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독서모임 [보탬] 이번 시즌 주제는 실재(實在)다.
실재란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명백하게 우주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아니 뭐라고? 싶겠지만 이 얘기는 실은 별로 쉽지 않은 얘기다. 과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세계와 우주는 우리 각자가 없이는 이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첫 시간에 우리는 최신 양자역학이 얘기하는 실재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남은 세 번의 시간 동안, 우리는 칸트가 얘기하는 실재(물자체)와 라캉이 얘기하는 실재(실재계)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교가 얘기하는 실재(무상무아)에 대해 얘기할 예정인데...
그래서 두 번째 시간 교재로 쓰기 위해서 네 편에 걸쳐 <순수이성비판>에 대해 썼는데... 쓰고 나서 깨달은 것은, 네 편의 내용 어디에도 제대로 된 칸트는 없다는 것이다.
(1)은 칸트의 문제의식에 대한 것이었고, (2)는 칸트가 넘어서려 한 흄에 대한 것이었고, (3)은 <순수이성비판>의 논리를 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현상 개념에 대한 것이었고, (4)에 와서야 초월적 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칸트는 이렇게 깊다. 내 솜씨로는 한 번에 그 핵심을 찔러낼 재간이 없다. 네 편이나 되는 긴 글을 쓰고도 겨우 칸트 근처를 겉돌았을 뿐이다.
또한 새삼 인문학 입문서를 쓰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도 얻었다. 원저자(칸트)의 의도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원저자 보다 쉽게 원문을 해설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전공자가 아니므로 엄밀함을 다소 포기하겠다'는 변명을 하고 나서도, 내가 오히려 칸트를 오해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건 칸트가 아니라 내 생각 아닌가? 하는 고민에 시달렸다.
여하튼 소설을 제외하고 이렇게 긴 글을 써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읽은 지 몇 달이 되어서 이제 한자경 교수님의 <칸트 철학으로의 초대>를 최근 책장에 넣었다.
그래도 오래된 숙제를 다 한 기분이라 상쾌하다. 점심시간도 끝났으니 두서없는 후기도 끝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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