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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2) 흄의 명제들

by 이상균

(1)편에서 이어집니다. 검색 등으로 이 글로 유입된 분은 (1)편을 먼저 읽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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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1711~1776),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1)편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유관념으로 설명하면 인식론은 독단론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설명하면 인식론은 회의론에 덜미를 잡히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칸트의 기획은 이 인식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자.


칸트가 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은 결국 회의론이라는 흄의 논리를 조금 더 깊게 알아야 한다. 조금 길지만,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흄은 모든 명제를 선험적 명제와 후험적 명제로 구분한다. 선험적, 후험적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텐데, 둘 다 어려운 단어는 아니다. '선험적(先驗的)'은 글자 그대로라면 '경험에 앞선'이라는 뜻이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즉 선험적 명제는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명제다. 예를 들어 7+5=12 같은 명제나, '두 점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 같은 명제는 선험적이다. 7+5=12가 맞는지 굳이 돌멩이 열 두 개를 가져다 더하고 세어보지 않아도(경험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명제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후험적(後驗的) 명제는 '경험적 명제'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후험적 명제는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꼭 경험이 필요한 명제다. '철수는 팔씨름을 잘한다'는 명제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철수와 팔씨름을 해보아야 한다.


선험적 명제와 후험적 명제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필연성이다. 선험적 명제는 반드시 참이다. 경험이 필요 없다는 말은 잘 생각해 보면 필연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반대로 경험적 명제는 필연적이지 않다. 철수가 운동을 열심히 해왔고, 그래서 경험해 본 결과 팔씨름을 잘할 수도 있지만 그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은 잘 생각해 보면 우연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연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라는, 마지막 문장을 꼭 기억해 주기 바란다.


우연히 팔씨름 잘하는 철수가 등장했던 영화 Over the Top (1987), 팔씨름이 소재인, 매우 재미있는 영화다.




그런데 명제를 나누는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로 명제들을 나누는 것이다. 약간 더 어려운 개념일 수 있는데, 역시 또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분석적 명제는 주어가 이미 술어의 개념을 포함한 동어반복 명제를 말한다. '모든 총각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이 명제의 경우 필연적으로 참이다. 분석적 명제는 자신 스스로를 분석하여 참 거짓을 구별해 낼 수 있다.


반면 종합적 명제는 명제 내부를 분석해도 참 거짓을 확인할 수 없는 명제를 말한다. '철수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철수는 결혼을 했을 수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명제가 참인지 참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철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당연해 보이는 이 구분에 흄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분석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지 않으며, 지식은 종합적 명제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러하다. 분석적 명제는 주어의 의미를 술어로 풀어썼을 뿐이다. 동어반복으로는 지식을 추가할 수 없다.


반면 종합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다. 철수가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철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철수에게 물어본 결과 결혼을 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다. 아, 철수는 결혼을 했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종합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다.




자, 여기까지 어렵게 오셨다. 이제 흄의 결론이다


흄은 수학은 선험적-분석적인 명제라고 말한다. 7+5=12라는 명제는 경험이 필요 없는,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이지만 등호의 좌변과 우변이 같은, 동어반복적인 분석적 명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이긴 하지만 위에서 밝힌 대로 지식을 담고 있지는 않다.


또한 흄은 물리학은 경험적-종합적 명제라고 말한다. 뉴턴 물리학이 계산한 경로로 태양계의 항성들은 움직인다. 이는 지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적으로 확인이 필요한 지식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필연성을 결여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흄의 논리대로는 뉴턴 물리학은 우연히 참이다.


즉 이렇게 생각하면 수학은 참이긴 하지만 지식은 아니며, 물리학은 지식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우연히 참일 뿐이라는 것이 흄의 결론이다.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흄과 같이 사고하긴 어렵지만, 형이상학과 신학이 지식의 최고 방법론이던 시대에, 즉 지식의 방법론으로 이미 답이 정해져 있던 시대에, 수학과 과학은 지식을 추가하지 못하며, 추가하더라도 그건 우연일 뿐이라는 흄의 이 논리에 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흄의 회의적 결론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앞서 전개된 흄의 논리가 꽤나 단단하다는 것만큼은 지금도 충분히 인정할만할 것이다.


흄의 시대를 고려하면, 당시의 칸트는 대단히 진보적인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당시의 형이상학이 다루고자 했던 신의 존재, 영원불멸, 자유로서의 우주 같은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차가운 이성이 지식의 주체가 되어 다루는 것들이 지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방법론은 종교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물론 수학적, 과학적인 것이다. 칸트는 당시의 형이상학적 논쟁들이 무의미함을 밝히고, 우연히 그럴 뿐인 자연에 대한 과학을, 필연적인 것을 발견해 내는 지식으로 격상시키고 싶었다. 칸트는 뉴턴을 구원하려 한 것이다. 칸트의 기획은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써 과학의 정당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논증해 내는 것이었다.




<순수이성비판>(1781) 표지. 위키피디아 제공.


그렇다면 칸트는 어떻게 흄의 논리를 무력화할 수 있을까?


흄에 의하면 수학은 선험적-분석적이고, 물리학은 경험적-종합적이다. 흄이 만들어 놓은 구도는 탄탄하다. 흄의 구도 안에서 흄을 반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다른 구도에서 논의를 펼친다. 칸트는 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선험적-종합적 영역에 수학과 물리학을 가져다 놓는다. 칸트는 수학적, 과학적 명제들이 경험을 통해서 참 거짓을 확인할 수 있는 명제들이지만, 또한 경험하지 않아도 이미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임을 밝힌다.


이 모순적인 조합, 그러니까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이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놀라운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세 번째 꼭지부터 해 나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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