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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4) 초월적 자아

by 이상균

(1), (2), (3)편에서 이어집니다. 검색 등으로 이 글에 유입된 분은 앞선 글들을 읽고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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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편과 (2)편에서 다음과 같은 논의를 했다.


①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유관념으로 설명하면 인식론은 독단론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설명하면 인식론은 회의론에 덜미를 잡히게 된다.


② 흄에 의하면 수학은 선험적-분석적이고, 물리학은 경험적-종합적이다. 따라서 수학은 참이지만 지식을 추가하지 못하고, 물리학은 지식을 추가할 수 있지만 우연히 참이다.


③ 경험론의 논리에 맞서, 과학이 선험적-종합적임을 밝힘으로써 과학을 필연적인 것을 발견해 내는 지식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기획이다.


그리고 선험적-종합적 명제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현상과 물자체에 대해 알아보았다. 우리는 우리의 바깥에 대상과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시간과 공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 깨달음을 조금 어려운 (대신 엄밀한) 철학의 언어로 쓰면 다음과 같다. 주관의 인식형식이 곧 인식된 대상세계의 존재형식이다.


자 이제 우리는 현상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이제 <순수이성비판>에 조금 더 깊게 다가가 볼 것이다.




(1)편에서 이야기했던 바닷가의 돌과 칠면조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해가 뜨면 햇볕을 받아 바닷가의 돌이 따뜻해지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이고, 매번 경험해서 확인해봐야 하므로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흄의 논리였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아침이 오지 않은 날의 칠면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은 인과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제 이 논리를 반박해 볼 시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 안에 비친 현상계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꼭지에서 얘기했다. 이 현상계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자.


<오징어 게임>을 보았는가? 무엇을 통해 보았는가? 아마 넷플릭스를 통해서 보았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을 보여주는 것은 넷플릭스이다. 여러분이 이 글을 보기 위해서는 웹브라우저가 필요하다. 이 글을 보여주는 것은 웹브라우저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모든 것은 누군가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건 누구인가? 코타키나발루의 석양과, 아이슬란드의 오로라와, 모든 아침 해와 색채로 가득한 이 세상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누구인가? 즉 현상이 구성된 것이라면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인가?


lightscape-LtnPejWDSAY-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Lightscape


놀랍지 않은가? 이 놀라운 세계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보여진 세상을 인식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시각과 청각을 통해, 맛과 냄새를 통해 현상세계를 구성하여 당신에게 보여주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주체는 둘로 나뉜다. 당신은 분명 인과필연성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상세계의 일원이다. 혹은 당신이라는 현상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씻고 아침을 먹고 회사에 출근하는 당신은 현상세계의 일원으로서의 당신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당신의 세계에는 또 다른 당신이 있다. 이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당신 말이다. 당신을 위해 매 순간 시간과 공간의 형식으로 세계를 구성해나가고 있는 당신, 영원히 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물자체를 매 순간 해석하여 당신이 우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당신,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매 순간 확인시켜 주는 당신 말이다.


당신을 위해 당신의 현상계를 매 순간 구성하는 당신, 이 존재를 칸트는 초월적 자아라고 부른다. 이것이 칸트의 철학이 초월철학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 정리해 보자. 우선 당신이 살아가는 세계는 현상계이다. 그리고 그 현상계는 무언가 신적인 것이 구성해 준 것이 아니다. 바로 당신 스스로가 구성한 것이다. 즉 당신의 세계의 규칙 역시 당신 스스로가 구성한 것이다.


책상 위에 있는 물컵이 떨어지면 그 물컵은 깨어진다. 해가 뜨면 돌은 따뜻해진다. 이 인과필연성은 당신의 외부에 있지 않다. 당신 스스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상세계의 규칙은 현상세계에 속한다. 당신의 외부의 규칙이 아니다. 초월적 자아가 만들어낸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해보자. 초월적 자아는 경험적인가? 우리는 초월적 자아를 경험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매 순간 현상계를 경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상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초월적 자아를 경험할 수는 없다. 초월적 자아는 현상계의 경험을 넘어서 있다. 즉 초월적 자아는 선험적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흄의 논리에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초월적 자아가 선험적이라면, 인과필연성 역시 선험성을 획득한다. 이제 물컵은 떨어지면 깨어진다는 사실. 태양이 떠오르면 돌은 따뜻해진다는 사실은 선험적 규칙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현상계의 규칙이라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한 뉴턴의 물리법칙들도 필연적으로 선험성을 확보한다. 과학이란 초월적 자아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 규칙을, 우리가 경험을 통해 종합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은 칸트에 의해 선험적-종합적 지식의 지위를 획득한다. 칸트는 끝내 뉴턴을 구원해 낸 것이다.




논증이 끝났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우리는 결국 도달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현상계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 현상계를 구성하는 초월적 자아가 있음을 알았고, 현상계를 구성하는 주체가 이미 선험적이므로 현상계의 규칙은 선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과 필연성은 초월적 자아가 만든 규칙으로, 현상세계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인과 필연성은 물자체에도 있는가?


우리 바깥에 있는 물자체는 우리가 경험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것이다. 칸트의 실재(實在)다. 그러나 이러한 물자체를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세계에 대응하는 각각 개별적 사물로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으로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칸트를 잘못 읽은 것이다. 물자체는 현상을 초월해 있다. 물자체를 현상의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초월적인 것을 다시금 경험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즉 사과의 빨간색과 마찬가지로, 물컵이 떨어져서 깨어지는 인과 필연성은 물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자체와 현상계의 관계 속에도 인과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자체에 대해서는 이러한 논의 자체가 가능하지가 않다. 사과의 빨간색과 마찬가지로 인과 필연성은 철저하게 현상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현상을 벗어나는 것들, 그러니까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 등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한다. 칸트는 이성을 비판해서,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 짓는다.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 <순수이성비판>인 이유다.




<순수이성비판> 시리즈가 끝났다. 소설을 제외하고 이렇게 긴 글을 써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실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과학을 선험적 종합명제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나의 설명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 내가 보여준 논증은 칸트의 논증과 방향만 비슷할 뿐, 엄밀히 말하면 <순수이성비판>의 방식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기까지 읽고 혀를 찰 전공자들을 위해 변명을 한마디 늘어놓자면, (일반 독자는 이 문단을 안 읽어도 된다) 초월적 도식으로서의 표상은 이미 선험적이며 도식을 술어화하면 선험칙으로서의 명제를 얻을 수 있으므로, 초월적 자아의 초월성을 통해 인과 필연성이 선험적임을 설명해 가는 방법 자체가 칸트의 의도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문서 안에 담지 못한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먼저 과학이 선험적 종합명제가 되었기 때문에 합리론과 경험론은 이제 더 이상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빠졌다. 선험적인 자연의 규칙을 경험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통해 지식으로 종합해 나간다면,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합리론과 경험론이 둘 다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흔히 '칸트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라는 호수로 흘러들어 간다'라고 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다.


또한 철학사적으로 칸트는 플라톤의 계승자이면서 플라톤의 구도를 완전히 파괴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순수이성비판> 이후 현상세계는 더 이상 이데아의 그림자가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경험적으로, 인간에게는 반드시 주어진다.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은 경험적 실재론이기도 하다. (이 구도는 니체에 의해 일원론으로 정리되었다가, 이후 포스트모던에 의해 일원성 자체가 거부되는 구도로 진행된다.)


이 밖에도 할 얘기가 많지만, 지면은 한계가 있으므로 다음에 기회가 될 때마다 한 꼭지씩 써보도록 하겠다.


이 네 개의 꼭지를 모두 따라온 분이 있다면 정말 박수를 드리고 싶다. 부디 이 글이 <순수이성비판>, 혹은 칸트로 나아가는 괜찮은 출발점이 되었기를.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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