한다. 시공간 도약은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혹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는 공간적이지도, 시간적이지도 않은 현상이다. 시공간 자체가 한 구성에서 다른 구성으로 양자처럼 도약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양자역학과 양자중력이론의 차이점이다. 코펜하겐 해석의 양자역학에서, 양자는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하지만 양자중력이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양자중력이론은 공간 자체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양자역학 방정식이 공간 속의 물리 시스템이 한 구성에서 다른 구성으로 도약할 확률을 계산해 낸다면, 양자중력방정식은 공간의 구성 자체가 한 구성에서 다른 구성으로 도약할 확률을 계산해 낸다.
그리고 양자중력이론 방정식이 기술하는, 플랑크 별 이후의 새로운 구성은 놀랍다. 도약하여 도착한 우주에서, 시간은 음의 값을 가지게 된다. 플랑크 별은 시간이 역전된 우주로 점프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로벨리와 양자중력이론이 말하는 화이트홀이다. 화이트홀은 시간이 역전된 블랙홀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로벨리와 양자중력이론이 설명하는 블랙홀의 운명이다. 더 이상 압축될 수 없을 정도로 압축된 블랙홀은 양자 터널 효과를 통해 화이트홀로 변신한다. 화이트홀의 시간은 역전되어 있다. 마치 영화 필름을 뒤로 돌리기 시작한 것처럼, 블랙홀에서 일어났던 일이 (우리의 관점에서는) 거꾸로 일어난다.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물질이 바닥을 딛고 다시 반등(바운스)한다. 공간과 시간이 다시 팽창한다.
블랙홀로 들어갔던 모든 것들은 화이트홀의 지평선까지 튀어 오른 다음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을 통과해 빠져나온다. 결국 우리의 우주로 돌아온다. 이것이 로벨리가 말하는 블랙홀, 혹은 우주의 생애다.
그리고 이 가설은 또 다른 몇 가지 가설로 이어진다. 하나는 만약 화이트홀이 시간이 역전된 블랙홀이라면, 빅뱅이 우주의 시작이 아니라, 이전 우주의 붕괴로 만들어진 화이트홀의 '빅 바운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바른틀 앙상블(Canonical Ensemble) 이후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heat death of the universe)이 우주의 끝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또 한 가지 가설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관측되지 않는 암흑 물질(Dark Matter)의 정체가 역전된 시간 때문에 우리의 시간상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화이트홀 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무척 매력적이고 나는 이 내용이 담길 로벨리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화이트홀 자체는 관측할 수 없다. (화이트홀의 외형은 실은 블랙홀과 구분되지 않는데 분량상 이 글에 담을 수 없으니, 궁금하다면 이 내용은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지만 화이트홀이 시간이 역전된 블랙홀이라면, 1930년대에 스위스 천문학자 프리츠 츠비키가 제기한 이후, 1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암흑 물질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화이트홀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역전되어 있지만, 화이트홀을 기술하는 양자중력이론 방정식의 해에서 중력 방향은 여전히 양수이다. 시간이 역전된다고 중력이 척력이 되지 않는다. 화이트홀은 여전히 중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보이지도, 관측되지도 않지만 우리 우주에 천체 외의 질량이 존재하는 이유라면? 이제 양자중력이론은 암흑 물질의 존재를 밝힐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언젠가의 글에서도 썼듯, 나의 읽기는 어린 시절에 내가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다. 나는 오늘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해 답했다.
"화이트홀이 정말 있을까요? 블랙홀과 웜홀로 연결되어 우주 어딘가에 있다는, 그 거대한 구멍이요."
1980년대, 소년 잡지를 무릎에 내려놓고 공상의 세계에 빠진 내게, 나는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며 대답해 줄 수 있게 되었다. 화이트홀은 블랙홀과 웜홀로 연결된 것은 아니고, 블랙홀 자체가 화이트홀이라고. 요즘 과학자들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고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발한 비유와 아름다운 문체로 쓴다. 그리고 발견한 물리학적 사실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실재(實在)'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좋았다. 이 이야기도 아래에 링크로 남긴다.
다만 이 글을 보고 <화이트홀>로 카를로 로벨리를 접하고 싶어 졌다면, 다른 책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이 책은 양자중력이론이 말하는 시공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쓰였기 때문이다. 첫 책으로 권할만한 입문서를 아래에 남긴다.
https://brunch.co.kr/@iyooha/103
https://brunch.co.kr/@iyooha/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