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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3) 현상과 물자체

by 이상균

(1)편과 (2)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순수이성비판> 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신 분은 (1)편과 (2)편을 읽고 오시는 것이 좋겠지만, 현상과 물자체에 대한 이해만 필요하여 검색 등으로 유입되신 분들은 그냥 이 글을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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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편과 (2)편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를 했다.


①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유관념으로 설명하면 인식론은 독단론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설명하면 인식론은 회의론에 덜미를 잡히게 된다.


② 흄에 의하면 수학은 선험적-분석적이고, 물리학은 경험적-종합적이다. 따라서 수학은 참이지만 지식을 추가하지 못하고, 물리학은 지식을 추가할 수 있지만 우연히 참이다.


③ 경험론의 논리에 맞서, 과학이 선험적-종합적임을 밝힘으로써 과학을 필연적인 것을 발견해 내는 지식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기획이다.


자, 이제 우리는 선험적-종합적이라고 하는, 현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구도에 접근해 볼 것이다. 그런데 그전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이 생생한 세계가, 실은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우리의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마주했던 가장 놀라웠던 순간에, 당신도 도달해 보기를 바란다.


칸트는 통각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긴 형이상학적 논증을 통해 이 결론에 도달하지만, 나는 엄밀한 철학 텍스트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칸트의 텍스트를 음미할 수 없는 대신 빠르게 결론에 도착할 수 있는 샛길을 선택할 것이다.




jk-sloan-co1wmDhPjKg-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JK Sloan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먼저 광원이 있다. 태양이든 형광등이든 어딘가에서 발사된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온다. 광자는 파동이기도 한데, 이때 튕겨 나온 광자의 파장 길이는 대략 750nm 정도가 된다. 이어 이 광자는 망막에 닿고, 시각세포는 이 750nm 길이의 파장을 특정 전기 신호로 바꾼다.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 전기신호가 전달되면 뇌는 알아차린다. 아, 빨간색이로구나.


뇌는 눈도, 코도, 어떠한 감각기관도 갖고 있지 않다. 오로지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이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 짜잔, 눈앞에 빨간 사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빨간색’이 과정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광자의 파장 길이와 시각세포가 발생시킨 전기적 신호, 시신경이 이를 뇌에까지 운반하는 과정 그 어디에도 빨간색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빨간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체의 바깥쪽에 있는가, 내 안에 있는가?


합리적으로 후자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제 엄청난 질문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색깔로 드러나는 우리의 외부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빨간색이 내 안에 있는데, 외부의 세계가 바깥에 있을 수 있을까?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내면에 비친 세계이다. 진짜 세계가 아니다. 사과는 우리 인식의 원인이 아니다. 사과는 결과다.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 심상(心象), 즉 이미지인 것이다.


칸트는 기존 인식론이 가지고 있었던 당연한 것, 인식 대상의 위치를 인식 주체의 바깥에서 주체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외부 세계는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과정을 통해 해석되어 내부에 존재한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 나의 감각을 통해 내 안에 들어와 내 안에 구축된, 다채로운 색상과 수많은 사물들, 빛과 어둠과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이 세계. 내 안에 갇혀 있으면서 내 밖을 구성하는,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를 칸트는 현상계(現象界, phenomenon)라고 부른다.




자, 어떤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가 내 안에 갇혀 있는 세계라는 것이 이해가 됐는가?


지금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문장을 단지 문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진리는 원래 가르칠 수가 없다. 깨닫는 방식으로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 경우는 어느 지하철 역 앞에서 현상계가 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십 분을 훨씬 넘게 서 있었다.


이해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우리는 이제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사과 표면의 빨간색이 아니라, 사과 전체가 어떻게 나의 현상계로 들어오는지 살펴볼 것이다.


7afb755f5dc12.png ⓒ 와이즈북


사과를 책상에 놓고 바라보자. 지금 사과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앞, 아마 1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다. 그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가로방향으로 약 65m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래서 왼쪽 눈과 오른쪽 눈으로는 다른 이미지가 들어온다. 즉 왼쪽 눈으로 들어온 이미지와 오른쪽 눈으로 들어온 이미지는 다르게 생겼다. 이 차이를 양안시차라고 한다.


또한 이것이 VR(가상현실, Virtual Reality)의 원리다. VR 컨텐츠는, 그게 게임이든 영상이든 제작 원리가 같다. 약 65mm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뷰포트를 설치하여 같은 영상을 공간상 65mm 떨어진 곳에서 각각 렌더링 한다. 그리고 왼쪽 영상을 왼쪽 눈으로, 오른쪽 영상을 오른쪽 눈으로 전달한다. 이렇게 하면 2D 평면 모니터를 바라볼 때 경험할 수 없는 입체감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여담인데 나는 VR게임을 7년 동안이나 만들었다)


자, 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 그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VR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았다. 우리에겐 눈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눈이 발생시키는 이미지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 차이는 외부에 있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놀라운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왼쪽 눈을 통과한 이미지는 나의 내부에 있다. 오른쪽 눈을 통과한 이미지 역시 나의 내부에 있다. 그렇다면 그 차이, 이 두 이미지의 차이 역시 우리의 내부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차이가 우리의 내부에 있다면 우리는 더욱 놀라운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공간은 우리의 외부에 있지 않다. 공간은 우리의 내부에 있다. 우리가 바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사과의 빨간색을 만들어 낸 다음 원래 존재하는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현상계의 공간 구조 자체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현상계를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 다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해 내는 공간을 칸트는 우리 감각의 외적 직관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실은 해야 할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시간이 감각의 내적 직관의 형식이라는 것인데, 이야기는 직접 하는 것보다 다른 글로 대신하겠다. 시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칸트의 설명 보다 양자역학의 최신 논의가 훨씬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의 형식으로서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만 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여기까지 모든 논의를 따라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세계,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계란 스크램블과 토스트 하나로 요기를 한 후 출근해 만나는 회사 생활과, 퇴근 후 TV 앞에서 맥주와 함께 하는 여가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이 실감 나는 세계가, 실은 모두 내 안에 비친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공간과 시간 역시 모두 우리가 이 현상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외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현상계와 공간과 시간이 우리 안에 갇혀 있다면, 우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몇 대의 카메라를 사과 앞에 가져와 보자.


하나는 캐논 미러리스 카메라다. 이 카메라로 사과를 찍으면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가 찍힐 것이다. 이번엔 흑백 필름이 장착된 필드 카메라를 가져와 보자. 회색 사과가 찍힐 것이다.


이번엔 엑스레이가 달린 카메라를 가져와 보자. 아마 이번엔 사과 내부의 씨까지 생생하게 찍힌 사진을 우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43607150_616563700079084_6934866372735845520_n.jpg ⓒVladyslav Starozhylov, Royalty free w/watermark



이 중 어느 사과가 진짜 사과에 가까울까? 진짜란 무엇일까? 빨간 사과와 흑백 사과, 그리고 씨가 보이는 엑스레이 사과 중 어느 것이 진짜 사과인가? 그것을 누가 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지금 보이는 것처럼 보는 것은 실은 우연이다. 우리의 눈에는 캐논 미러리스 카메라와 유사한 카메라가 달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처럼 세상을 경험한다. 이 우주에서 이 세상을 우리처럼 경험하는 것은 우리, 인간 종족뿐이다. 그리고 인류는 우리 인간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에게서 이미 배웠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인간 종족에게 보이는 우주는 진짜 우주가 아닐 것이다.


다른 관점을 생각해 보자. 만약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그 카메라로는 진짜 사과를 찍을 수 있을까?


이것도 재밌는 생각이다. 정말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카메라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 카메라로 사과를 찍을 수 있다면 아마도 아무것도 찍히지 않을 것이다. 단 한 줄기 빛도 없이 새카만 사진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입자들이 찍혀 있을 것이다. (찍혔지만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우주의 99.9% 이상은 텅 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나와 당신과 사과를 구성하는 모든 양자들은, 아주 작은 핵과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당신도, 사과도, 세계도, 지구도 실은 텅 빈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 가끔 만나는 입자들이 저마다의 에너지를 가지고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면, 이것이 세계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계, 우리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고 영원히 가서 닿을 수 없는 진실의 세계를 칸트는 물자체(物自體, thing-in-itself)라고 불렀다.


371036033_24006382235644084_8598906968103299497_n.jpg 영화 <오펜하이머>가 묘사한 물자체. ⓒ UNIVERSAL PICTURES




역시나 긴 여정이었다. 이렇게 설명했지만 현상계와 물자체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문서가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어쨌든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는 비로소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언뜻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다시 리마인드 해 주겠다. <순수이성비판>의 질문은 이러한 것이었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


이제 우리는 마지막 시간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갈 것이다. 칸트가 뉴턴과 자연과학을 구원하는 순간을 지켜볼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자역학의 최신 논의에 대한 글을 링크하며 긴 글을 마친다. 다만 이 글은 <순수이성비판>이 제안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방식과는 방향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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